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86화 (86/109)

#86. 불발탄

태준은 퀭한 눈으로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사 이래로 가장 바쁜 날이 아닐까 싶다. 계속해서 몰려오는 일, 일, 일.

보고서 작성을 마치고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언뜻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덧 시곗바늘은 저녁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기에 사원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한다. 보통 때 같으면 태준 또한 칼같이 퇴근하여 수호를 데리러 갔을 텐데. 그리고 세 가족이 함께 저녁 식사를 했을 텐데. 태준은 아쉬운 얼굴로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야근 멤버인 성균과 함께 끼니를 해결하러 가는 길.

다른 부서 사무실과는 달리 불이 환한 디자인 팀 사무실이다.

“디자인 팀은 전원 야근인가 보네.”

성균이 디자인팀 사무실을 창 너머로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성균의 말마따나 디자인팀은 전원이 남아 나머지 업무를 처리 중이었다. 다른 팀들보다도 유독 바빠 보이는 모습.

그런데 그중 선혜만 보이지 않는다.

수호 때문에 일찍 퇴근했나 싶었지만 가방을 비롯한 짐이 자잘하게 남아 있었다.

그럼 수호는?

의아한 얼굴로 갸웃하며 선혜에게 연락해 보려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핸드폰 화면이 까맣다. 옆에 달린 버튼을 눌러도 옆을 툭툭 쳐 봐도 무용지물.

방금까지만 해도 배터리가 충분했었는데.

어이없는 얼굴로 가만히 핸드폰을 바라보자 성균이 힐끔거리다 물었다.

“고장난 거 아냐?”

“하…… 네. 그런가 봐요. 어쩌지.”

“내 핸드폰 빌려줘?”

태준은 반가운 마음으로 흔쾌히 응하려다 멈칫했다.

선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성균임을 안다. 차마 그런 성균의 핸드폰을 빌려 선혜에게 연락할 수가 없었다.

수호의 픽업은 어떻게 되는지 심히 궁금하고 걱정이었지만 선혜라면 현명하게 잘 처신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태준은 걱정을 잠시 내려놓았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핸드폰 바꿀 때 됐나 보다.”

“그러게 말입니다. 오래 써서 그런가.”

태준은 성균과 자잘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꺼진 핸드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

같은 시각.

선혜는 차를 몰아 수호의 유치원에 다다라 있었다.

급하게 온다고 왔는데, 퇴근길 러시아워에 맞닥뜨리는 바람에 조금 늦고 말았다.

선생님께 전화로 양해를 구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급해서 서둘러 차에서 내린 선혜는.

“……?”

예상외로 학부모들로 북적거리는 유치원 앞 풍경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때 같으면 하원한 애들을 데리고 돌아갔을 학부모들이 아직도 유치원 앞에 있었다.

그것도 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띠고서.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유치원 입구 쪽으로 향하는 때였다.

“이게 말이나 되느냐고요!”

입구 쪽에서 새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

민희 엄마, 연지였다.

대문 너머 유치원 현관 앞에 열댓 명 정도 되는 학부모가 모여 있었다. 그리고 연지가 앞장서서 허리에 손을 얹고 삿대질을 마구 해대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도대체 유치원에서 애한테 뭘 먹이길래 애가 한 달 사이에 충치가 세 개나 생겨요? 뭐 이상한 거 먹이는 거 아니에요?”

눈이 뒤집혀 소리 소리를 지르는 연지 앞에는 유치원 선생님이 죄인처럼 서 있었다.

“민희 어머님. 진정 좀 하시고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우리 애만 그런 거면 내가 양치 교육을 잘못시켰다, 내가 뭘 잘못먹였나 보다 하고 생각할 수 있어. 그런데!”

연지가 주위에 서 있는 학부모들을 한 바퀴 둘러 보았다. 학부모들은 연지만큼 소리를 지르지 않을 뿐이지 다들 불만 가득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아이들이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여기 전부 다 충치 때문에 한 달 동안 고생했다잖아요. 아니 충치가 뭔 전염병도 아니고. 단체로 이러는 거면 유치원에서 케어를 똑바로 안 한다는 거 아니냐구요!”

“어머님. 저희는…….”

연지는 선생님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머님 소리 자꾸 하지 말고, 원장 불러와요! 어?! 원장 어디 있냐고!”

“원장님은 아버지가 위독하셔서 안 계세요. 다음에…….”

“다음? 다음 언제! 언제!”

수호를 데리고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입구가 막힌 데다 소란이 일고 있으니 차마 끼어들 수가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는 때였다.

또각, 하는 하이힐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더니 고급스러운 향수 냄새가 바람을 타고 밀려들었다.

걸음걸이를 따라 찰랑거리는 태연의 긴 머리칼을 망연하게 보고 있는 때였다.

자리에 선 태연이 현관을 가로막고 서 있는 학부모들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요.”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닌데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대는 연지보다 영향력이 있는지 학부모들이 태연을 돌아보았다. 연지 또한 선생님에게 윽박지르던 걸 멈추고 태연 쪽을 돌아보았다.

우아하게 선글라스를 벗은 태연이 생긋 웃었다.

“우리 애 좀 데려가고 싶은데. 길 좀 터 주시겠어요?”

정중했지만 눈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몇몇 학부모들이 움찔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마치 모세로 하여금 홍해가 갈라지는 풍경 같았다.

태연은 다시금 선글라스를 쓰고 그사이를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그러다 연지 앞에 잠깐 서서 연지를 지그시 응시했다. 연지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태연은 피식 웃더니 그 사이로 척척 걸어 현관으로 갔다.

현관 안쪽에는 소란 때문에 미처 하원하지 못한 아이들이 옹기종기 서 있었다.

“엄마!”

그 사이에 있던 세빈이 태연을 보고 반색하며 달려 나왔다. 태연은 세빈과 며칠 만에 재회한 사람처럼 포옹하고 입을 맞춘 뒤 아이의 가방을 벗어 제 팔에 걸며 돌아섰다.

그러다 문득,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모여 있는 아이들 사이에 있는 수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슬며시 들어 올리며 묻기를.

“여기 최근에 충치 생긴 사람?”

아이들 중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충치가 생긴 아이들에 비해 현저히 많은 숫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연이 앞을 바라보았다. 연지를 비롯한 학부모들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그 애들만 충치가 생긴 거면 그 애들한테 따로 추궁할 일 아닐까요?”

입가에서 웃음기가 조금 가시자 서늘한 느낌이 확 풍겼다.

“유치원 탓을 할 게 아니라.”

“그……그!”

당황한 연지가 말을 더듬기 시작하고 학부모들도 저마다 눈을 피한다.

태연은 그런 학부모들을 향해 생긋 웃어 보이고는 세빈의 손을 잡고 그들을 가르고 걸어갔다.

그러고는 무리 뒤편에 서 있는 선혜를 보고는 물었다.

“수호도 충치 생겼나 봐요?”

멍하니 태연의 행동을 보고 있던 선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뇨. 아닌데요.”

“그럼 얼른 애 데리고 와요. 수호 저기 기다리고 있는데.”

태연 덕에 길이 터 있었다. 선혜는 그 사이로 들어가 건물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선혜를 본 수호가 아이들 사이로 나왔다.

선혜는 수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태연과 선혜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학부모들도 하나둘 다가와 아이들을 데려가기 시작했다.

현관 앞에 죽치고 있는 무리들을 아니꼬운 눈으로 바라보는 학부모들도 있었다. 그 누구도 나서지 못했을 뿐, 다들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무리를 헤치고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태연이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아뇨. 아직요.”

“그럼 같이 먹을래요? 나도 저녁 스케줄 없는데. 남편도 출장 갔거든요.”

선혜가 미안한 얼굴로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

“죄송해요. 바로 회사로 돌아가 봐야 해서.”

“회사요? 수호 데리고?”

“네. 오늘 야근을 하게 돼서요. 어쩔 수 없이…….”

“나한테 맡기면 되잖아요.”

태연이 뭐가 문제냐는 듯이 물었다.

흔쾌한 제안에 선혜는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어른들과 낯선 환경에 있는 것보다 고모인 태연과 친구인 세빈과 있는 게 수호에게 있어서도 훨씬 편할 터. 수호에게 의사를 물어보려는 때였다.

“엄마. 나 엄마 회사 가 볼래.”

수호가 선혜의 손을 꼭 움켜잡으며 말했다. 아이의 눈빛이 간절하다. 게다가 스리슬쩍 선혜의 다리 뒤로 숨기까지. 태연을 힐끔거리는 시선에는 작게 두려움이 묻어나 있었다.

애가 왜 이러나 싶어 멀뚱멀뚱 쳐다보던 선혜는 뒤늦게 태연이 기분 상하지 않았을까 걱정되어 태연을 바라보았다.

“진짜 신태준 어릴 때랑 똑같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태연은 수호의 행동을 보고 피식거리고 있었다. 귀엽다는 듯이.

“그래도 다음에 고모네 놀러 오는 거다? 고모가 맛있는 거 해 줄 테니까.”

“……네.”

“나 참.”

머뭇거리다 대답하는 수호를 보며 태연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웃음 끝에 수호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했다. 그 시선이 그대로 선혜를 향해 옮겨갔다.

“그럼 야근 잘 해요.”

“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아줌……아니, 외숙모!”

세빈이 산뜻하게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낯선 호칭에 선혜는 뒤늦게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이 차를 타고 멀어진 뒤 선혜는 수호를 차에 태우고 자신도 차에 올라 탔다.

유치원 앞에는 여전히 학부모들이 몰려 있는 상태. 선혜를 보는 시선이 영 곱지를 않았다. 선혜는 애써 그 무리들을 무시하며 시동을 걸었다.

“우리 아들. 오늘 유치원에서 뭐 했어?”

선혜가 묻자 수호가 가방에서 말아두었던 도화지 한 장을 꺼내 펼쳐 보여주었다.

“주말에 하고 싶은 일 그려서 발표하는 거 했어.”

수호가 펼친 도화지에는 할로윈 페스티벌이 재현되어 있었다. 서툰 아이의 그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에 대한 기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림 속에 그려져 있는 세 가족은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선혜는 그림을 보며 미소를 짓다가, 시간을 보더니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엄마. 근데 진짜 엄마 회사 가는 거야?”

수호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응.”

“와.”

나지막한 감탄사를 내뱉는 수호를 선혜가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앞을 바라보는 선혜의 눈은 걱정으로 옅게 물들어 있었다.

‘괜찮겠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어느덧 창밖으로는 회사 건물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

연지는 멀어지는 선혜의 차를 보며 씨근덕거렸다.

자신을 서늘하게 바라보던 태연의 눈빛과 그런 태연의 옆에 찰싹 붙어 저를 깔아보던 선혜의 눈빛이 떠오르자 수치심에 얼굴이 벌게졌다.

‘저 여우 같은 게…….’

나선 건 태연이었지만 보다 강자인 태연보다는 그동안 만만하게 보던 선혜에게 화가 향했다.

한참 씩씩거리고 있는 때였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아이들을 모두 내보낸 유치원 선생님이 다소곳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 했다.

“돌아가긴 누가 돌아가?”

자존심이 뭔지. 이대로 발걸음을 돌리기가 싫었다.

어떻게든 우기고 싶은 못된 심보였다. 유치원 선생님은 이제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런 유치원 선생님에게 연지가 다시금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려는 때였다.

“……민희가 초콜릿 줘서 그런 거예요.”

아이들 중 한 명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한 여자아이가 손가락을 들어 민희를 척하니 가리켰다. 지금은 아니었지만 민희로 하여금 한 번쯤 따돌림을 당해 본 아이였다.

“민희가 초콜릿을 많이 줬었어요.”

“그, 그게 무슨 소리니? 우리 애가 그럴 리가 없…….”

“진짜예요!”

이번에는 다른 아이가 나섰다.

이 아이도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돌려가면서 따돌림 시키던 민희가 만들어낸 피해자였다.

“맞아요. 민희가 초콜릿 줬어요!”

“맞아! 자기 말 잘 들으면 초콜릿 줄 수 있다고 잘난 척했어요!”

다른 아이들도 상황이 비슷하기는 마찬가지. 그동안 품고 있던 앙금을 쏟아내는 아이들을 보며 민희는 얼굴이 벌게진 채 서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언제 그랬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상대의 머릿수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일이 너무 커져버렸다.

“민희, 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연지가 서슬 퍼런 눈으로 민희를 쳐다보았다.

“그, 그게…….”

주위에 제 편이 하나도 없다.

민희는 본능적으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민희를 보는 학부모들과 유치원 선생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뭐, 뭐라고?!”

연지의 성난 고성에 민희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한편.

배려까지 해 줬는데 빈손으로 돌아가기는 뭐했기에 선혜는 카페에 들러 팀원들이 먹을 커피와 간식거리를 사 가기로 했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기주에게 연락을 하고 흔쾌히 알았다고 하는 기주의 대답을 들은 선혜는 빠르게 카페로 다가갔다.

어쩐 일로 카페에는 고은밖에 없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인지 일찍 퇴근을 한 것인지 매니저는 보이지 않았다.

매니저가 없으니 선혜를 대놓고 띠껍게 바라보던 고은은 선혜의 옆에 있는 수호를 뒤늦게 발견했다.

“……!”

수호를 본 고은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뭐야.’

윤선혜 아들?

근데…… 태준과 닮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어안이 벙벙한 고은의 얼굴을 잠자코 바라보던 선혜가 입을 열었다.

“주문 좀 할게요.”

“……아, 네.”

고은은 자기도 모르게 멍청하게 대답을 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선혜는 팀원들이 늘 시키던 메뉴대로 커피를 시키고 남아 있는 디저트도 모두 달라고 이야기했다. 고은은 포스에 메뉴를 찍으면서도 카운터 아래에 서서 자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수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혼란과 충격 속에서 겨우겨우 메뉴를 모두 입력한 고은이 입을 열었다.

“계산해 드릴게요. 총 삼만오천 원 되겠습니다.”

선혜가 계산을 하기 위해 카드를 내미는 그때였다.

선혜의 옆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척하니 신용카드를 꺼내는 손이 낯이 익었다.

“거기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추가해서 이걸로 계산해 주시죠.”

지금 이 상황도.

선혜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옆에 서 있는 태석을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