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85화 (85/109)

#85. 뜻밖의 서프라이즈

커피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다가가는데 태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선혜 씨. 나 오늘 수호 데리러 가기 힘들 것 같아요ㅜㅜ 오늘 야근이래요.]

아침부터 어째 연락이 안 온다 싶었는데. 바빠서 그랬구나.

[알겠어요.]

[미안해요ㅜㅜ]

[미안하긴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일해요.]

[고마워요 선혜 씨♥]

“뭐야, 이게.”

하트에 담긴 애교에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가만히 메시지를 바라보던 선혜는 문득 시선이 느껴져 카페 쪽을 돌아보았다.

고은이 카운터에 서서 선혜를 응시하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은은하게 드리운 채로. 그러다 선혜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시선을 거둔다.

주문을 하러 카페에 가까워질 때 또렷해지던 대화 소리가 떠올랐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둘의 대화를 듣고 말았다.

카페 정직원을 제안하던 매니저. 그리고 카페를 나서던 순간 취업을 준비하겠다고 결심하던 고은의 목소리.

‘저 카페에 취업하려는 건가.’

고은과 계속 마주하는 게 달갑지 않았던 선혜는 고은이 아르바이트를 빨리 그만두기를 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정직원으로 취업이라니.

상당히 찝찝했다.

고은이 그동안 저와 제 주위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선혜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같은 부서도, 소속도 아니었지만 같은 공간에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싫었다.

아무리 친구 없이 홀로인 시간이 길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는 대신 프리랜서로 지냈다 하더라도.

이유 없이 사람들의 미움을 사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너랑 나랑은 진짜 악연인 모양이다.’

선혜는 애써 카페에서 눈을 돌렸다.

언제쯤 이 악연은 끝을 맺을 수 있을까.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보며 질긴 인연도 이처럼 문 닫히듯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때였다.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살짝 벌어진 주머니 속을 보니 발신자가 유치원이었다. 이 시간에 전화가 온 적이 없어서 의아했다.

‘설마.’

수호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잠깐 든 생각에 갑자기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선혜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 아, 수호 어머님. 저 수호 담당 선생님인데요…….

우물쭈물 말을 흐리는 게 답답해서 선혜가 재촉하듯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망설이던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의 말을 들은 선혜의 얼굴이 차츰 굳어가다가.

“……네?”

난처함으로 짙게 물들었다.

*

‘이거 이러다가 다 같이 야근하게 생겼네.’

기주는 업무 진행 속도를 확인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업무량이 너무 많아 진행 속도가 더딘 탓에 이번 주 내로 마감인 디자인이 아직도 잔뜩 쌓여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때였다.

무심결에 그의 시선이 희재에게 흘끗 닿았다. 그러다 희재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기주는 저도 모르게 휙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피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당황해서 눈을 굴리다가 다시금 바라보면 태연하게 일을 보고 있는 희재가 보인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건가.

그런 일을 겪고도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건지.

‘신태석 그 인간도 불편해 죽겠는데…….’

사내 블랙리스트에 손희재라는 사람까지 더해졌다.

그날 일이 생각 남에 자꾸만 몸에 열이 오른다. 괜히 건물 난방이 빵빵함을 탓하며 손부채질을 하면서 심호흡을 하고 있는 때였다.

커피 심부름을 갔던 선혜가 돌아왔다. 커피로 심란한 마음을 달랠 수 있겠다 싶어 안도하는데, 모두에게 커피를 돌린 선혜가 기주의 앞에 다가와 섰다.

기주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선혜를 보았다.

“왜 그래, 선혜 씨?”

선혜는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짐작하건대, 좋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저, 팀장님.”

들어주기 어려운 청임을 알기에 선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한데…… 혹시 오늘 일찍 퇴근할 수 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선혜의 말을 들은 지민이 도끼눈을 뜨고 미어캣처럼 머리를 쳐들었다.

야근을 예상하던 기주 또한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왜? 뭐 때문에 그러는데?”

“그게, 유치원에서 애를 한 시간 정도 더 봐주곤 했었는데요. 선생님들이 사정이 생겨서 오늘은 어려울 것 같다고 하셔서요.”

오늘따라 선생님들이 모두 시간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원장님은 아버님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유치원을 떠났고, 오늘 수호를 맡아주기로 한 선생님은 몸이 좋지 않아 일찍 조퇴를 했다고.

전화를 한 선생님도 오늘 저녁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도 유치원에 남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

기주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건 곤란한데. 안 그래도 오늘 다 같이 야근이라도 해야 할 판이거든. 일이 너무 많아서.”

기주의 말에 선혜는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태준은 오늘 자잘한 메시지조차 주고받지 못할 정도로 바빠 보인 데다가 야근이라고 했다.

엄마인 경애에게도 부탁하기 어려웠다. 석주가 일주일이나 휴가를 내는 바람에 전보다 바쁘게 일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시댁 쪽이 잠깐 떠올랐지만 무리라는 판단이 섰다. 이렇게 갑자기 아이를 맡길 정도로 편한 사이는 아니었으므로.

‘어떡하지.’

선혜가 난처해하자 기주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냥 애를 여기로 데리고 오는 게 어때, 선혜 씨?”

희재의 말에 선혜가 눈을 크게 뜨고 희재를 쳐다보았다.

희재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뜻밖의 제안을 했다.

“보니까 애 맡길 데도 여의치 않은 것 같은데. 그냥 회사로 데리고 와.”

“그래도 괜찮을까요?”

“차라리 그게 낫지. 애 혼자 유치원에서 기다리게 할 수도 없잖아? 요새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팀장님 말씀대로 오늘 마감 쳐야 하는 일이 많아서 다 같이 야근해야 할 것 같은데 선혜 씨가 빠지면 곤란하기도 하고.”

희재가 덧붙였다.

“게다가, 저번에 보니까 애가 얌전히 잘 기다려 줄 것 같던데.”

지민과 민영이 놀란 표정으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희재가 언제 선혜의 아들을 봤는지 궁금한 눈초리였다. 그건 기주도 마찬가지.

선혜는 고민했지만 고민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다 같이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자신만 빠질 수도 없는 노릇.

게다가 수호라면 사정을 이해하고 묵묵히 기다려 줄 아이였다.

“네. 그러면 이따가 잠깐 애 좀 데리러 가도 될까요? 최대한 빨리 오도록 할게요.”

“그래. 그러도록 해.”

기주의 허락을 맡은 선혜는 감사하단 의미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잠깐 수호를 데리고 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상상해 보았다.

다들 놀라겠지. 태준이랑 똑같이 생겼으니.

희재가 그러했듯이 다른 사람들도 수호와 태준의 관계를 자연히 눈치챌 수도 있었다.

걱정이 들었지만 잠시뿐.

걱정할 게 뭐 있어.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다들 알게 될 건데.

선혜는 보다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

같은 시각.

현성 출판사 이사실.

태석은 업무용 책상 앞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액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액자에는 이전에 선혜의 뒷조사를 하다 찍었던 수호의 사진이 곱게 끼워져 있었다. 태석은 고민하는 눈초리로 그 사진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나 참…….”

그러다 현타가 찾아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도대체 며칠째 같은 고민으로 골머리를 앓는 건지.

스스로가 한심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뻐근한 눈가를 매만지던 태석은 다시금 사진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액자에서 사진을 꺼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기다란 손가락 끝이 톡톡 사진 위를 두드린다.

못 나온 사진이면 그냥 버리기라도 할 텐데. 사진이 화보처럼 잘 나오는 바람에 버리기도 뭐했다.

그런데 심각한 얼굴로 고민할 때는 언제고, 사진 속 수호를 계속해서 보고 있자 히죽 입꼬리가 올라간다.

‘귀여운 녀석 같으니라고.’

보면 볼수록 정이 간다고 생각하는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태석이 대답하자 문이 열리고 김 비서가 발을 들였다.

“이사님. 레어미디어 대표님 오셨습니다.”

“아.”

태석은 그제야 시간을 확인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는지. 태석은 급한 마음에 수호의 사진을 그대로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레어미디어 대표가 이사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사님. 오랜만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두 남자가 악수를 주고받는 사이 김 비서가 간식거리를 가지러 가기 위해 물러났다.

태석과 레어미디어 대표는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다. 레어미디어 대표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걸 본 태석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우세요? 무슨 땀을 그렇게.”

“아, 그게. 하하. 차가 난방이 워낙 잘 돼서 말입니다. 또 워낙 제가 더위를 잘 타기도 하고요.”

“창문이라도 잠깐 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대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태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가를 향해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돌풍이 불어닥쳤다. 좁은 틈새로 쏜살같이 들어온 바람에 책상 위에 있던 수호의 사진이 들썩이는가 싶더니 휙 날아올라 소파 근처로 떨어졌다.

레어미디어 대표가 반사적으로 떨어진 사진을 집어 들었다. 무심결에 사진 속 수호를 본 그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드님이세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이 되었다. 사진 속 수호는 태준과 비슷한 태석과도 많이 닮은 얼굴이었으니까.

“아뇨. 아들은 아니고.”

태석이 다소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다가와 레어미디어 대표의 손에 들려 있던 사진을 빼갔다. 재킷 안 주머니에 넣으며 그가 말했다.

“조카예요.”

“조카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석의 조카라면 태연의 딸밖에 없을 텐데.

하지만 그걸 묻기도 전에 태석이 다른 화젯거리로 말을 돌렸다.

레어미디어 대표는 태석의 장단에 맞춰주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업무용 책상 위에 놓인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방금 본 사진이 들어가기에 딱 맞는 사이즈.

있지도 않은 조카의 사진을 액자에 넣어서 보관한다?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혈육이 아니라고 하기엔 또 너무 닮았고…….

“대표님?”

“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대표는 태석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다시금 태석과 일 관련 대화를 주고 받았지만 한번 든 의구심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그 의구심을 바탕으로 머릿속에 이상한 상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상상으로 그치기에는 증거가 너무나 명확해서 상상이 아닌 현실에 가까워진다.

‘설마.’

듣기로는 팔불출이라고 들었는데.

하지만 사람들에게 소문난 것과는 다른 면모를 누구든 숨기는 것 아닌가.

대표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태석을 흘긋거리다가 태석의 의아한 눈과 마주치자 실없이 웃었다.

속으로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태석의 커다란 비밀을 알아버린 것 같아서 말이다.

애 엄마가 누군지 몹시도 궁금해졌다.

*

레어미디어 대표가 나간 뒤 태석은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자리에서 일어나 업무용 책상으로 돌아가자 책상 위에 놓인 빈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재킷 안 주머니에 넣은 수호의 사진이 생각나 꺼내 액자에 끼워 넣었다.

수호의 사진을 주워들고 놀란 표정을 짓던 대표가 생각이 났다. 대화 중간중간 저를 바라보던 묘한 눈빛도.

왠지 모르게 찝찝했지만 태석은 기분 탓이라 여기며 떨치려 애썼다.

생각을 전환하기 위해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네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인터폰으로 김 비서를 부른 태석이 김 비서에게 물었다.

“오늘 일정 더 없지?”

“네.”

“퇴근해도 괜찮다는 얘기네?”

“네. 이사님.”

조기 퇴근은 언제나 즐거운 법. 태석이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짐을 챙기는 때였다.

“이사님. 추후 점심 일정 말인데요.”

“아. 비는 날 있어?”

태석의 말에 김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동생분이랑 식사하시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점심 약속이 계속 있으셔서요.”

“그래?”

태석은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저녁이나 같이 하지 뭐.”

어차피 스케줄도 다 마쳤겠다. 앞으로 시간이 안 난다면 시간이 있는 지금 실행하는 게 나았다.

태준에게 연락을 하려다가 말았다. 장난기가 발동한 태석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깜짝 놀래켜 줘야지.’

자신의 등장에 깜짝 놀랄 태준과 선혜를 상상하니 마냥 즐겁기만 한 태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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