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84화 (84/109)

#84. 저마다의 꿍꿍이

다음 날 아침.

선혜는 오랜만에 수호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있었다. 어제 출근 준비를 미처 하지 못하고 온 태준은 오피스텔에 들러 출근을 해야 해서 아침 일찍 나간 터다.

‘이따가 회사에서 봐요.’

잠결에 입을 맞추며 하는 인사에 비몽사몽하게 고개를 끄덕끄덕. 전날 무리를 한 탓인지 배웅조차 하지 못했다. 그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벌써 보고 싶기도 하고.

이따가 회사 가면 또 볼 텐데. 그사이를 못 참고 태준을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이 낯설다.

‘차가 왜 이렇게 막혀.’

시간을 확인하는 시선에 조바심이 묻어났다.

출근길 꽉 막힌 도로를 뚫고 차는 어느덧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

수호의 등에 가방을 메어주고 하는 잠깐의 작별인사.

“엄마.”

수호가 문득 선혜를 불렀다.

“응? 왜?”

“놀이동산 가는 거, 며칠 남았어?”

수호의 눈은 벌써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선혜는 그 눈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날짜를 셌다.

놀이동산에 가기로 한 건 이번 주 토요일.

그러면.

“다섯 밤만 자면 되겠다.”

“다섯 밤이나?”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수호에게는 다섯 밤도 길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툴툴거리는 아들이 귀여워 선혜는 그저 웃었다. 허리 숙여 아이와 눈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다섯 밤 금방 갈 거야.”

“진짜?”

“그럼. 당연하지.”

선혜의 말에 수호의 얼굴에 금방 웃음꽃이 피어오른다. 별거 아닌 말에도 금방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애는 애였다.

선혜는 수호를 꼭 안아주었다.

“잘 다녀와. 이따가 끝나면 아빠랑 잘 오고.”

“응, 엄마.”

수호가 유치원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던 선혜는 이윽고 돌아섰다. 그러다가 민희 엄마인 연지를 비롯한 아주머니들 무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선혜와 눈이 마주치자 저들끼리 빠르게 눈치를 주고받는다.

힐끔대는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평소에 그리 가깝게 지내지는 않던 사람들이었지만 저런 아니꼬운 눈으로 쳐다보는 건 처음이었다. 선혜가 인사를 해도 받는 둥 마는 둥.

차에 올라타 창밖을 바라보면 선혜의 차를 힐끔대며 저들끼리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선혜는 가만히 미간을 좁히며 중얼댔다.

“뭐야, 대체.”

다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궁금하고, 찝찝했지만 따질 여력이 없었다. 출근 시각에 임박했기 때문에.

선혜는 그들을 뒤로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

선혜는 차를 지하에 주차시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가만히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자니 지난 금요일 회식 때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지민과 민영이 자신의 뒷담화를 하는 걸 들었고, 또 아버지가 그 뒷담화를 듣고 자신을 변호하는 걸 들었고, 또 희재가 수호의 정체를 알게 되고.

여러모로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였다.

툭. 양어깨를 감싸는 손길이 대뜸 느껴져 선혜는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얼굴이 고개를 갸웃하며 서 있었다. 태준이다.

“왔어요?”

“네. 왔습니다.”

선혜의 말을 받으며 그가 어깨에서 손을 떼고 옆에 섰다.

“수호는 잘 데려다주고 왔어요?”

“네. 수호가 놀이동산 가는 날 엄청 기대되나 봐요. 몇밤 자면 되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이번주 주말이네요.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그렇게 말하며 태준이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짠, 하고 맑음이라고 표시된 기상 정보를 선혜에게 보여주었다. 밝고 애교스러운 모습에 웃음이 샜다.

“당일치기로 안 다녀오고 호텔 잡아서 하룻밤 자고 오는 거 어때요?”

“좋죠.”

“오케이. 예약합니다.”

수호만큼이나 신났네.

들뜬 그를 기분 좋게 바라보는데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선혜는 자연스럽게 말을 아꼈다. 아무리 회사 사람들이 태준과 자신의 관계를 안다고 해도 대놓고 연애질을 한다더라, 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런 선혜의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태준도 별말이 없었다.

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간 태준과 선혜는 벽면에 바짝 붙어 서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서로를 의식하며 구석으로 멀어지지 않는 두 사람.

태준이 사람들 몰래 손을 슬며시 잡아왔다. 선혜는 말없이 그 손을 힘주어 잡았다. 웃음기 섞인 시선이 둘 사이를 오고 갔다.

“오늘도 파이팅 해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내리기 직전. 태준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주먹을 쥐어보였다. 선혜도 수줍게 주먹을 쥐어서 들어보인다.

고작 그뿐인데도 태준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하자 그제야 재빨리 나간다. 선혜도 뒤늦게 그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선혜가 사무실에 도착한 걸 선두로 팀원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지민은 출근하자마자 제 발 저린 표정으로 선혜를 보다가 새침하게 자신의 자리로 갔다.

민영은 눈을 굴리다가 이내 산뜻하게 먼저 인사를 해 왔고.

희재는 여상한 모습으로 시니컬하게.

그리고 기주는.

“큼, 큼큼, 크흠!”

전에 없이 헛기침을 우르르 쏟아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한편. 경애의 국밥집.

“뭐?”

석주가 출근하자마자 한 선언에 경애는 기가 막힌 얼굴을 하고 석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반문하는 경애에게 석주가 차분한 어조로 다시금 말해주었다.

“일주일만 휴가 좀 달라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이나 휴가를 달란다. 그것도 당일 날 갑자기. 이렇게나 뻔뻔하게.

“휴가? 휴가는 갑자기 왜.”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병원에 좀 가 보려고.”

머릿속에 근래 들어 기침이 잦아진 석주가 떠오르자 경애의 표정이 잠시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의아해진다.

기침 조금 한다고 해서 일주일이나 쉰다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쉬겠다는 사람 억지로 일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빤히 석주의 얼굴을 쳐다보던 경애는 자기도 모르게 석주의 안색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휙 시선을 돌려버린 경애가 짧게 대꾸했다.

“일주일 치 급여는 알아서 뺄 거야.”

“응. 고마워.”

그렇게 말한 석주는 이내 몸을 돌려 가게를 나섰다. 경애는 딸랑이는 풍경의 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들었다. 통유리 창 너머로 멀어지는 석주의 모습이 보인다. 자기도 모르게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응시하고 있는 때였다.

“걱정되세요? 아프다고 하니까?”

불쑥 춘희의 목소리가 끼어들어 경애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걱정은 누가?”

경애는 자기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런 경애를 바라보는 춘희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경애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춘희를 등지고 돌아섰다. 괜히 깨끗한 테이블을 행주로 닦아내는 중.

그러다 빤히 쳐다보는 춘희의 시선이 느껴져 행주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오픈 준비 안 할 거야?”

“예, 예. 해야죠, 오픈 준비.”

거드름을 피우는 춘희를 노려본 뒤 경애는 다시 행주를 들었다.

벅벅 테이블을 닦다가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경애가 멈칫했다.

일주일치 급여를 빼면, 이번 달 급여가 백 만원이 채 되지를 않는데.

그걸 머리가 빠삭한 석주도 모를 리가 없을 터.

돈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도 그렇고, 갑작스러운 휴가도 그렇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야.’

석주가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보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그 꿍꿍이속을 모르겠다.

*

카페가 한산한 틈을 타서 매니저는 고은에게 라떼 아트를 알려주고 있었다.

“옳지, 잘하네.”

눈앞의 결과물을 보자 칭찬이 저절로 나왔다.

고은은 라떼 아트에 소질이 있었다. 몇 번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벌써 능숙하게 우유 거품으로 이것저것 척척 그려낸다. 그것도 꽤 섬세하고 감각 있게 말이다.

머그잔 위에 그려진 나뭇잎을 보던 매니저가 감탄을 쏟아냈다.

“디자인 전공했다더니, 역시 전공자는 다르네?”

“아니에요.”

고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그려낸 라떼 아트를 보고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고은을 가만히 바라보던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고은 씨, 내가 봤을 때 고은씨 이쪽으로 재능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잠깐 생각에 잠긴 그녀가 고은에게 제안했다.

“우리 본사에 이력서 넣는 거 어때?”

“이력서요?”

“응. 내가 추천서 써 주면 좀 유리하긴 할 거거든.”

고은이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매니저가 말했다.

“우리 회사 일하기 제법 괜찮아. 월급도 생각보다 두둑하고 복지도 좋고. 고은 씨는 카페 아르바이트 경력도 많아서 카페에서 일하기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선뜻 대답하지 않는 고은의 어깨를 매니저가 툭 쳤다.

“잘 고민해 봐. 요즘 같은 취업난에 이런 기회, 흔치 않으니까.”

“네.”

대답을 마친 고은은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매니저의 말마따나 취업난이 극심한 요즘이다. 그 증거가 바로 자신이었다. 미술로 유명한 대학교를 졸업했어도 서류부터 탈락되는 자신.

생각해 보면 디자인이 적성도 아니었다. 디자인 쪽으로 진로를 정한 이유는 선혜 때문이었다.

가서 선혜를 눌러주고 싶었는데 실력으로 되지 않아 교활한 방법을 이용해 선혜를 사람들 사이에서 고립시키기 밖에 못 했다. 물론 성공하여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졸업한 선혜였지만.

‘내가 여기 입사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너를 또 따돌릴 수 있었을 텐데.

고은은 탁월한 호사가였다. 선혜의 꼬투리를 잡아 그거와 관련된 악소문을 퍼트리는 게 취미였다.

그와 동시에 나쁜 의붓언니로 인해 피해를 보는 가여운 동생으로 자리매김하여, 그동안 사람들의 동정표를 사곤 했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인맥은 오래 가지 못해 지금은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지만 말이다.

‘뭐, 거기에 대한 아쉬움은 딱히 없지만.’

옆에 있는 이 매니저는 좀 오래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구 기질이 다분한 게 이용해 먹기가 딱…….

“저기요.”

매니저를 보고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갑지 않은 목소리. 선혜였다. 또 커피 심부름을 하러 온 모양이었다.

이젠 선혜를 봐도 들끓는 속과는 달리 표정 관리가 되었다. 옆에 있는 매니저를 의식해서 조금 움츠러든 연기도 보탰다.

“아, 죄송합니다. 주문하시겠어요?”

“네.”

선혜는 짧게 대답하고는 쪽지를 내밀었다. 쪽지에는 팀원들의 주문 내역이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고은은 주문을 받고 매니저와 함께 음료를 빠르게 만들어서 건넸다.

멀어지는 선혜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고은이 매니저에게 물었다.

“매니저님. 정직원 되면 저 여기서 일은 못 하는 거죠? 매니저님이 계시니까.”

“그렇지? 그럼 저 진상 의붓언니 안 봐도 돼서 좋겠네, 고은 씨는.”

고은은 잠깐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매니저님. 저 카페 입사 시험 준비할게요.”

“어머, 정말? 그래. 생각 잘했어!”

반색하는 매니저를 보며 고은이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멀어지는 선혜의 뒷모습에 시선을 두었다.

아쉬웠다.

‘떠나기 전에 윤선혜 엿 먹일 빌미가 좀 생겼으면 좋겠는데.’

떠나기 전에 작은 꼬투리라도 잡혀준다면.

뭐든 잡히기만 하면 소문 퍼트리는 거야 일도 아닐 테니.

고은은 지민을 떠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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