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
그림자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허둥댄다.
허술하기가 이를 데 없다고 생각하는데 콜록, 터져 나오는 기침 소리가 귀에 익었다.
설마.
경애는 차체를 돌아 그림자의 주인공 앞에 섰다.
“콜록, 콜록!”
“너…….”
경애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눈 앞에 있는 석주를 쳐다보았다.
쉬라고 했더니 여기서 대체 뭐 하고 있는 건지. 갑자기 쏟아져나오는 기침 탓인지 석주는 도망칠 기회 조차 놓친 것 같았다.
석주의 기침이 가라앉았을 무렵, 경애가 물었다.
“너 왜 나 쫓아다녀?”
“쫓아다닌 거 아냐.”
“그럼 뭔데?”
“늦었는데 걱정이 돼서. 위험하잖아.”
석주가 낮게 읊조렸다. 경애는 하, 하고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경애는 말없이 돌아섰다.
“경애 누나.”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석주의 목소리에 붙들리고 말았다.
“내가 집에 데려다 주면 안 될까? 늦었는데 걱정이 돼서 그래.”
간절한 호소에 마음이 약해질 뻔했지만 잠시뿐.
“됐거든?”
경애는 날카롭게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성큼성큼 멀어졌다. 혹시나 쫓아올까 싶어 뒤를 홱 돌아보면 쫓아오려다가 제자리에 우뚝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석주가 있다.
어둔 밤. 초라한 골목길만큼이나 초라한 몰골로 서 있는 석주가 신경이 쓰인다. 밤공기가 제법 서늘한데 왜 저렇게 옷은 또 얇은 건지.
‘누굴 걱정하는 거야 대체.’
경애는 고개를 털어내며 다시 몸을 돌려 성큼성큼 멀어졌다.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누군지 알기에 더는 돌아보지 않았다.
혹여라도 집까지 쫓아올까 싶어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돌아보았다. 그러자 멀찍이에 떨어져 서 있는 석주가 보였다. 경애가 빤히 바라보자 천천히 돌아선다. 경애는 그제야 자신의 집으로 후딱 들어갔다.
대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안으로 들어간 경애는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냉수가 심란한 속을 달래주기를 바랐건만, 밖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가 귀를 통해 속을 어지럽힌다.
그때 느닷없이 걸려오는 석주의 전화. 경애는 서슴없이 거절 버튼을 누르고는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냉수를 한 컵 더 먹었다. 또 한 컵 더. 늦은 새벽. 어지러운 속을 잠재우고자 물을 벌컥이는 소리가 풀벌레 소리 사이로 섞여갔다.
*
경애가 집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석주는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다가 애써 앞으로 고개를 돌려 걸어간다.
그러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요즘은 안 보이네.’
경애 주위에 서성거리던 검은 그림자는 이제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는데 별안간 기침이 터져나왔다.
가게 근처에 머물며 찬 바람을 쐬었기 때문인지 오늘따라 기침이 심해졌다. 또다시 피가 손바닥에 묻어 나온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석주는 누가 볼세라 주머니에 넣어둔 손수건으로 얼른 손바닥을 닦아냈다.
그러다 통증이 엄습하여 근처에 있는 담벼락에 잠시 몸을 기대었다. 늘 지니고 다니는 작은 진통제를 혀 밑으로 밀어 넣었다. 서서히 통증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어가는 때였다.
시야각의 가장자리에 작은 움직임이 포착되어 석주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반대편 골목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그림자를 보고 담벼락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놈이다.
멈춰 서서 경애의 차를 지그시 바라보고, 또 경애에게 접근하여 말을 걸었던 그놈.
석주는 경애의 집으로 향하는 남자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척을 느낀 남자가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마스크와 모자 사이, 석주를 보는 눈이 휘둥그렇게 떠진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줄행랑을 친다.
“저기요! 이봐! 거기 서!”
석주는 정신없이 내달리며 남자를 쫓았다.
행인이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골목이 느닷없이 벌어진 추격전으로 다소 소란해졌다.
다시금 가슴 통증이 엄습하고 숨이 급격하게 가빠졌지만 석주는 멈추지 않았다.
잡아야 해.
잡아서, 잡아서…….
“헉, 헉…….”
하지만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결국 느려지다 멈춰 서는 발걸음. 턱 끝까지 차오른 숨과 물이 되어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그래도 잡아 보겠다고 한 걸음 더 내디디려는 때였다.
뛰어가는 남자의 모자가 휙 젖혀지더니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황한 남자가 순간적으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 순간, 가로등 불 아래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짧디짧은 찰나에 석주와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석주의 눈이 부릅 떠졌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왠지 모르게 낯익은 그 얼굴을 석주는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석주가 남자를 완전히 알아보기 전 남자는 모자를 포기하고 다시 몸을 돌려 도망쳐버렸다. 뒤늦게 석주가 달려가려 했지만 다시금 터져 나오는 기침과 좋지 않은 몸 상태가 발목을 잡는다.
기침이 가라앉았을 무렵, 석주는 천천히 숙였던 허리를 들어올렸다.
희미한 가로등 불이 비치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차츰 선명해진 기억을 통해 떠오르는 사람은 한 사람.
하지만 긴가민가 싶다. 덥수룩한 머리와 마스크로 얼굴이 가려져 있어 본 건 눈뿐이라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가 맞다면, 왜?
선혜가 아니라, 왜 경애인 거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얽혀간다.
혼란으로 석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
기회가 왔는데도 잡지 못했음에 자괴감에 제 머리를 헝클이던 석주는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퍼뜩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경애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애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석주는 걱정되는 마음에 밤새 경애의 집 근처를 지키고 서 있었다.
*
다음 날.
태준은 가회동 본가에서 생일상을 대접 받았다. 한우를 넣고 끓인 미역국과 열 개나 되는 반찬들이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져 있었다.
식사를 하고 나서는 태석과 회사 이야기로 대화 주제가 이어졌는데, 형수인 지현이 재미없는 이야기는 둘만 하라며 서재로 쫓아냈다. 그래서 지금 둘이 마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막상 서재로 오니 회사 얘기는 하지 않는 두 사람이다.
“형.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뭔데?”
“형수님한테 프러포즈 할 때 뭐라고 하면서 프러포즈 했어?”
태석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태준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너 프러포즈 아직도 안 했냐?”
“응.”
태석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야. 상견례까지 다 하고 날 잡는데 아직도 안 했다고?”
“누군 안 하고 싶어서 안 한 줄 알아? 마음 같아서는 수호 내 아들인 거 알자마자 하고 싶었다고.”
“근데 왜 못 했는데?”
태준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수호가 자신을 거부했던 것부터 시작해서, 아이의 마음을 겨우 열고, 안정을 되찾나 싶은 순간 태연에게 들키고, 부모님께 말씀드리기까지의 일들을.
태석은 태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웃어댔다. 세상 재밌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다음 주 놀이동산 갔을 때 할 예정이라고?”
“응. 근데, 뭐라고 하면서 해야 할지 모르겠어.”
“흐음.”
태석은 턱을 가만히 쓸면서 생각에 잠겼다.
오래 전 지현에게 프러포즈 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사랑한다고 평생을 함께하자는 멋없는 고백에도 눈물을 쏟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던 지현이 떠오르자 슬며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울어도 예뻤던, 나의 아내.
“형?”
“아, 미안.”
태준이 부르는 소리에 태석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별거 없어. 괜히 멋있게 하려다가 탈만 난다. 그냥 네 진심을 전하면 돼.”
“진심이라…….”
내 진심.
머릿속으로 하고픈 말을 하나둘 정리하는 와중이었다.
무언갈 깨달았는지 태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라, 그러고 보니…….’
선혜에게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사랑한다는 말을.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왜 그래, 너?”
갑자기 태준의 얼굴이 바보 같아지자 태석이 물었다.
“아, 아냐, 아무것도.”
태준은 헛기침을 하다 사레까지 걸리고 말았다.
태석이 건네준 잔에 든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나서야 기침이 겨우 가라앉았다.
태준을 보며 피식거리던 태석이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말했다.
“참, 조만간 레어미디어 한번 갈 것 같은데. 가면 제수씨랑 셋이서 밥이나 먹자.”
“알겠어.”
“아, 그리고.”
말을 잇던 태석이 별안간 입을 다문다. 의아하여 쳐다보는데 태석이 눈을 살짝 굴리더니 싱긋거렸다.
“아냐, 아무것도.”
“뭐야. 뭔데 그래?”
“아니라니까. 말이 헛나간 거야. 슬슬 내려갈까? 둘이서 할 얘기도 다 끝난 것 같은데.”
태준은 태석이 하려던 말이 궁금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돌아서서 문을 나가는 태준의 뒷모습을 보며 태석은 생각에 잠겼다.
‘수호 사진은 어떡한다.’
계속 가지고 있기엔 뭐하고. 주자니 몰래 찍은 사진이라 출처를 묻는다면 이전에 선혜의 뒷조사를 한 걸 이실직고 해야 했다. 이를 태준이 알면 난리가 날 게 분명할 터.
‘흠…….’
일단 가지고 있어 볼까.
‘어떻게든 되겠지, 뭐.’
그 사진이 후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생각지도 못하고, 태석은 태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같은 시각.
선혜는 경애의 국밥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저녁때 태준에게 생일상을 차려주고 싶은데 태준이 좋아하는 경애의 반찬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석주를 마주하는 게 탐탁지 않았지만 바쁜 엄마에게 오라 가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경애의 국밥집 간판이 가까워졌다. 근처에 차를 세우고 선혜는 수호의 손을 잡고 국밥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우리 수호 왔네!”
늦은 점심 식사를 하고 있던 춘희가 반색하며 달려 나왔다. 선혜는 춘희에게 인사를 건네고, 반사적으로 눈을 굴려 석주를 찾았지만 다행히도 석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 나 화장실.”
“그래.”
수호를 화장실에 혼자 보내고 선혜는 경애를 찾았다.
“엄마는요?”
“여깄다.”
타이밍 좋게 경애가 부엌에서 보따리를 한 아름 챙겨 나왔다.
“뭘 이렇게 많이 챙겼어.”
“사위 생일이라는데 장모가 모른 척할 수가 있나. 이걸로 생일상 푸짐하게 챙겨 줘. 축하한다고 인사 좀 전해주고.”
“알았어.”
“근데 수호는? 같이 온 거 아냐?”
“화장실 갔어.”
대답한 선혜가 화장실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런데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 끝에서 수호가 석주와 마주 보고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없는 줄 알았는데 잠깐 화장실 가셨던 거구나. 착잡한 얼굴로 석주를 보고 있는데 석주가 수호와 눈높이를 맞추어 앉았다.
수호에게 무어라 무어라 말을 거는 석주의 모습에 선혜가 미간을 찡그리며 다가갔다. 잘 들리지 않던 대화 소리가 점차 선명해졌다.
“……할아버지 말 잘 들어야 돼? 알았지?”
할아버지?
너무나 태연하게 스스로를 그렇게 지칭하는 모습에 탁 소리를 내며 걸음이 멈추었다. 석주가 선혜를 천천히 돌아본다.
당황하거나 말없이 옆을 지나갈 줄 알았는데 석주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선혜 앞에 섰다.
그러더니만.
“너는 왜 어린 애를 혼자 화장실에 보내. 위험하게.”
어제처럼 잔소리를 시작한다.
“애 두고 한눈팔지 좀 마. 일이라는 게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지는 거라고.”
꽤 일리 있는 잔소리여서 말문이 막히는데 석주가 못마땅한 눈으로 선혜를 보다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선혜는 어이없는 얼굴로 석주의 뒤를 응시했다. 그러는 동안 수호가 타박타박 걸어와 선혜 앞에 섰다. 고개를 돌려 수호를 바라본 선혜가 물었다.
“방금 너한테 뭐라고 하신 거야?”
수호가 선선히 대답했다.
“낯선 아저씨가 맛있는 거 사 달라고 하면 절대 따라가지 말라고.”
선혜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왜 애한테 이런 잔소리를 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석주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석주가 사라진 복도 끝을 선혜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낯설기만 한 석주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묘한 위화감.
잔소리라고는 입에 달지도 않던 사람이 요즘 들어 갑자기 왜 그러는 걸까.
그때는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아무것도 몰랐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게 후회가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