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81화 (81/109)

#81. 서서히 드러나는

다음 날 아침.

눈을 감은 채로 이리 뒤척이던 선혜는 몰려오는  갈증에 비로소 눈을 떴다.

숙취 탓에 머릿속이 흐릿하여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어딘지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여긴.’

태준의 오피스텔. 그의 침실이다.

선혜는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이불이 스륵 내려가며 차림새가 드러났다. 그의 맨투맨 티가 잠옷처럼 입혀져 있었다. 대신 하의는 실종된 상태. 선혜는 휑하니 드러난 맨다리에 놀라 이불을 도로 휙 덮었다.

어제 태준이 취한 자신을 데려와 옷을 갈아입힌 모양이었다. 그에게 괜한 고생을 시켰다는 생각과 더불어 잠든 제 옷을 갈아입혔을 그의 모습이 생각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헛기침을 하다가 퍼뜩 수호 생각이 났다.

자신이 여기서 잤다면 수호는?

연락이라도 해 봐야겠다 싶어 핸드폰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수호가 문틈 새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깨어 있는 선혜와 수호의 맑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엄마. 일어났어?”

수호를 보고 눈을 깜박이는데 문틈이 더 벌어지고 태준도 고개를 빼꼼히 들이밀었다.

“일어났어요?”

“어…… 네.”

민망한 얼굴로 느리게 대답하자 태준이 활짝 웃었다.

“얼른 나와요. 해장국 끓여 놨으니까.”

태준이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수호가 얼른 오라고 손짓한 뒤 멀어진다.

선혜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맨투맨을 끌어내리면서 문가로 향하다 문득 제 몸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혹시나 술 냄새가 나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술 냄새가 나기는커녕 태준 특유의 체취와 섬유유연제 향이 섞여 향기롭기만 했다.

안심하다 문득 떠오른 의문.

어제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화장실 앞에서 석주와 말다툼을 하고 돌아온 뒤로는 기억이 흐릿했다.

‘나, 뭐 실수한 건 없겠지.’

기주야 잔뜩 취했다 치더라도 멀쩡했던 희재가 마음에 걸렸다.

연락이라도 해 봐야 하나.

“엄마. 안 나오고 뭐 해?”

생각에 잠긴 채 멈춰 서 있던 선혜는 들려오는 수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응. 나갈게.”

.

.

.

태준이 끓여놓은 콩나물국을 정신없이 먹고 있던 선혜는.

“맞다. 어제 손 실장님이 우리 수호 봤어요.”

태준이 한 말에 하마터면 콩나물이 목에 걸릴 뻔했다. 놀라 쳐다보는 선혜에게 태준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눈치가 엄청 빠르시던데. 수호 보자마자 내 아들 아니냐고…….”

“콜록!”

기어코 콩나물이 목에 걸렸다. 기침하는 선혜에게 태준이 물이 담긴 컵을 건네주었다. 찬물을 몇 모금 들이켜자 기침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태준이 서둘러 덧붙였다.

“다른 사람한테는 말씀 안 하신다고 하시더라고요. 남 얘기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신다나.”

선혜는 그 말의 진정성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희재가 확실히 지민과 민영보다는 입이 무거운 편이었지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하는 선혜로서는 그녀의 행동을 종잡을 수 없었다. 따라서 안심하기는 어려웠다.

“어제 회식 때 별일은 없었어요?”

태준이 가라앉은 선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선혜의 머릿속에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이 차례로 생각이 났다.

‘하여간 너는 날 너무 많이 닮았어.’

석주의 목소리가 다시금 생생하게 살아나자 속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국밥이 더는 넘어가지 않았다.

“선혜 씨?”

잠시 고민하던 선혜가 고개 들어 태준을 보았다. 맑고 투명한 다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가 물었다.

“태준 씨. 나, 우리 아빠 닮았어요?”

순간 태준의 눈이 흔들렸다. 입술이 버벅댄다. 그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닮았구나.”

“어, 그게. 아니에요. 많이 닮지는 않았고 조금, 아주 조금…….”

“어떤 점이 닮았는데요?”

태준이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그,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분위기, 라니. 뭘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선혜는 말없이 국밥을 넘겼다. 태준은 그런 선혜 앞에 앉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애교 부리듯 손을 내밀어 선혜의 손을 잡고 흔든다. 선혜는 그런 태준을 보고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종내에는 웃음 끝이 쓰게 물든다.

격렬히 부정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어떤 부분이 닮았는지. 태준이 말하는 ‘분위기’라는 게 어떤 건지도.

입 밖으로 긴 한숨이 새려 했지만, 앞에 있는 태준을 의식하여 선혜는 겨우 속으로 삼켜냈다.

*

설거지는 선혜의 몫이었다. 태준이 절대 하지 말라고 성화였지만 고집을 부리는 중이다. 선혜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태준과 수호는 벽 앞에 서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설거지를 끝마치고 나온 선혜는 행주로 손의 물기를 닦으며 두 사람이 있는 곳을 기웃거렸다. 뭘 보고 있나 했는데 둘은 벽에 걸린 달력을 보고 있었다.

내일 날짜에 커다랗게 빨간색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보자마자 생각이 났다.

“엄마. 내일 아빠 생일이래!”

그와 동시에 수호가 선혜를 돌아보며 외쳤다. 선혜는 당황한 낯빛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엄마 알고 있었어?”

알고 있긴 했는데 요 며칠은 잊고 말았다. 갑자기 엄마 가게에 찾아온 아버지 때문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태준을 바라보는데 수호가 태준을 향해 물었다.

“아빠, 생일 선물 뭐 받고 싶어요?”

수호는 마치 자신의 생일처럼 들뜬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기특한지 태준이 수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입을 열었다.

“아빠는 수호랑 엄마만 있으면 되는데.”

“에이. 그래도.”

“진짠데?”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선혜가 물었다.

“내일 혹시 약속 있어요?”

“아, 가회동 본가에 가요. 가족들이랑 점심 먹으러.”

점심이라. 그러면 자신과 수호는 저녁 시간대를 공략하면 되겠다 싶었다.

선물은 뭘 사야 하지. 식사는?

고민하며 달력을 바라보는데 오늘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10월 12일.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그 날짜를 길게 쳐다보았다. 낯익은 느낌에 사로잡힌 채로 말이다.

*

선혜는 태준의 집에서 나와 수호와 함께 근처 백화점으로 향했다.

태준의 생일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엄마. 아빠 선물 뭐 사게?”

“글쎄.”

하지만 막상 백화점까지 왔는데도 뭘 사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널따란 홀을 두리번거리며 머릿속으로 선물로 사 줄 만한 물건들을 나열해 보았지만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 망설이기만 하다가는 시간만 낭비할 것 같았다. 선혜는 눈에 보이는 시계 매장 하나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어머?”

그런데 직원이 인사를 하다 말고 아는 체를 했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데 직원이 반가운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때 그 교복 입었던 아가씨 아닌가?”

교복?

“왜 그때 상품권 잔뜩 들고 와서 시계 하나 달라고 했었잖아요. 아빠 선물해 드린다고.”

직원의 말에 옛 기억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하도 예뻐서 기억에 남았는데. 벌써 결혼해서 애까지 낳았나 봐요?”

선혜의 표정이 좋지 않자 직원이 아차 싶은 얼굴로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아, 미안해요. 나이 드니까 주책만 느네. 시계 보러 왔어요? 어떤 종류로…….”

직원의 말이 점점 흐려지더니 잘 들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과거의 기억. 기억 속 선혜는 교복을 입고 백화점의 시계 매장에 서 있었다. 손에는 백화점 상품권을 한 다발 든 채로. 시에서 주최하는 미술 대회에서 탄 상금이었다.

시기적절하게 아버지인 석주의 생일이어서 백화점을 찾았었다.

사춘기의 변덕이라도 되는지 그날 딸 아버지의 생일 선물을 사고 싶었다.

백화점에 홀로 와서 어리둥절하게 서 있다가 직원의 추천으로 가격대에 맞는 시계 하나를 샀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건네었었지.

하지만 석주는 선혜가 준 생일 선물을 받고 눈을 크게 뜨고 굳어 있었다. 당황한 그 모습은 기쁨이나 감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흔들리는 눈으로 길게 선혜를 바라보다가 짧게 한마디 할 뿐이었다.

‘고맙다.’

그리고 석주는 선혜가 선물한 그 시계를 단 한 번도 차지 않았다.

그 사실에 마음 상한 선혜도 그 이후로는 아버지에게 생일 선물을 드린 적이 없었다.

옛 기억을 되짚어보던 선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손님?”

“다른 데 둘러보고 다시 올게요.”

선혜는 예의 바르게 말하고는 수호의 손을 잡고 매장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생신도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언제였더라.

흐린 기억 속 날짜를 더듬어 가던 선혜는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말았다.

태준의 생일인 내일은 10월 13일.

그 전날인 오늘, 10월 12일은.

“…….”

아버지 석주의 생일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선혜의 눈이 가늘게 떨려왔다.

*

열두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경애와 춘희는 가게 일을 마무리 짓고 셔터를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잔뜩 지친 얼굴이었다.

석주가 있을 때는 도움이 되는지도 몰랐는데 막상 없으니까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아니, 갑자기 그 아저씨 휴무는 왜 주셨어요?”

뻐근한 팔을 주무르던 춘희가 옆에 서 있는 경애에게 물었다.

석주가 출근하자마자 경애는 석주에게 휴가를 주겠다며 곧장 돌려보냈다. 안 간다며 고집을 부리던 석주는 뭔가를 눈치챘는지 어느 순간 순순히 도로 집으로 돌아갔고.

“그냥.”

“그냥?”

“그래. 그냥.”

춘희는 더 캐물으려다가 심상치 않은 경애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경애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멀리 시선을 던지다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열두 시가 넘어 하루가 지나 있었다.

10월 12일이 끝난 것이다.

잊고 살았던 것이 무색하게 석주의 얼굴을 보자마자 생각이 났다. 오늘이 석주의 생일이라는 걸.

그리고 그날의 기억도 떠오르고 말았다.

당시에는 아름다운 추억이었지만 다 지난 지금에서는 씁쓸하기만 한 기억들.

낡은 양은 냄비에서 끓던 소고기 한 점 없는 초라한 미역국. 그런데도 그 미역국을 맛있게 먹어주던 석주. 늘 춥고 쓸쓸하기만 했던 단칸방은 두 사람의 온기로 따듯하게 데워졌고 이내 뜨겁게 달아오르기까지 했었다.

그날 일을 후회하지 못함은, 그날 일로 하여금 선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경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가라앉기 때문인지 몸도 가라앉는 느낌.

걱정스럽게 경애를 바라보던 춘희가 물었다.

“오늘도 걸어가세요?”

“그래야지.”

“아니, 도대체 뭔 차 수리가 그렇게 오래 걸린대요?”

며칠 전 고장이 나서 카센터에 맡긴 경애의 차는 수리가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있었다. 워낙 오래된 차종이라 모자란 부품이 많다는 게 그 이유였다.

카센터 직원도 새 차를 한 대 뽑을 것을 권했지만 경애는 그래도 고쳐 쓰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다. 다 낡은 양말도 기워 신는 생활력에 차를 쉽게 바꿀 리가 없었다.

“그냥 택시 타고 가시지.”

“됐어. 걸어가면 금방이야.”

“그래도. 위험하잖아요.”

“위험하긴. 그 동네 가로등 하나 없을 때도 잘만 다녔는데. 걱정 마.”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경애의 태도에 춘희는 더 설득하려던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너나.”

춘희와 짧게 인사를 마친 경애는 집으로 향했다.

늦은 새벽녘이라 부랑하는 술 취한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경애는 집으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그러다 별안간 느껴지는 시선에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술 취한 사람들 외에 수상한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기분 탓인가.’

경애는 다시 몸을 돌려 괜히 옷 앞섶을 여미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큰길을 벗어나자 길이 좁아지며 차츰 인적이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새벽 특유의 스산한 공기가 귓가를 스치는 가운데, 골목 어귀에 들어선 경애는 뒤편에서 제 발걸음과 맞추어 쫓아오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기 시작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손에 꼭 쥔 핸드폰은 배터리가 방전되어 힘없이 꺼져버리고 말았다.

경애는 긴장으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곁눈질로 뒤를 흘끔거리다가,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예민해진 귓가에 사사삭, 누가 숨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애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인적 없는 골목길. 커다란 트럭 옆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숨소리와 기척은 숨길지언정 달빛에 길어진 그림자까지는 숨기지 못한 것이다.

경애는 그 그림자를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대로 뛰어 집으로 갈까 싶었지만 아직은 거리가 너무 멀었다. 무엇보다도 집이 노출되면 위험했다.

‘그냥 부딪혀 버려?’

이러나저러나 위험하다면 한번 부딪혀보자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경애는 두 팔을 둥둥 걷어붙이고 천천히 그림자를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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