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잔소리
승진을 운운하는 걸 보니 자신의 이야기였다. 나갈 타이밍을 놓쳐 문고리를 잡고 서 있는 사이, 문 너머에서는 지민의 씨근덕거림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입사한 지 이 년 만에 겨우 주임 달았는데.”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잖아. 남자 잘 만난 덕이지, 뭐.”
평소에 들어본 적 없는 민영의 비아냥도 들려왔다. 놀라면서도 축하한다고 말하던 방금 전의 모습이 오버랩 되자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사회생활 오래 한 짬이 이런 데서 발휘되나. 가식이 아주 수준급이었다.
“하여간 저런 사람이 제일 싫어요. 자기 능력 말고 다른 부수적인 걸로 이득 보는 사람들. 진짜 제일 별로야.”
“우리나라는 예쁘면 혜택이 너무 많다니까. 오죽하면 여자가 예쁘면 고시 3관왕과 같다는 말이 나오겠어.”
“치. 솔직히 윤선혜 씨 예쁜 것도 아니에요. 가만 보면 은근 비대칭이야.”
하마터면 실소가 터질 뻔했다. 나도 몰랐던 사실을 일깨워 주다니. 참 고맙다, 얘.
“아니, 근데 애 엄마가 어떻게 총각을 만나지? 나 진짜 이해가 안 돼.”
“뻔하지, 뭐.”
“뭐가 뻔한데요?”
“예쁜 여자가 벗고 달려들어 봐라. 누가 맘 안 약해지나.”
선혜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와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존경스럽네요.”
말도 안 되는 말을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말에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당장 문고리를 돌려 나가고 싶었지만 선혜는 그러지 못했다.
‘참자.’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야. 저런 거에 하나하나 대응해 봐서 알잖아. 나서 봤자 더 일을 키우는 꼴이다.
선혜는 심호흡을 하며 지민과 민영이 나가기를 기다렸다.
다행히도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고 둘은 번갈아 가며 옆 칸에서 볼일을 보더니 곧 손을 씻고 나갔다. 나가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는 때였다.
“저기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선혜는 문고리를 잡아 밀다 멈칫했다.
이 목소리는, 아버지 석주의 목소리.
“우리 선혜, 그런 애 아닙니다.”
“네?”
당황한 지민의 목소리 또한 들려왔다.
“자기 능력 말고 다른 부수적인 걸로 승진하려고 요령 피우는 애도 아니고, 얼굴도 비대칭이 아니라 대칭이고.”
잠깐 사이를 두고 그가 다시 말했다.
“남자한테 벗고 달려드는 그런 몰상식한 애도 아니에요.”
“그, 누구신데…….”
민영이 더듬거리며 묻는 말에 석주가 대답했다.
“선혜 애비 되는 사람입니다.”
싸늘한 침묵 속. 누군가가 마른 침을 꿀꺽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닫힌 문을 바라보는 시선이 가늘게 떨려오고 있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살아보니까 인과응보에 자업자득이 괜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그러니까.”
씁쓸한 말 뒤로 단단한 말이 따라붙었다.
“남에 대한 험담도 적당히들 하시죠. 더 크게 돌아오기 전에.”
다시금 찾아온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곧 두 여자의 구두 소리가 당황을 머금고 빠르게 멀어졌다.
석주의 무거운 한숨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 한숨이 끝나고 난 뒤에 선혜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
화장실 입구 쪽에 서 있는 석주와 눈이 마주쳤다. 지친 얼굴로 벽에 기대어 있던 석주는 선혜를 보고 놀란 얼굴로 몸을 반듯이 세웠다. 선혜는 무심한 눈으로 석주를 바라보다가 곧 외면하고는 손을 씻었다.
“다음에는 나서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돌아서려던 석주의 걸음은 선혜의 말에 우뚝 멈추고 말았다. 선혜를 바라보는 석주의 얼굴이 비딱하게 구겨져 있었다.
“안에서 다 듣고 있기만 했으면서, 뭘 알아서 한다는 거야.”
답지 않은 훈계에 선혜가 수도꼭지를 잠그고 석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런 말, 모른 척하는 게 최선이에요. 나서서 화내거나 해명한다고 저 사람들이 들어줄 것 같아요? 아, 우리가 잘못 알았네요, 미안해요. 라고 사과라도 할 줄 아세요?”
차가운 조소가 얼굴에 어렸다.
“오히려 자극받아서 더 날뛴다고요.”
“그래도 그렇지……!”
“제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하나도 안 고마우니까.”
흔들리는 석주의 눈을 보며 선혜가 또박또박 말했다.
“나서지 마시라고요.”
늘 그랬던 것처럼. 괜히 이렇게 달리 행동해서 사람 심란하게 만들지 말고.
뒷말은 삼킨 선혜가 그대로 석주를 스쳐 지나가는 때였다.
“가끔은 미친 척 부딪치기도 하고 그래.”
석주의 말에 선혜가 비스듬히 그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바보같이 당하고만 살지 말고.”
뼈 있는 충고에 선혜의 얼굴이 꿈틀거리는데 석주가 먼저 선혜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잠깐 서서 선혜를 돌아본다.
씁쓸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하여간 너는 날 너무 많이 닮았어.”
선혜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뭐라고요?”
기가 막힌 선혜가 반문했지만 석주는 답 없이 돌아서 버렸다.
선혜는 황당한 얼굴로 멀어지는 석주의 뒤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뒤늦게 수치심과 모멸감이 밀려들었다.
“누가 누굴 닮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머리칼을 쓸어올린 선혜는 방으로 향했다.
방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짐을 챙겨 허둥지둥 방을 나오던 지민과 민영과 딱 마주쳤다.
화장실 쪽에서 오는 선혜를 보는 두 사람의 눈빛이 흔들린다. 눈빛 속에 당황이 엿보였지만 둘 중 그 누구도 선혜에게 사과를 건네지 않았다. 미안한 기색 또한 없이 짧은 인사말만 남기고 멀어질 뿐이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선혜 씨, 뭐 하다가 이제 오는 거야아!”
기주가 술에 취해 꼬인 혀로 투정을 부렸다. 오늘따라 웬일로 희재가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물잔을 기울이며 선혜의 얼굴을 빤히 보던 그녀가 눈이 마주치자 물잔과 술잔을 차례로 채워주었다.
짠을 했다. 그리고 원샷.
술이 오늘따라 달았다.
취하고 싶은 날이었다.
*
늦은 시각이 되자 손님이 하나둘 빠져나가 가게가 한산해졌다. 테이블 정리를 어느 정도 마친 경애가 지친 몸을 쉬기 위해 테이블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개가 저절로 선혜의 직장 동료들이 있는 방으로 돌아간다.
‘슬슬 끝날 때도 됐는데.’
소주 한 병을 추가로 시킨 게 삼십 분 전. 그 주문을 마지막으로 조용한 방이다.
한번 살펴볼까 싶은 마음에 경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에 다가가 섰다.
미닫이문을 막 열어젖히려던 그때였다. 안쪽에서 먼저 문이 열리고 희재가 나왔다. 손에는 회사 법인용 카드를 쥔 채였다.
“계산하시게요?”
“네. 슬슬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한 희재가 돌아보는 방 안 풍경을 경애도 그제야 보았다.
“지현아…….”
기주는 취해서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선혜도 팔꿈치를 테이블에 받친 채 머리를 손으로 겨우 괴고 있었다. 잔뜩 취한 선혜의 모습을 본 경애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제가 계산해 드릴게요.”
춘희가 나서서 희재를 카운터로 안내하는 동안 경애는 방으로 들어가 선혜를 흔들었다.
“얘, 선혜야.”
부르는 목소리에 선혜가 고개를 들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경애를 물끄러미 보던 선혜의 고개가 다시 푹 꺼졌다.
“엄마, 나 취했어.”
“왜 그렇게 마셨어. 조절 좀 하지. 엄마 가게 아니면 어쩔 뻔했어, 대체.”
“엄마 가게니까 마음껏 마셨지.”
침울한 선혜의 목소리와 술을 조절하지 못한 모습에 경애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너, 무슨 일 있어?”
“그냥…… 다 짜증나…….”
“뭐가 그렇게 짜증나.”
“몰라 다 싫어…… 엄마랑, 수호랑, 태준 씨랑, 춘희 언니가 제일 좋아…… 다 이상해…….”
“얘가 왜 이래.”
“태준 씨랑 수호 보고 싶다…….”
어린 애처럼 투정부리는 선혜를 어이없는 얼굴로 보다가도 경애는 기대오는 선혜에게 제 어깨를 빌려주었다.
경애를 보자 긴장이 풀렸는지 선혜는 스륵 잠이 들었다. 잠든 선혜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던 경애가 핸드폰을 꺼내 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태준은 금방 전화를 받았고 아직 잠들지 않은 수호도 금방 오겠다고 대답했다.
계산을 마친 희재는 기주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주는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고, 희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전에 선혜에게 기주를 맡겨두고 홀랑 가버린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멀쩡한 사람이 저뿐이라 자신이 책임을 지려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혼자서 감당하기엔 기주의 덩치가 제법 커서 난감해 보였다.
“이따가 우리 사위 오면 도움받아요. 혼자 하려고 하지 말고.”
희재가 물었다.
“사위면 혹시 신태준 씨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
“아아.”
어색한 침묵이 깔린 와중 경애가 희재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선혜 회사에서 일 잘하고 있어요?”
희재는 망설임 없이 짧게 대답했다.
“네.”
“그렇구나. 애가 숫기도 없고 그래서 입사한다고 할 때 걱정이 많았었거든요.”
“숫기야, 뭐. 사회생활 하면 자연히 늘어요.”
말투가 퉁명스럽긴 했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다. 추운지 몸을 웅크리는 기주의 몸 위로 자신의 코트를 무심하게 얹어주는 모습에서 정이 느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방문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태준은 바닥에 널브러진 기주를 보고 인상을 찡그리다가 벽에 기대어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희재를 보고는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태준의 등장에 안심한 얼굴로 인사를 받아주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희재는 뒤늦게 태준의 다리 뒤에 서 있는 수호를 발견했다.
“……!”
순간 그녀의 다리가 중심을 잃고 휘청했다.
희재의 반응을 본 태준이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수호에게 인사를 시켰다.
“수호야. 엄마랑 같이 일하시는 분이야. 인사 드려.”
“안녕하세요.”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희재도 수호의 생김새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태준과 똑 닮은 아이였으니까. 다만 믿을 수가 없어 희재의 커다래진 눈동자가 태준과 수호를 계속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향한 건 취해 잠든 선혜였다.
뭔가 깨달은 희재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태준이 뭐 마려운 개처럼 쩔쩔매는데 희재가 말했다.
“신 주임님. 미안한데 한 팀장님 덩치를 제가 혼자 감당하기가 힘들어서요. 좀 도와주실래요?”
“아, 네.”
태준은 곧장 기주를 등에 업어 올렸다. 태준이 기주를 희재의 차 뒤에 태우는 동안 희재는 딱 한 가지만 물었다.
“선혜 씨 아들, 신 주임님 아들이기도 한 것 같은데.”
“네. 맞아요.”
“그렇구나.”
그러고는 끝. 더 캐묻지도 사연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런 희재를 향해 태준이 조심스럽게 말을 열었다.
“저 부탁이 있는데요. 우리 수호 관련해서 다른 사람한테 말은.”
“안 해요.”
희재가 차 문을 탁 닫으며 짧게 말했다.
“남 얘기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
단호한 말에 진심이 느껴졌다. 태준은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곧 대리 기사가 도착했다. 멀어지는 희재의 차를 응시하다가 가게로 향하는데 가게 앞에 서서 멀리 시선을 두고 있는 석주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태준에게 석주도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선혜 데리러 왔나 보죠.”
“네.”
석주가 문득 태준을 길게 쳐다보았다. 시선의 의미를 알수 없어 태준이 긴장하고 서 있는데 석주가 물었다.
“선혜가 니스에서 만난 남자가 그쪽인가 보죠.”
“아…… 네.”
석주가 문득 피식 웃었다. 그러다 뭐가 목에 걸렸는지 콜록 콜록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기침이 꽤 심상치 않아서 태준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데 석주가 얼른 들어가라며 손짓을 했다.
석주를 뒤로한 채 가게에 들어오는데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다시금 돌아보는데 석주가 갈무리 짓는 손 안쪽에 뭔가가 묻어난 게 눈에 꽂히듯 들어왔다.
검붉은 액체 덩어리.
‘저거 피 아냐?’
태준이 굳은 듯이 서 있는 때였다.
“아빠.”
수호가 부르는 소리에 태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빨리 오라고 보채는 수호를 향해 태준이 달려갔다. 취해 늘어진 선혜를 업고 나올 때쯤에는 석주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집에 가는 내내 자꾸만 석주의 모습이 떠올라 심란했다.
의사가 아니기에 증상만 보고 어떤 병인지는 알지 못하나 석주의 몸 상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 몸 상태를 하고 찾아 왔을까.
보아하니 경애나 선혜는 모르는 것 같던데.
아픈 몸을 의탁하러 온 사람이라면 몸 상태를 숨길 리가 없을 터.
‘대체 뭐지.’
“짜증나…….”
깊게 생각에 잠겨 있던 태준은 선혜가 웅얼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뒷좌석에 길게 누워 있는 선혜의 입 밖으로 말이 웅얼웅얼 새어나왔다.
“자기가 뭔데 이제 와서…… 잔소리야…….”
주어가 생략되어 있었지만 누굴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진짜 짜증나…….”
하지만 말로는 짜증난다고 하면서도 선혜의 얼굴은 슬프게 물들어 있었다.
“안 닮았어…… 안 닮았다고…… 나는 달라…… 다르다고…….”
태준은 선혜의 취한 중얼거림을 오래도록 들어주었다.
지금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