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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애 아빠-79화 (79/109)
  • #79. 뒷담화

    경애의 국밥집은 저녁 식사 때를 맞이하여 손님들로 한창 북적거리고 있었다. 가게 밖에는 대기 손님들이 줄을 지어 서 있기도 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기주가 놀란 얼굴로 선혜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가 선혜 씨 어머니네 가게라고?”

    놀란 기주와는 달리 선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여기 완전 유명한 맛집이잖아. 전에 TV에도 나오고, 여의도 쪽엔가 분점도 있지 않아?”

    “네. 맞아요.”

    “와. 대박이다 진짜.”

    기주가 감탄한 얼굴로 가게를 응시했다. 기주를 비롯해 민영도, 하물며 모든 일에 무관심하던 희재도 놀란 얼굴이었다.

    그리고 지민은.

    “…….”

    왜인지 모르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선혜는 지민의 반응에 대해 드는 의문을 털어버리고는 앞장서서 가게 문을 열었다.

    “어서오……! 아이고, 우리 선혜 왔네! 사장님!”

    춘희가 먼저 선혜를 알아보고 경애를 불렀다. 멀지 않은 테이블을 정리 중이던 경애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엄마. 나랑 같이 일하는 디자인팀 팀원분들이셔.”

    “안녕하세요. 선혜 엄마 되는 사람입니다.”

    “히야. 우리 선혜 씨가 누구 닮아서 이렇게 미인인가 했더니, 어머니 닮아서 그런 거였나 보네요.”

    기주가 넉살 좋게 한 말에 경애가 기분 좋게 웃었다.

    “오신다고 얘기 듣고 방 하나 비워 놨어요. 안내해 드릴게요.”

    말을 마친 경애가 곧 선혜와 팀원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선혜는 경애를 따라가면서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아버지인 석주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자기가 온다는 소식에 엄마가 내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는 미닫이문을 열자 보이는 석주의 모습에 맥없이 가라앉았다.

    방 안 테이블에 반찬을 세팅하고 있던 석주는 문이 열리는 기척에 허리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필이면 돌아보는 그 순간에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선혜는 시선을 피했고 때마침 반찬을 다 내려놓은 석주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방을 나섰다.

    석주가 바로 옆을 지나갔지만 선혜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나오려는 한숨을 겨우 삼키며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

    “선혜 씨. 거기서 뭐 해? 얼른 와서 앉아.”

    자리를 잡고 앉은 기주가 손짓하고 나서야 선혜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지민과 마주 보는 자리에 자리를 잡고 말았다. 새침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밥을 먹지도 않았는데 체기가 돌았다. 밥은 됐고 술이나 마셔야 될 모양이었다.

    “어머니. 여기 국밥도 국밥인데 전골도 무지하게 유명하지 않아요?”

    “그럼요. 다 같이 드시기엔 전골이 낫죠.”

    “그러면, 무난하게 순대 전골 중 짜리 두 개 어때?”

    기주의 제안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을 받은 경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애의 시선이 선혜를 향했다. 선혜는 물을 마시고 있어 경애를 보지 못했다. 가라앉아 있는 선혜의 표정을 본 경애는 다소 씁쓸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문을 닫고 나서자마자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시선이 열심히 테이블을 오가는 석주에게 향한다.

    일손이 부족하여 차마 석주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방을 내어준 건 최선의 선택이었다. 선혜의 팀원들을 위한 특별 서비스를 제공함과 동시에 선혜와 석주를 마주치게 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경애는 석주를 향해 다가가 작게 말했다.

    “이제 선혜 있는 방에는 들어가지 마. 홀에만 있어.”

    “알고 있어.”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하는 석주의 표정이 다소 음울했다.

    그 얼굴이 방금 본 선혜의 얼굴과 같았다. 선혜가 들으면 기함할 일이지만 선혜는 자신보다는 석주를 더 닮았다. 아무리 외양이 비슷하다 한들 분위기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다행히도 팀원들은 석주가 선혜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듯싶었다.

    별일 없이 조용히 회식이 마무리되었으면.

    작은 바람이 묻어난 시선이 방의 문가로 향했지만 바쁜 탓에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

    수호는 하원 후 태준의 집에 있었다. 태준이 해준 저녁을 먹은 뒤, 그와 나란히 앉아 컨트롤러를 들고 게임을 하는 중이다. 태준이 수호를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커다란 TV 화면에서는 귀여운 캐릭터 둘이서 격투를 진행 중이었다. 뿅뿅 하는 소리를 내며 정신없이 움직이는 두 캐릭터가 한데 엉켰다가 떨어지고 체력이 각기 다르게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어어, 어!”

    “…….”

    금방이라도 게임 속으로 들어갈 것 같은 태준과는 다르게 수호는 차분하게 게임에 임하고 있었다.

    곧 게임 속에서 한 캐릭터가 KO 당해 쓰러졌다. 태준은 허망한 얼굴로 쓰러진 제 캐릭터를 보다가 수호를 돌아보았다.

    “너 왜 이렇게 잘해?”

    벌써 3연패였다. 심지어 수호는 오늘 처음 하는 게임인데도 말이다.

    “아빠가 못하는 거 같은데요.”

    태준이 발끈했다.

    “아니거든? 내가 어디 가서 게임으로 지던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럼 한 판 더 할까요?”

    “오케이, 좋아.”

    자기보다 더 승부욕에 불타오르는 태준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수호는 다시 게임에 임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수호의 승리.

    패배감에 전 태준은 컨트롤러를 내려놓고 뒤로 벌러덩 드러누워 버리고 말았다. 수호는 그런 태준을 보며 승리감에 도취된 얼굴로 키득거렸다. 웃는 수호를 곁눈질로 바라보던 태준도 못내 웃고 말았다.

    시간을 확인한 태준이 수호를 향해 물었다.

    “이제 슬슬 잘까?”

    수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엄마 기다릴래요.”

    태준이 바닥에 팔을 괴고 머리를 받치며 말했다.

    “엄마 늦으실 텐데.”

    “많이요?”

    “그렇지 않을까?”

    수호의 얼굴이 살짝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엄마에게 연락해 빨리 오라고 조르지는 못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태준의 입가에 다소 아린 표정이 떠올랐다.

    어쩌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 빨리 컸을까. 좀 늦게 커도 괜찮았을 텐데. 투정 부려도 이 아빠가 다 받아 줄 수 있는데.

    “그래도 기다릴래요.”

    수호의 말에 태준이 피식 웃었다.

    “그래. 이따가 연락 오면 아빠랑 같이 엄마 데리러 가자.”

    “응.”

    수호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태준이 기특하다는 얼굴로 수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한다.

    벌써 열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회식은 별 탈 없이 잘 하고 있을까.

    장모님 가게에서 회식을 한단 말에 안심과 걱정이 동시에 들었던 태준이다.

    ‘별일 없겠지.’

    하지만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고민 끝에 태준이 수호에게 물었다.

    “우리 엄마한테 전화 한번 해 볼까?”

    *

    태준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회식은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기주는 적당히 기분 좋게 취해갔고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고양되는 분위기 속에서 선혜는 흐름에 맞추어 적절히 맞장구를 치고 웃기도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2차를 빨리 갔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아무리 석주가 자신이 있는 방에 오가지 않는다고 한들 신경이 쓰였다. 팀원들이 화장실을 오가거나 춘희나 경애가 오갈 때 열리는 문 사이로 석주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 속을 달랜답시고 술을 마셔댔더니 벌써부터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흐려진 눈을 깜박거리며 눈앞의 물잔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때였다.

    “자, 우리 팀에 희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기주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흐뭇한 얼굴로 선혜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불안하여 빤히 기주를 쳐다보고 있는데 기주가 입을 열었다.

    “우리 윤선혜 씨가 조만간 주임으로 승진한다는 소식!”

    “진짜요?”

    “……승진이요?”

    민영과 지민의 반응이 즉각적이다. 다만 반응이 조금씩 달랐다. 민영은 놀란 얼굴이었고 지민은 굳은 얼굴이었다.

    “그래. 이번에 윤선혜 씨 공이 제법 크다고 하더라고. 작가들 사이에서 앤틱이 우리 출판사에서 일한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이야. 선혜 씨 전에 일러스트레이터로 유명했던 거 알지? 선혜 씨한테 외주 맡기고 싶었는데 못 맡겨서 아쉬워하던 작가들이 소식 듣고 투고를 무지하게 해 대는데 거기 유명한 작가들도 몇 있는 모양이야. 대표님이 좋아 죽는다고 하시더라고.”

    이야기를 들은 지민의 얼굴이 볼품없이 일그러졌다. 민영이 그런 지민을 흘끗거리다가 표정 관리를 하라고 옆구리를 찔렀지만 취한 지민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 회식은 선혜 씨의 승진 축하를 위한 자리가 되겠습니다!”

    기주가 잔을 들어 올리자 나머지도 덩달아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선혜의 잔이 비어 있었다. 빈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누군가가 소주병을 들어 올리더니 잔을 채워주었다. 옆에 앉아 있던 희재였다.

    “축하해. 이렇게 빠른 승진은 또 처음 보네.”

    매사에 무심한 희재여서 그런지 그녀의 축하가 더욱 뜻깊게 다가왔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희재를 얼떨떨한 얼굴로 마주하고 있는데 기주가 소리쳤다.

    “자, 승진하는 소감 한마디!”

    일어나라는 손짓에 선혜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망하고 머쓱하여 머리를 자꾸만 쓸어 올리던 선혜가 곧 입을 열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다 열심히 해서 팀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할게요.”

    “좋다, 좋아! 자, 윤선혜 씨, 아니 윤 주임의 승승장구를!”

    지민을 제외한 모든 팀원들이 ‘위하여!’를 외쳐 주었다.

    선혜도 승진으로 인한 기쁜 마음을 원샷으로 표현했다.

    술과 고양된 기분에 취해 있는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문이 열렸다. 경애가 문 너머에 서서 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화면에 ‘신 서방’이라고 쓰여 있는 흰색 글씨가 선명했다.

    “선혜야. 잠깐 전화 좀.”

    선혜는 팀원들의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경애가 핸드폰을 내밀며 말했다.

    “너 전화 안 받는다고 나한테 전화했더라.”

    “아.”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두어서 전화 오는지도 몰랐다. 선혜는 경애에게서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네, 여보세요.”

    - 엄마.

    그런데 의외로 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수호…….”

    꼬인 혀를 다잡으며 수호를 부르려는 찰나였다.

    “와하하하하!”

    느닷없이 터진 근처 테이블의 웃음소리에 가게가 쩌렁쩌렁했다.

    아직도 손님들로 북적이는 가게는 통화할 여건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완연한 가을. 외투 없이 나가기에는 추울 것 같고. 선혜는 화장실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다소 조용한 화장실에 도착한 선혜는 세면대 옆에 비스듬하게 섰다.

    “어, 수호야.”

    - 엄마 아직도 회식하는 중이야?

    “응.”

    - 많이 늦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려던 선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제 승진을 기념하는 회식 자리이니만큼 주인공은 자신일 터. 끝까지 달릴 수는 없을지언정 2차까지는 가야 하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응. 조금.”

    - 그렇구나.

    “아빠랑 먼저 자고 있어. 엄마 잘 들어갈게.”

    - 알았어.

    “아빠는 뭐 해?”

    - 아빠 지금 나 통화하는 거 봐. 바꿔 줄까?

    “응. 바꿔 줘.”

    - 잠깐만.

    곧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 많이 늦어요?

    “네. 그럴 것 같아요. 걱정 말고 수호랑 먼저 자요.”

    - 수호 재우고 기다릴 테니까 끝나면 연락해요.

    “네. 알겠어요.”

    - 선혜 씨, 좀 취한 것 같은데.

    선혜는 민망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티 나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때였다.

    - 응. 티 많이 나네.

    태준이 나직하게 읊조린 반말에 심장이 심란해졌다. 선혜는 잠깐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태준 또한 갑작스레 말을 놓은 게 민망한지 말을 돌렸다.

    - 여하튼 끝나면 연락 꼭 하고요.

    “네. 알았어요.”

    - 이따 봐요.

    “네.”

    태준과 통화를 마치고 난 뒤 선혜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다가 제 뺨에 손등을 댔다. 손등이 뜨끈했다. 문득 웃음이 샜다. 겨우 반말 한 번에 이런 반응이라니.

    유난스럽다 생각하며 애써 털어버린 뒤 세면대 앞에 섰다.

    손만 씻고 나가려다가 문득, 회식 중 한 번도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홀에서 일하는 석주를 의식한 탓이었다. 온 김에 볼일이라도 보고 들어가자 싶은 마음에 선혜는 칸으로 들어갔다.

    볼일을 마친 뒤 옷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에 손을 갖다 대는 그때였다.

    거친 구두 굽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쨍하니 때렸다.

    “아니,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승진이야? 진짜 어이없지 않아요?”

    지민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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