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78화 (78/109)

#78. 회식 장소

“엄마가 요즘 이상해.”

수호의 등원 길. 수호의 혼잣말에 운전하던 태준이 수호를 흘끔 돌아보았다.

“왜?”

“한숨도 엄청 자주 쉬고요. 표정도 엄청나게 안 좋고요.”

수호가 태준을 휙 돌아보았다.

“회사에서도 그래요?”

태준은 차마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종종 복도를 지나가다 들여다본 디자인팀 사무실에서, 그리고 점심을 같이할 때마다.

아니. 그냥 마주치는 매 순간 선혜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아지실 거야.”

“언제요?”

태준은 흘러간 날을 세고는 대답했다.

“한…… 스무 밤만 지나면?”

석주를 가게에서 마주친 그날 선혜에게 자초지종을 들어 태준 또한 알고 있었다. 석주가 경애의 가게에서 한 달만 일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시간은 꽤 흘러 그 한 달에서 벌써 열흘이 지나 있었다.

“스무 밤?”

“응.”

“놀이동산 가기 전이네.”

수호가 툴툴거렸다. 엄마의 기분이 저조할 때 놀러 가려니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른 애들 같았으면 놀러 갈 생각에 그저 들떴을 텐데. 엄마를 걱정하는 수호의 갸륵한 마음이 기특하기만 하다. 태준은 손을 뻗어 수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가면 기분 좋아지실 거야. 분명히.”

“정말요?”

“응. 아빠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수호의 눈에 반짝임이 서렸다.

“어떻게요?”

태준이 콧잔등을 장난스럽게 찡그리며 수호를 향해 속삭였다.

“엄마한테 프러포즈할 거거든.”

“우와.”

순수한 아이의 감탄사에 웃음이 절로 터졌다.

“제가 뭐 도와줄 건 없어요?”

태준은 없다고 말하려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곧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나면 말해줄게.”

“네.”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를 향해 빙긋이 웃어 보인 태준은 신호가 바뀌자 앞을 바라보며 차를 몰기 시작했다.

유치원이 차츰 가까워지자 태준이 수호에게 물었다.

“요즘 유치원에서는 별일 없지?”

“음……아.”

뭔가 생각난 얼굴로 수호가 말했다.

“요새 친구들 사이에서 충치가 유행이에요.”

“충치?”

되묻는 말에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 게 다 유행이네.”

의아했으나 태준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곧 유치원 앞에 태준의 차가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학부모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세빈의 보호자에서 수호의 보호자 노릇을 하는 태준과 그와 똑 닮은 수호를 보며 다들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의문이 피어오르는 것도 잠시뿐. 똑 닮은 부자를 보며 모두 둘 사이의 관계를 어림짐작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대담하게 물으러 오지 못했다. 그저 둘을 멍하니 번갈아 쳐다볼 뿐.

“수호야. 유치원 잘 다녀오고. 끝나면 아빠한테 전화해?”

“네.”

태준이 장난스럽게 뺨을 툭툭 쳤다.

“자, 아빠 출근하는데 힘내라고 뽀뽀.”

수호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태준은 키득키득 웃으면서도 뺨을 들이밀었다. 수호가 목을 뒤로 쭉 뺐다.

태준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마지못해 슬금슬금 다가온다. 하지만 차마 입술은 못 대고 머뭇거린다. 태준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그러는 와중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수호가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뭘 하나 싶어 쳐다보는데 수호가 자그마한 자신의 손바닥에 입술을 대더니 그 손바닥을 태준의 뺨에 꾹 눌렀다.

“자요.”

야무진 아이의 대처에 절로 웃음이 샜다.

“내가 너 때문에 미치겠다.”

장난스럽게 수호의 머리를 헝클인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수호를 향해 손을 흔들자 수호도 손을 흔들고는 총총 멀어졌다.

수호가 유치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본 그가 돌아서는 때였다.

“저기, 세빈이 외삼촌?”

민희 엄마, 연지가 다가와 눈을 빛냈다. 연지의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다. 선혜에게 남자 소개를 종용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선혜가 내키지 않아 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이던 사람.

“세빈이 외삼촌이 왜 수호를…… 근데 전엔 몰랐는데, 둘이 엄청 닮았네요?”

답을 다 알고 떠보는 질문이었다. 다들 아닌 척 연지의 질문에 대한 태준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준은 수호가 멀어진 방향을 보다가 말했다.

“당연하죠. 제 아들인데.”

연지의 입과 눈이 저절로 크게 벌어졌다.

“저, 정말요? 아니, 둘이 어떻게…….”

태준은 ‘어떻게’에 대한 답은 하지 않았다.

“어쩌죠. 제가 출근이 좀 급해서.”

“아, 네.”

무안해하는 연지를 떨친 태준은 그대로 차에 올랐다.

어안이 벙벙한 연지의 얼굴을 보자 속이 후련해졌다. 이제 싫다는 사람 붙들고 남자 소개 운운하지 않겠지. 통쾌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맨 그의 차가 곧 유치원 앞을 벗어났다.

한편. 연지는 멀어지는 태준의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다가 곧 친한 학부모가 몰려 있는 무리로 달려갔다.

“세상에. 수호 아빠래!”

“정말? 진짜?”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람?”

“내 말이!”

아줌마들의 들뜬 수다가 쉼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근데 수호 엄마 미혼모라더니? 자기한테 남자 소개도 받고 그랬잖아. 갑자기 애 아빠라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러게. 뭐가 뭔지.”

연지가 눈을 굴리며 팔짱을 끼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곧 무슨 시나리오가 생각났는지 작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 소리는 근처에 있는 차창의 틈새 너머로 고스란히 흘러들어왔다.

차 안에 있던 태연은 흘러가는 대화를 듣고 있다가 차갑게 조소했다.

“아주 소설들을 써요.”

막장도 저런 막장이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는 건지 기가 막힐 따름이다.

마음 같아서는 나서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바로 스케줄이 있었다.

멀어지는 차 안. 선글라스 너머로 학부모 무리들을 보는 눈빛이 서늘했다.

*

경애의 국밥집.

춘희는 테이블 한켠에 앉아 턱을 괸 채 석주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한가함에도 불구하고 석주는 부지런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만하고 좀 쉬시지 그러세요?”

춘희의 예의 바른 타박에 석주가 춘희를 돌아보았다.

“이것만 하고요.”

“할 게 뭐 있다고…….”

춘희가 불퉁하게 중얼거렸지만 석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닦은 테이블을 닦고, 또 닦고. 정리한 곳을 한 번 더 점검하고. 수저통이나 냅킨이 채워져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기까지.

지극정성이 따로 없었지만 석주를 아니꼽게 보는 춘희의 눈에는 유난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춘희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도 석주를 계속 눈으로 좇고 있었다.

나름의 감시였지만 감시할 게 없다보니 종종 다른 생각이 끼어들곤 했다.

젊었을 때 한 미남이었겠다부터 시작해서 사장님이랑은 어쩌다 이별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다시 나타난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했고.

하지만 가장 머릿속을 많이 차지하는 생각은.

‘피는 못 속인다더니.’

선혜와 닮았다는 생각이었다.

석주를 보다보면 선혜의 모습이 겹쳐 보일때가 많았다. 외모는 엄마인 경애를 닮았을지언정 짓는 표정이나 말투, 하는 행동이나 자잘한 버릇이 아빠인 석주와 닮은 부분이 많은 듯 싶었다.

그래서일까.

못된 소리를 하고 싶다가도 그의 눈을 보면 말이 목구멍으로 쏙 들어가곤 했다. 처음 그가 가게로 들어왔을 때 텃세를 부려 제발로 나가게 하겠다는 포부가 무안할 정도였다.

문득 시선을 느끼고 돌아본 석주와 눈이 마주쳤다. 춘희는 떨떠름한 얼굴로 팔짱을 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장님은 언제 오시는 거람.”

저녁 식재료가 부족할 것 같다며 시장에 간 경애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때마침 경애가 두 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가게로 들어서고 있었다.

춘희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석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애에게 다가갔다.

장본 물건들을 건네 받으려 손을 뻗었지만 경애는 그의 앞을 쌩하니 지나쳤다. 보는 사람이 다 무안할 정도였지만 이제 이런 무시가 익숙해진 석주는 표정 변화가 크지 않았다.

“차는 어쩌고 택시를 타고 오세요?”

춘희에게 장바구니를 건넨 경애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차가 고장이 나서.”

상견례 가던 날 속을 썩여 수리를 맡겼던 차는 얼마 못가 또다시 고장이 나고 말았다.

춘희가 탄식을 가감없이 쏟아냈다.

“하이고. 그 똥차 좀 그만 버리세요, 네? 나 같으면 진작 폐차 시켰다.”

“고치면 쓸 만하거든?”

“아니, 그래도.”

“사 줄거 아니면 쓸데없이 잔소리 말고 이거나 다듬어. 양 많아.”

경애의 말에 춘희는 비뚜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다물었다.

장바구니를 챙겨 부엌으로 들어가는 춘희의 뒷모습을 흘기다 무거운 물건을 드느라 무리한 팔을 주먹으로 툭툭 두드리는 때였다. 옆으로 석주가 다가왔다. 기척을 느끼고 무심결에 돌아보다 눈이 마주쳤다.

“다음에는 나랑 같이 가. 혼자 가지 말고.”

경애가 기가 찬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왜?”

“짐이라도 들어주면 좋잖아.”

경애가 비쩍 마른 석주의 몸을 훑어내리다가 픽 조소했다.

“퍽이나 잘 도와주겠다.”

경애의 비아냥에도 석주는 전혀 기분나빠 보이지 않았다. 머쓱한 얼굴로 제 몸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일 뿐.

“그래도 다음엔 같이 가.”

그러면서도 고집을 피우는 게 대단했다.

경애는 기가막힌 듯 짧게 웃더니 휴식겸 방으로 멀어졌다. 문을 닫고 누우려다가 춘희에게 전달하지 못한 말이 생각나 다시 돌아섰다. 막 문을 열어 젖히는데 뭔가를 입에 털어넣고 삼키던 석주와 눈이 마주쳤다.

“콜록, 콜록!”

목에 뭔가 걸렸는지 석주가 기침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물을 찾아 마시면 될 것을 그는 부랴부랴 화장실로 도망치듯 뛰어가 버렸다.

경애는 어이없는 얼굴로 석주가 멀어진 곳을 바라보다가 부엌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얘, 춘희야. 고추 작은 건 청양이고 큰 건…….”

그런데 그때. 툭 하고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약을 먹다가 떨어뜨린 약의 깍지인 모양이었다.

경애는 자기도 모르게 바라보다 허리를 천천히 숙여 들어올렸다.

낯선 약의 상품명을 보던 그녀가 밑에 적힌 글귀를 읽었다.

“……진통제?”

보통 진통제가 아니라 마약성 진통제였다.

순간 방금 전 뭔가를 삼키던 석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삼키던 게 약이었나?

그런데 마약성 진통제라니.

이걸 왜?

“사장님. 저 부르셨어요?”

춘희가 부엌에서 나오자 경애는 자기도 모르게 약 포장을 손에 꼭 말아쥐었다.

“어, 그 고추 작은 건 청양이고 큰 건 아삭이니까 섞이지 않게 잘 다듬으라고.”

“알겠어요.”

춘희가 부엌으로 다시 들어간 뒤 석주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잠시 석주를 향해 시선을 두던 경애는 다시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미닫이문을 닫고 경애는 잠시 자리에 서 있었다.

주먹 쥔 손을 천천히 앞으로 가져와 벌리자 자기도 모르게 챙겨온 약의 깍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톱 사이가 뾰족한 가장자리에 찔렸는지 다소 아릿했다.

보고 있자니 괜히 심란했다.

심란한 마음을 달랠 방법을 찾다 선혜가 떠올랐다.

선혜와 통화를 하다 보면 이 마음이 달래지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선혜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경애의 심란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

선혜는 디자인팀 팀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카페에 모여 있었다.

말없이 커피잔을 기울이는 때였다.

“선혜 씨. 요즘 무슨 일 있어?”

민영이 나지막하게 물어와 선혜는 고개를 들었다. 팀원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선혜가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뇨. 일은요.”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또 어디 아픈 거 아냐? 계속 지쳐 보이던데.”

내가 그랬나.

선혜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얼굴이 거칠거칠했다. 요즘 통 잠을 못 잔 탓이다. 아버지가 엄마의 가게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잠이 잘 오지 않았던 탓이다.

석주를 떠올리자 다시금 선혜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가을 타나 봐?”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댄 기주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런가 봐요.”

기주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계절을 탈 땐 역시, 술이지.”

“갑자기요?”

지민이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지민뿐만 아니라 다들 웬 생뚱맞은 소리냐는 얼굴이었다. 기주만이 홀로 당당했다.

“그럼. 우리 디자인 팀 회식한 지도 한참인데 오랜만에 다 같이 뭉쳐볼까? 오늘 또 마침 금요일이기도 하고.”

다들 반박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요즘 회식이 드물기는 했으므로. 게다가 기주의 기분이 좋아 보일 때 회식을 하는 게 여러모로 신상에 이로웠다. 괜히 태석이라도 뜨는 날엔 그의 우울한 주사를 받아주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으니까.

다들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선혜 또한 술이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끄덕이는 때였다.

“또 아일랜드 가요?”

지민이 불퉁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거기 말고 더 있나?”

회식 장소를 물색하는 때였다.

선혜의 핸드폰이 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다름아닌 엄마인 경애.

팀원들과 한참 얘기를 하는 터라, 선혜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 기주가 발신자 이름을 보고는 혀를 찼다.

“뭘 끊어. 그냥 가서 받고 오지.”

“아니에요. 이따가 하면 돼요.”

“맞다. 선혜 씨 어머니 무슨 식당 한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선혜는 의아한 얼굴로 지민을 보았다.

팀원들에게 단 한 번도 가족 얘기를 자세히 한 적이 없었는데 엄마가 식당을 하는 걸 어떻게 안 걸까. 의아해하며 바라보던 선혜가 팀원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네. 국밥집 하세요.”

“와. 날도 추운데 국밥이 확 당기네?”

설마.

“이번 회식 선혜 씨네 어머니 가게에서 하는 거 어때?”

“좋아요!”

지민이 나서서 손뼉을 짝 쳤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릴 새도 없이 팀원들이 하나둘 동의하며 저절로 회식 장소가 경애네 국밥집으로 정해졌다.

저절로 석주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선혜가 입술 안쪽을 말아 물었다.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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