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77화 (77/109)
  • #77. 수호의 바람

    선혜와 태준, 그리고 수호는 가회동 본가에서 나와 경애네 국밥 집으로 향했다. 저번에 선혜가 경애에게 말한대로 반찬도 가지러 갈 겸 저녁 식사도 할 생각이었다.

    “꼭 명절 같네요?”

    운전하던 태준이 피식 웃으며 한 말에 선혜도 동의했다.

    시댁과 친정을 번갈아 오가는 게 딱 그랬다.

    “우리 가족들이 뭐 곤란하게 한 거 없어요? 아까 보니까 막 이것저것 묻는 것 같던데.”

    선혜는 태준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곤란하기는커녕 즐거웠다. 낯가리는 제 성격에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마도 반겨주고 품어주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리라.

    처음에는 표정이 좋지 않았던 태연도 헤어질 때는 표정이 처음만큼 나쁘지 않았다. 어색했지만 수호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기도 하고.

    ‘학부모 회의에서 한 번 봐요.’

    이렇듯 선혜에게 선뜻 인사를 해주기도 했다.

    화목한 가정에 누가 될까 두려웠었는데.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연락 드리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생각보다 늦을 것 같은데.”

    주말을 맞이하여 차량정체가 꽤 심했다. 차창 너머로 교통상황을 살핀 선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핸드폰을 들었다. 곧바로 경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선혜야. 출발한 거야?

    “응. 엄마. 근데 좀 늦을 것 같아. 차가 많이 밀리네.”

    - 주말이잖아. 차 밀리는 건 당연하지, 뭐.

    “한 삼십 분쯤 걸릴 것 같아.”

    - 그래. 알겠어.

    이따가 보자고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였다.

    - 선혜야.

    경애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선혜를 불렀다.

    “응?”

    - 가게에 늬 아빠 있어.

    선혜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눈을 두 번 느리게 깜박거리는 동안 경애가 재차 말했다.

    - 엄마 가게에 늬 아빠 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선혜가 미간을 좁히고 되물었다.

    - 자세한 건 통화로 하기 좀 그렇고. 오면 알려줄게. 일단 알고 있으라고. 보고 너무 놀라지 말고.

    경애의 한숨을 끝으로 통화는 끊어졌다. 핸드폰을 쥔 선혜의 손이 느리게 내려갔다. 꺼진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는 눈이 심란함으로 가득했다.

    ‘아버지가 엄마 가게에는 왜?’

    “엄마, 왜 그래?”

    선혜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수호가 물었다. 수호의 맑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선혜는 어색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아냐. 아무것도.”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는 수호를 피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간 해가 빨라져 벌써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손님으로 잠깐 온 거겠지.’

    순간 머릿속에 얼마 전 석주에게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

    ‘다 잊고 잘 사는 엄마, 더 이상 심란하게 만들지 마세요. 엄마랑 제 주위에 얼씬도 하지 마시고요.’

    분명 알겠다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역시 나와의 약속은 쉽게 저버리시는구나.’

    그래. 원래 그런 분이었지.

    선혜의 입가에 조소가 씁쓸히 맺혔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여, 상처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

    경애의 가게는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주말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손님이 많아 보였다.

    “어, 선혜 왔구나?”

    바삐 움직이던 춘희가 선혜를 보며 움찔하더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일면식이 있는 태준과 눈인사를 하고 멀끔하게 차려입은 수호를 놀리는 동안 어색한 느낌이 가시긴 했지만, 다시 선혜를 보자 길게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이쪽으로 앉아. 온다고 해서 자리 비워놨어.”

    “네. 고마워요, 언니.”

    “고맙기는.”

    “근데 엄마는요?”

    경애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는데 춘희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잠깐 화장실 가셨나 봐. 금방 오실 거야.”

    선혜의 눈치를 보던 춘희는 곧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뭔가 이상하다는 건 진작 눈치챘고 그게 석주 때문이라는 것도 알아챘다.

    그런데 정작 그 원인인 석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를 배회하던 시선이 무심결에 태준에게 닿았다. 태준은 턱을 괸 채 선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왜 그래요?”

    “아, 그게.”

    선혜가 한숨 쉬듯 말했다.

    “아까 엄마랑 통화하는데 아버지가 가게에 있다고 해서.”

    태준이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준도 마찬가지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석주를 찾지 못했다.

    “가신 거 아닐까요?”

    가게에 도착하기까지 삼십 분이 걸릴 거라 예상했지만 십 분을 더하여 사십 분이 걸렸다.

    “그런가 봐요.”

    선혜는 태준의 말에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좀처럼 찝찝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아까 제 눈치를 보던 춘희의 낯선 모습 때문이리라. 춘희 쪽을 돌아보자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지 선혜와 눈이 마주치자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곧장 회피한다.

    바쁘게 일하는 사람 붙들고 뭐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답답함에 냉수를 찾아 마시는 때였다.

    “……어?”

    놀란 태준의 음성에 선혜가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순간적으로 선혜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잔뜩 당황한 얼굴. 불길한 느낌에 천천히 물잔을 내려놓는 때였다. 선혜보다 먼저 뒤를 돌아본 수호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한 것은.

    “어, 할아버지다!”

    ……할아버지?

    뒤를 향하려던 시선이 수호에게 오래 못 박혔다. 수호는 자기도 모르게 내질러 놓고서는 뒤늦게 선혜의 눈치를 보고 입을 합하고 다물고 있었다.

    할아버지라니. 낯선 호칭을 익숙하게 내뱉는 수호를 보며 가만히 미간을 좁히던 선혜는 비로소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가게 뒷문을 통해 경애와 나란히 들어서던 석주와 눈이 딱 마주쳤다. 선혜의 시선이 곧장 석주의 차림새를 훑어내렸다.

    편한 차림새에 빨간 앞치마를 두른 모습. 빨간 앞치마에는 경애네 국밥집 로고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직원인 춘희와 똑같은 차림새.

    설마.

    “왔으면 연락을 좀 하지.”

    “엄마.”

    선혜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경애를 올려다보았다.

    “일단 밥부터 먹어. 배고플 텐데.”

    경애가 가라앉은 눈으로 선혜를 길게 바라보았다.

    “밥 먹고 얘기하자.”

    경애는 그렇게 말하고는 멀어졌다. 경애의 뒷모습을 보는 망연한 시선이 석주에게로 향했다. 석주는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돌렸다.

    여기저기서 직원을 찾자 석주가 바쁘게 움직인다.

    손님들에게 주문을 받고 쟁반 위에 있는 국밥과 반찬을 나르는 모습이 심히 낯설었다. 의사 가운을 입고 진료실에 앉아 있던 과거 석주의 모습이 오버랩 돼서 더욱 그러했다.

    다시금 석주와 눈이 마주치자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리고 말았다. 때마침 춘희가 국밥과 반찬들을 가지고 왔다. 춘희는 선혜와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하고는 멀어졌다.

    식탁 위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니, 싸늘했다.

    “어, 저기…….”

    태준은 선혜의 눈치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건 수호도 마찬가지였고.

    두 남자가 허둥대는 사이 선혜는 천천히 수저를 들었다. 뭐라도 먹어야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진정될 것 같았다.

    하지만 미각을 잃은 것처럼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생생한 건 있었으니.

    “국밥 나왔습니다. 아, 네 계산해 드릴게요. 물이요? 물은 셀프입니다, 손님.”

    열심히 일 하는 석주의 음성이었다.

    선혜는 결국 반도 못 먹고 체하고 말았다.

    *

    불편한 속을 안고 선혜는 경애와 마주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한참을 맴돌다가.

    “어떻게 된 거야?”

    선혜가 운을 틔움으로써 물러났다.

    경애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소상히 설명했다.

    석주가 찾아와서 했던 말부터 시작해서 소금을 뿌려 가며 쫓아내도 석주가 몇 날 며칠을 찾아오던 일.

    그리고 어제는 찾아와 한 달 동안만 일을 시켜달라고 한 것까지.

    “……그래서. 엄마 가게에 취업시켜 준 거야?”

    “응.”

    “엄마.”

    선혜가 기가 막힌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한 달이 두 달 되고, 그러다 반년 되고 일 년 되고 평생 될지 누가 알아? 아버지 몰라? 책임지겠다, 약속하겠다 해놓고 단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지키지 않은 사람이야. 근데 그런 사람을 받아들여? 엄마, 진짜 왜 그래?”

    쉼 없이 말을 뱉던 선혜가 순간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아버지한테 미련 있는 거 아니지?”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선혜의 질문에 경애는 흔들림이 없었다.

    “미쳤니? 내가 저 인간한테 미련 있게?”

    “그럼 대체 왜 받아들인 건데?”

    “수상해서.”

    “뭐?”

    경애가 가늘어진 눈으로 문밖을 흘끔거리며 팔짱을 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영 감이 안 온단 말이야.”

    “그래서. 그 꿍꿍이가 뭔지 알아보려고 들였다고?”

    “그래. 확실히 알고 내쳐야 또 찾아오지 않을 테고.”

    선혜는 말없이 물만 마셨다. 체기가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엄마인 경애를 다시금 쳐다보지만 정말 석주에 대한 미련이라고는 한 톨도 남아 있어 보이지 않았다. 정말 수상하다는 듯 탐정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뿐.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터지려는데 경애와 눈이 마주쳤다.

    웃음기를 지운 눈으로 경애를 한참 동안 마주하던 선혜가 입을 열었다.

    “한 달 뒤에 꼭 내보내야 해, 엄마. 알았지.”

    “꼭 한 달 아니어도 그 안에 이상한 짓 하면 바로 쫓아낼 거거든? 별걱정을 다 한다.”

    경애가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나도 늬 아빠 못 믿어. 한두 번 속고 살았니?”

    그 말을 제 입으로 하는 엄마를 보자 속이 탔다. 선혜는 다시금 냉수를 들이켜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물 잔은 비어 있었다. 여분으로 가져온 물병 또한 없었고.

    가게는 아직도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식사하러 온 손님들보다 술을 마시러 온 손님들이 더 많았다. 본격적으로 바빠지고 심란해지는 시간이었다. 한마디로 슬슬 일어나야 할 시간.

    “그래. 엄마가 알아서 잘하겠지.”

    역으로 하는 잔소리는 하기도 전에 관두기로 했다.

    속도 안 좋아서 더 있을 수도 없었다. 집에 가서 약을 먹든지 손을 따던지.

    선혜는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왁자지껄한 소음이 밀려들었다. 경애와 선혜가 있던 방 앞에 앉아 얌전히 기다리던 수호와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두 사람에게 선혜가 애써 웃어 보였다.

    “가요, 우리.”

    태준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 또한 한 쪽 눈치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똑 닮은 두 사람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다 둘의 시선이 자꾸만 향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석주가 서 있었다.

    손에 작은 유리병을 든 채로.

    뭔가 싶어 자기도 모르게 보는데 유명한 소화제였다.

    설마 하는 사이 석주가 다가와 병을 건넸다.

    “마셔. 속 불편해 보이던데.”

    선혜는 받지 않고 석주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고울 리 없었다. 기가 막히고 화도 나서 뭐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말도 섞기 싫었다.

    선혜는 말없이 외면하고는 입구를 향해 거칠게 발걸음을 옮겼다.

    덩그러니 남은 태준과 수호가 비지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태준은 선혜가 받지 않은 소화제를 들고 서 있는 석주 앞에서 어찌할 줄 몰라 하다가 입구의 풍경이 울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 그럼 수고하세요.”

    자기도 모르게 허리까지 숙여 인사하고는 수호를 데리고 돌아섰다.

    태준이 선혜를 향해 정신없이 걸어가는 와중 수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석주는 소화제를 앞치마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시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소 음울한 그 얼굴을 보자 아까 그 일이 생각 났다.

    ‘한 달이 두 달 되고, 그러다 반년 되고 일 년 되고 평생 될지 누가 알아? 아버지 몰라? 책임지겠다, 약속하겠다 해놓고 단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지키지 않은 사람이야. 근데 그런 사람을 받아들여? 엄마, 진짜 왜 그래?’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도 언성 높인 선혜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문밖으로 샜다. 그리고 때마침 그 말을 들은 석주는 자기도 모르게 지나가다가 멈춰 섰었고.

    그 순간 마주친 할아버지의 표정이 수호의 뇌리에 깊게 새겨졌다.

    수호는 제 손을 잡은 태준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태준의 손을 꼭 잡았다. 수호가 별안간 힘주어 잡자 태준이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

    “아니에요, 아무것도.”

    새삼스럽게 아빠한테 미안했다.

    제가 까칠하게 굴 때 아빠도 뒤에서 그런 아픈 표정을 지었을까 싶어서.

    아무리 지나간 일이라고 해도 후회는 남았다. 가끔 그 후회로 작은 가슴이 아릴 때가 있었다.

    엄마도 나중에 아프면 어쩌지.

    수호는 가게 벽에 기대어 서서 숨을 고르는 선혜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가가 엄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바랐다.

    엄마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할아버지도 그렇고.

    그냥 모두 다 아프지 않고 행복하기만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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