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76화 (76/109)

#76. 짝사랑의 마침표

석주의 입에서 나온 부탁이라는 건 경애의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나, 누나네 가게에서 일하게 해 줘.”

“뭐?”

저절로 퉁명스럽게 반문이 튀어나왔다.

석주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월세가 많이 밀렸어.”

경애는 입을 반쯤 벌리고 석주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하도 황당하고 기가 막힌 모습이었다.

“길게는 일 안 할게. 한 달만 일하게 해 주면…….”

“월세가 얼마나 밀렸는데?”

순간 석주가 멈칫했다. 바쁘게 눈을 굴리는 모양새가 가히 수상쩍었다.

“한…… 백만 원 정도.”

“몇 달이 밀렸는데.”

“한…… 석 달?”

아무리 변두리라고 한들 서울이다. 서울에서 석 달 치 월세가 백만 원인 곳이 있던가.

고시원이 이 근처에 있나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가면 갈수록 미심쩍고 의심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파악하고 싶었지만, 독심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찌 알랴.

경애가 체념 섞인 얼굴로 석주에게 말했다.

“그 백만 원 그냥 줄 테니까 더 이상 오지 마.”

가게에 돈 백만 원은 현금으로 있을 터였다.

백만 원으로 이 연을 끊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쥐여줄 수 있었다. 연 끊는 데 백만 원밖에 안 들다니. 참 가볍기 그지없는 인연이다 싶어 헛웃음이 나오는데 석주가 다급히 경애를 붙들어 세웠다.

“돈 달라고 하는 게 아니야.”

모순적인 말에 경애의 눈썹 한쪽이 들렸다.

주저하고 망설이던 석주가 더욱 단단한 눈빛과 음성으로 말했다.

“일하게 해 줘.”

그리고 덧붙이기를.

“한 달 만. 그러면 한 달 뒤에는…….”

이어지는 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다시는 누나랑 선혜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그런 석주를 보는 경애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

선혜는 이른 아침부터 태준의 본가에 갈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태준도 미리 와서 수호의 외출 준비를 돕고 있었다. 아이의 옷을 입히는 건 처음이어서 여러모로 서툴렀지만, 태준은 최선을 다했다.

“다 됐다.”

시연이 사다 준 정장 한 세트를 차려입은 수호다. 엉성한 부분이 없나 확인차 훑어내린 태준이 수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옷, 안 불편해?”

수호가 제 차림새를 내려다보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불편하면 말해. 다른 옷으로 입어도 괜찮으니까.”

수호는 태준의 말에 동요하는 얼굴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입고 간다고 하기에는 저번에 옷을 입히며 좋아하던 할머니 시연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수호의 마음을 알아챈 태준은 조숙한 아들이 기특하기만 했다. 그래도 다음에는 아이가 편한 옷으로 입혀 줘야지. 그런 결심을 속으로 세우는데 수호 방문이 열리고 선혜가 들어왔다.

“다 했어요?”

“네.”

태준이 대답을 하며 일어서고 선혜는 수호의 차림새를 살폈다. 합격인지 선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졌다. 기분 좋게 미소지은 태준이 수호를 번쩍 안아 들며 선혜에게 물었다.

“갈까요?”

선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침부터 가회동 본가에 갈 준비로 태연과 하산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결혼 생활 8년 차에, 육아 7년 차 부부는 손발을 척척 맞추며 세빈의 외출 준비를 분담했다.

태연은 계속 세빈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전 같았으면 할머니 할아버지를 비롯한 친척들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에 들떴을 세빈인데 오늘따라 가라앉아 있었다. 심란한 기색이 아이의 무구한 눈동자에 내비치고 있었다.

보다 못한 태연이 세빈과 눈을 맞추어 앉았다.

“우리 딸, 왜 그래?”

세빈이 고개 들어 태연을 보았다.  태연이 다정한 손길로 세빈의 단발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겨 주었다.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

“그냥.”

말을 하려다 말고 머뭇거리던 세빈은 태연의 다정스러운 눈빛에 입을 열었다.

“엄마. 오늘 윤수호도 오는 거지?”

“응. 수호도 오지.”

태연이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수호도 우리 가족이잖아.”

세빈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침묵을 견디다 못한 태연이 세빈에게 물었다.

“오늘은 할머니 댁 가지 말까?”

“왜. 우리 딸 어디 아파?”

불쑥 하산이 끼어들었다. 세빈은 고개를 저었고 태연은 다소 원망스러운 눈으로 하산을 째려보았다.

태연의 눈빛을 본 하산은 흠칫하다 입 모양으로 ‘왜?’라며 태연에게 물었다. 세빈이 있는데 자초지종을 다 설명할 수가 없어 태연은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가자.”

“뭘 그렇게 서둘러? 시간 많은데.”

“그냥 빨리 좀 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촉에 하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태연도 그렇고 세빈도 그렇고.

‘분위기가 왜 이래.’

머리를 긁적거리던 하산은 잠자코 태연과 세빈 뒤를 따랐다.

*

태석과 지현은 제일 먼저 가회동 본가에 도착해 있었다.

지현은 시어머니인 시연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있었고 태석은 아버지인 현철과 함께 두 아들인 유한과 다한을 돌보고 있었다. 태석은 간간이 현관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그 빈도수가 꽤 잦았다.

“조카가 많이도 궁금한가 보네.”

현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꾸만 현관을 돌아보는 게 느닷없이 생긴 조카에 대한 호기심이라고만 생각한 모양이었다.

사실 조카에 대한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애 아빠로서 태준의 모습이 궁금할 뿐이었는데 말이다.

“아빠. 우리 동생 생긴 거야?”

둘째 아들 다한이가 물었다. 태석이 유한과 다한이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유한이한테는 동생이고 다한이한테는 형이지.”

“우와. 나 형 또 생기는 거야?”

“응. 엄청 잘생긴 형.”

현철이 그 말에 의아한 얼굴로 태석을 보았다. 태석은 수호를 본 적이 없는데 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현철의 표정을 보고 뒤늦게 아차한 태석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태준이랑 똑 닮았다면서요. 그럼 당연히 잘생겼겠다 싶어서.”

태석의 말에도 미처 의심이 다 거두어지진 않았다. 묘한 느낌에 빤히 쳐다보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태석이 현관 쪽을 휙 돌아보았다. 하지만 발을 들인 건 태연의 가족이었다.

“왔어?”

“응. 엄마. 저 왔어요.”

태연이 짤막하게 인사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지쳐 보이는 태연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데 하산이 인사를 해 왔다.

“두 분 다 잘 지내셨어요?”

“그럼. 잘 지냈지. 근데 태연이 얼굴이 왜 저래?”

“모르겠어요. 오늘따라 컨디션이 안 좋은가 봐요.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잘 봐봐.”

“넵. 장인어른. 염려 마십쇼.”

능글맞게 대꾸하는 하산의 모습에 웃던 현철은 태연과 마찬가지로 기운 없어 보이는 세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 세빈이도 얼굴이 왜 이래? 어디 아픈 거야?”

“아니에요. 아픈 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시무룩한 게 좋지 않아 보였다. 다들 그런 세빈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때였다.

삐릭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모두 현관에 집중했다. 특히나 수호와 선혜를 본 적 없는 지현과 하산은 잔뜩 궁금한 얼굴로 현관 쪽을 목을 빼고 쳐다보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차츰 복도를 통해 가까워지더니 태준의 모습이 드러났다. 태준의 팔에 안겨 있는 수호를 본 지현과 하산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태연은 양복을 입은 수호의 모습을 보고는 기가 막혀 입이 벌어졌다.

“아유. 우리 수호 오늘도 멋지게 입고 왔네?”

시연의 반응을 보니 저런 차림새를 한 수호를 처음 본 것 같지는 않았다.

‘엄마가 왜 그렇게 들떴나 했더니.’

거부감 없는 수용과 더불어 엄마 취향 존중까지 하다니. 태준이 제법이라는 생각이 드는 때였다.

“하하하하!”

별안간 거실에서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태석. 수호를 보자마자 배를 잡고 웃어댄다.

다들 그런 태석을 의아하게 쳐다보았음은 물론이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태석은 겨우 웃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아니, 태준이랑 너무 닮아서 웃음이 다 나네.”

그게 저렇게까지 웃을 일인가 싶어 태준이 의아한 얼굴로 태석을 바라보았지만 잠시뿐. 이내 수호를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수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호기심 어린 눈들이 반짝반짝했다.

“여기는 우리 아들 수호고요.”

태준이 옆에 서 있는 선혜를 돌아보며 팔을 뻗어 손을 잡았다.

“여기는 수호 엄마, 윤선혜 씨.”

선혜와 수호가 어색한 얼굴로 북적이는 거실을 보다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러자 하나둘 다가와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선혜도 수호도 이렇듯 북적거리는 대가족은 처음 봐서 얼떨떨해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어색할지언정 다들 반겨주는 분위기였기에 곧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가족들과 선선히 인사를 주고받는 수호를 세빈은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수호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세빈도 마찬가지로 손을 느리게 들어 흔들었다.

유치원에서의 첫 만남 때보다도 어색한 순간이었다.

*

식사 후. 여느 때처럼 여가 타임이 이어졌다. 여자들은 티 타임을 갖고 남자들은 아이들과 놀아주러 밖에 나가 있었다.

“아니, 근데.”

차를 음미하던 선혜는 지현이 빤히 쳐다보며 말을 걸자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무 예쁘시다.”

지현의 솔직한 감상에 선혜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도련님이 예쁘다고 하셔서 얼마나 예쁘실까 했는데, 세상에.”

지현의 말로 미루어 보아 가족들한테 자기 얘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계속 듣는 예쁘다는 말이 쑥스러워 선혜는 말없이 차만 마셨다. 그러다가 태연과 눈이 딱 마주쳤다. 왠지 모르게 오래 마주할 수가 없어 슬쩍 눈을 피하는 때였다.

“근데 어쩌다가 도련님하고 애부터 만들었대요? 아, 이런 거 물어보면 너무 실례려나?”

지현이 뒤늦게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시연은 그런 지현을 장난스럽게 나무랐고 선혜는 그저 웃기만 했다.

반면 태연은 말없이 차만 마시고 있었다. 시선은 줄곧 창밖에서 노는 세빈에게 향해 있었다.

세빈은 수호를 비롯한 사촌들과 오순도순 모여 놀고 있었는데 가끔 수호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세빈이랑 수호랑 같은 유치원이라며?”

시연이 대뜸 꺼낸 화제에 태연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선혜와 눈이 마주쳤다.

“응. 같은 반 친구래요.”

“어머. 우연도 이런 우연이 또 없네. 신기하다.”

“그러게요.”

시연이 소녀처럼 손뼉을 치며 웃었다. 지현은 시연의 말을 받으며 마찬가지로 눈을 빛냈다.

태연은 마냥 좋아하는 두 사람을 보자 한숨이 나오려 했다.

나만 심각하지, 나만.

창밖으로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주는 태준을 보고 있자니 한숨을 참을 길이 없다. 겨우 속으로 삼키며 차를 마셨다. 차가 유난히 떫고 쓰게만 느껴졌다.

노파심이기를 바라지만 세빈의 표정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근래 들어서 멍하게 있는 일이 자주 있었던 것도 말이다.

자식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건 당연한 일. 세빈이 수호와 가족이라는 걸 받아들임에 있어 어려움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한숨이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는 때였다.

아이들과 놀아주던 중간에 서재로 들어갔던 현철이 커다란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고 나왔다.

“그건 왜요?”

“다들 모였는데 가족사진이나 한 장 찍을까 해서.”

“좋네요. 새 가족도 생겼는데 기념으로.”

“역시 우리 아버님 센스 알아드려야 해.”

지현이 애교 섞인 말로 현철의 흥을 돋웠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현철을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

“다들 사진 한번 찍자! 기념으로!”

현철이 마당으로 나가 크게 외치자 모두 한데 모였다. 현철과 시연을 중앙으로 하여 양쪽으로는 네 손자들이 나란히 서 있고 그 뒤로는 사랑하는 자식들, 사위, 며느리들이 서 있는 구조였다.

“우리 손주들 손 한번 꼭 잡아 볼까?”

서로 척하니 손을 잡는 유한과 다한 형제와는 달리 수호와 세빈은 서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얼른 안 잡고 뭐……아야! 당신 왜 그래?”

하산이 눈치 없이 끼어들다가 태연에게 팔뚝을 맞았다. 태준 또한 헛기침을 작게 했다. 두 아이를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는 건 태연과 태준뿐이었다.

수호도 세빈도 다소 난감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싫다고 하고 싶은데 어른들이 꽤 바라는 눈치였다.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오늘 처음 보는 식구들이었지만 수호는 그들이 좋았으므로 맘 상하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해서, 세빈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건 수호였다.

세빈은 제 앞에 내민 수호의 손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을 뿐 곧바로 잡지는 않았다.

“안 잡아?”

수호가 재촉하듯 말했다. 세빈은 고개를 들어 수호를 보았다. 특유의 무심하면서도 비딱한 그 얼굴을 오래도록.

이 애는 알까. 우리가 손을 잡는 게 처음이라는 걸.

표정을 보아하니 모르는 눈치였다.

세빈은 다시금 수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를 향해 내민 손.

망설이다가 결국 손을 뻗어 그 손을 잡았다. 꼭 움켜쥐는 완력이 느껴졌다.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도.

세빈은 가만가만 그 감촉을 곱씹다가 다시 수호를 보았다.

세빈이 자꾸 제 얼굴을 쳐다봄에 수호는 의아한 듯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세빈은 그 얼굴을 보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가회동 본가에 와서 처음으로 웃은 세빈의 얼굴 위로 다소 씁쓸한 기가 맴돌았다.

“세빈아?”

태연이 걱정스럽게 세빈을 불렀다. 고개 들어 태연을 본 세빈의 얼굴 위로는 세빈 특유의 무구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응?”

태연의 얼굴 위로 남아 있던 걱정은.

“엄마, 윤수호 손 나보다 작다?”

장난스러운 세빈의 말에 조금씩 사라지다 자취를 감추었다.

자존심 상한 수호가 미간을 찡그리며 세빈을 보았다. 세빈은 수호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그러다 말하기를.

“나, 오빠라고는 안 부를 거야.”

“오빠?”

“응. 우리는 그냥.”

세빈이 수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친구 해. 친구.”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냐는 듯 수호가 얼굴을 찡그렸다. 세빈은 그런 수호의 얼굴을 보며 그저 웃을 뿐이다.

화창한 날씨의 자연광은 조명의 역할을 충분히 해 주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대가족의 가족사진이 여러 장 찍혔다.

행복이 만발한 사진들.

그 사진 속에서 어느 순간 세빈은 수호를 바라보았다.

손을 잡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 이런 눈으로 보는 것도 마지막.

그렇게 일곱 살 세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은 깨달음과 동시에 막을 내렸다.

걱정한 것만큼 큰 상처를 남기진 않았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