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지켜주고 싶은
선혜는 점점 창밖으로 가까워지는 가회동의 모습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한남동이나 평창동 등 다른 서울의 부촌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근처에 위치한 한옥 마을의 영향을 받기라도 한 걸까. 고즈넉하고 고아한 느낌의 저택이 대부분이었다.
“우와.”
수호도 생전 처음 보는 동네 풍경에 창문에 바싹 붙어 눈을 뗄 줄 몰랐다.
앞서 가던 태준의 차가 한 저택에 딸린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선혜도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 저택의 차고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주차장에는 신식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원래는 계단을 통해 마당으로 나가면 되었지만, 현철이 무릎이 약한 시연을 배려하여 만든 것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넓은 마당이 나왔다. 가을을 맞아 빛바랜 잔디들 위로 푸릇푸릇한 소나무가 솟아 있고 코스모스가 화단에서 손 인사하듯 살랑거렸다.
그 사이로 저택이 우뚝 솟아 있었다. 최신식은 아니었지만 기품 있고 웅장한 느낌의 저택이었다. 수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목을 꺾어 바라보았다.
“성 같아…….”
모두들 수호의 말을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집 규모에 놀라던 선혜도 수호의 말을 듣고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이는 때였다. 내부를 보고 감탄을 거듭하고 있는데 시연이 다가와 수호의 손을 꼭 잡고 이끌었다.
“우리 강아지, 할머니가 준비한 선물 보러 가자.”
수호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얼굴에는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다.
수호를 데리고 가는 시연도 수호 못지않게 설레하는 얼굴이었다. 태준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근데 선물은 뭘 사놓으신 거예요?”
태준이 문득 궁금한 얼굴로 현철을 쳐다보며 물었다. 웃으며 시연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현철이 시연 쪽을 턱짓하며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같이 한번 가 보던가.”
태준과 선혜가 눈을 맞췄다. 태준도 태준이지만 선혜도 몹시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둘은 곧 시연과 수호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시연과 수호는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간 시연은 장난스럽게 수호의 눈을 두 손으로 가렸다. 놀라기는커녕 수호는 키득키득 웃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엉거주춤 걷는 수호를 보던 태준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엄마, 그러다 애 넘어져.”
“걱정 하지마. 늬 아들 안전하게 잘 모시고 갈 테니까.”
시연이 수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 앞으로 열 걸음만 가 봐라.”
수호는 천천히 숫자를 세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하나.”
할머니가 준다는 선물이 무얼까?
“둘…… 셋…….”
장난감?
“넷…… 다섯…… 여섯…….”
아니면 다른 거?
“일곱…… 여덟…… 아홉…….”
아니면 혹시…….
“열!”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한편, 뒤에 서 있던 태준과 선혜는 열린 문 너머 방 풍경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당황스러운 눈빛을 서로 주고받고 있는 때였다.
“짠!”
시연이 수호의 눈을 가린 손을 풀었다. 기대가 만발한 얼굴로 눈을 번쩍 뜬 수호는 눈앞의 풍경을 보고 반쯤 웃다가 말고 말았다.
방에는 웬 옷이 가득했다. 유아 정장이 종류별로, 색깔 별로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옷뿐만이 아니다. 모자, 나비넥타이, 멜빵, 구두, 벨트 등등. 의류 액세서리도 한가득이었다.
수호가 원했던 장난감이나 로봇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때? 할머니가 우리 수호 입히려고 산 거야. 다 우리 수호 꺼!”
팔을 뻗으며 방을 가리키다가 수호 쪽을 돌아본 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수호야? 마음에 안 드니?”
태준과 선혜는 긴장 어린 눈으로 수호의 뒤통수만 쳐다보았다.
자기들도 모르게 둘이서 손을 꼭 잡는 때였다.
“할머니.”
수호가 입을 열었다.
“저 저거 입어 봐도 돼요?”
점차 웃음기를 지워가던 시연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얼마든지 입어 봐도 되지! 뭘 그런 걸 묻고 있어.”
수호가 가서 옷을 골랐다. 태준과 선혜는 뜻밖의 전개에 서로 눈치를 보다가 슬쩍 수호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수호의 표정을 보고는 입술을 말아 물며 웃음을 삼키고 말았다.
애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일곱 살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건지.
“풉.”
결국 태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시연이 입힌 대로 입은 수호가 시연 몰래 불퉁한 얼굴로 태준을 쳐다보았다. 태준은 짓궂게 웃다가 수호의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었다.
찰칵.
수호의 모습이 핸드폰 화면에 담겼다. 태준은 사진을 보며 행복한 얼굴로 웃었다.
저번에 보았던 앨범 속 자신의 어릴 적 사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
현철이 와서 말리고 나서야 끝도 없이 이어지던 수호의 환복은 끝이 났다.
1층 거실 테이블에서 과일을 먹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현철이 태준에게 제안했다.
“온 김에 네 방이라도 구경시켜주지 그러냐.”
태준이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과일을 먹고 있던 선혜와 수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태준을 동시에 쳐다보았다.
“안 쓴지 한참 된 방을 뭐 하러요.”
“아빠 여기 살았었어요?”
수호의 질문에 시연이 대신 대답했다.
“그럼. 늬 아빠 미국으로 유학 갈 때까지는 여기서 지냈지.”
“유학? 유학이 뭐야 엄마?”
선혜가 대답했다.
“다른 나라 가서 공부하는 거.”
“다른 나라? 어디?”
시연이 귀엽다는 듯이 웃다가 말해주었다.
“늬 아빠 미국 유학 출신이야.”
미국이라면 수호도 어떤 나라인지 알고 있었다. 세계 지도에서 한국보다 몇 배는 큰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왔다니. 태준을 보는 수호의 눈이 동경을 머금고 반짝반짝 빛났다.
“나 아빠 방 가볼래요.”
수호뿐만 아니라 선혜도 호기심 어린 얼굴로 태준을 쳐다보았다.
둘 다 저렇게 보고 싶어 하니 별수 없었다. 태준은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과일을 다 먹은 뒤 태준은 수호와 선혜를 데리고 제 방으로 향했다.
유학을 다녀와서 취업 전까지 태연의 집에서 지냈기에 이 방에 오는 게 대체 몇 년 만인지.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옛날 모습을 간직한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신이 태어나 줄곧 지냈던 방이라서 그런지 낯선 느낌은 금세 사라졌다.
수영선수를 꿈꾸던 소년의 흔적들이 방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방 한 편에는 태준이 수영 대회에서 탄 메달이 장식처럼 걸려 있었고 장식장에는 트로피와 상장이 한가득이었다.
뿐만 아니라 태준이 수영 대회에서 상을 탈 때마다 기념으로 부모님과 찍은 사진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태준의 성장이 시간별로 고스란히 적혀 있는 일종의 일대기 같았다.
“아빠다.”
수호의 눈은 초등학생 즘으로 보이는 태준의 사진에 꽂혀있다시피 했다. 선혜도 신기하다는 듯이 사진 속 태준을 쳐다보았다. 꼭 수호의 가까운 미래를 보는 듯했다.
수호가 사진 하나를 척하니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빠 이거 몇 살 때예요?”
“열 살이었나.”
태준이 멋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나랑 진짜 똑같이 생겼다.”
수호의 입에서까지 그 말을 듣자 태준은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럼. 아빠 아들인데. 똑같지.”
“응. 진짜.”
“더 똑같은 사진도 있는데.”
어느 틈에 온 건지. 뒤에서 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철이 주스와 쿠키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있었고 시연은 손에 커다란 앨범을 들고 있었다. 저번에 봤던 태준의 어린 시절이 담겨 있는 앨범이었다.
태준이 앨범이 뭔지 알아보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이 현철이 책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고 시연이 선혜에게 앨범을 건네 주었다.
“태준이 어렸을 때 사진들이야.”
한마디로, 흑역사 총 집합집 전권 되시겠다.
“엄마.”
태준이 말리듯 입을 열었으나 선혜는 이미 앨범을 펼친 뒤였다.
맨 앞에 있는 오동통한 갓난아기 사진을 보자마자 풋, 웃음이 새어나왔다. 태준은 민망한 얼굴로 귓불을 붉힌 채 연신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선혜의 따듯한 눈빛이 태준에게 닿았다가, 수호에게 닿았다가, 다시 앨범으로 향했다.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태준의 햇살 같은 어린 시절. 자신이 몰랐던 그 시절을.
귀엽고 사랑스럽고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던 태준의 모습들.
그러다 보고 말았다.
아까 태준이 찍고 흐뭇하게 보던 사진과 똑같은 사진을.
선혜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어, 이거. 아까 수호랑 너무 똑같다.”
너무 신기한 나머지 선혜가 소녀처럼 활짝 웃으며 태준을 돌아보았다.
멋쩍어하던 태준도 선혜가 좋아하니 별수 없는지 헛기침을 하면서도 손수 사진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먼 옛날, 시연이 앨범을 동화책 읽듯 읊어주던 것처럼.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저기 앉아서 같이 봐.”
시연이 침대를 턱짓하며 가리켰다. 선혜와 태준은 나란히 앉아 앨범을 보기 시작했다. 수호가 자기도 보고 싶다고 말하자 태준이 자신의 무릎 위로 수호를 앉혔다.
셋이 앨범을 보며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시연과 현철은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너무 보기 좋다, 그쵸.”
시연의 말에 현철이 닫힌 문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막내가 언제 저렇게 다 컸는지 모르겠네.”
“내 말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가는데 복도에 걸린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주 가족 모임에 동그라미가 쳐 있는 걸 본 현철이 시연에게 물었다.
“참, 애들한테 수호 얘기는 했어?”
“했어요. 했는데…….”
말을 하던 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아니, 그냥.”
시연은 며칠 전 태석과 태연의 반응을 떠올렸다.
‘푸하하하!’
전화로 이야기하자마자 폭소를 터트리던 태석.
‘……아, 진짜? 세상에. 정말로?’
그리고 말없이 한참을 있다가 뒤늦게 연기하듯 어색하게 반응하던 태연까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태석과 태연이 미리 알고 있었다고는 상상조차 못 한 시연이었기에 굳이 캐묻지는 않았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설마 이것들이 알면서도 이 엄마 아빠한테 말을 안 했을 리가.
시연은 의심을 덜어내고 방긋 웃어보였다.
*
한편.
“뭐?”
석주의 말에 경애가 황당한 얼굴로 반문했다. 초조한 얼굴로 석주가 다시금 말했다.
“가게 CCTV 좀 보자고.”
“그걸 네가 왜 봐?”
그렇게 말하는 경애는 ‘이게 미쳤나.’ 하는 표정이었다.
“이봐요, 아저씨. 아저씨가 뭔데 그걸 본다고 난리예요?”
춘희마저 어이없다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기 센 두 여자에게 기가 눌릴 법도 했지만 석주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이유를 설명했다.
“누가 누나를 쫓아다닌단 말야. 스토킹하고 있다고!”
“누가 나를 쫓아다녀?”
“아까 누나 넘어질 뻔 할 때 붙들어준 그 남자가.”
경애는 아까 소름끼치게 했던 의문의 남자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다른 의문이 들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까 길 가다가 봤어.”
“그 남자가 나를 쫓아오는지는 어떻게 알았는데?”
석주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너, 설마 나 쫓아 왔니?”
“그게…….”
경애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쫓아다니는 게 이제 아주 수준급이다? 알아채지도 못하게 아주 살금살금.”
석주의 표정은 간절했으나 경애의 얼굴은 냉랭했다.
“됐고.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말고 가기나 해.”
“경애야.”
다급한 나머지 옛날 호칭이 나오고 말았다. 가게로 들어가던 경애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흔들리던 눈동자의 떨림은 석주를 보자마자 싸하게 가라앉았다. 경애가 춘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춘희야. 들어가서 소금 좀 갖고 와라. 굵고 거친 걸로.”
“넵!”
단번에 경애의 말뜻을 알아들은 춘희가 냉큼 들어가 소금을 봉지째 갖고 왔다.
뒤늦게 소금의 용도를 알아차린 석주가 주춤하는 사이 경애가 석주를 향해 사정없이 소금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알이 굵은 소금은 마치 작은 돌멩이처럼 매섭고 또한 따가웠다.
“빨리 가! 안 가? 썩 꺼지라고!”
석주는 손으로 막으면서도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막는 손 사이로 경애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으나 경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석주가 계속 버티고 서 있자 경애가 소금을 봉지째 들이 부으려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석주는 뒤를 돌아 부랴부랴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간간이 뒤를 돌아본다. 상처받은 눈빛이었다.
경애는 씨근덕거리다가 소금을 챙겨 가게로 들어왔다. 느닷없이 벌어진 진풍경에 창 너머로 구경을 하던 손님들이 다시 국밥을 먹기 시작하였다.
숨을 고르던 경애는 춘희에게 소금을 넘기고는 물었다.
“우리 CCTV 영상 어딨어?”
“뭘 굳이 보신다고…….”
투덜대던 춘희는 경애가 쏘아보자 주섬주섬 가게 구석으로 갔다. 경애는 잊고 있었던 CCTV 영상을 며칠 전으로 돌려 빠른 속도로 보기 시작했다.
다 보자 기가 막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 하자는 거야, 진짜.”
CCTV 화면을 보니 최근에도 가게 근처를 어슬렁거린 건 석주뿐이었다. 대담하게 이제는 모자도 쓰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