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73화 (73/109)
  • #73. 할 말

    경애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연과 현철을 보는 눈에 긴장이 서렸다.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러면서도 경애는 애써 웃으며 두 사람을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현철과 시연 또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선혜 엄마 되는 사람입니다.”

    “네. 저는 태준이 엄마 되는 사람이고요, 이쪽은 태준이 아빠예요.”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현철이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악수가 익숙지 않은 경애는 어색하게 현철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어색하게 시연을 향해 고개를 돌리다가 시연과 눈이 마주쳤다.

    시연은 경애를 빤히 쳐다보면서 눈을 빛내고 있다가 경애와 눈이 마주치자 곱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옅은 갈색 눈동자와 웃는 모습이 태준과 비슷했다.

    “우리 새아가가 왜 이렇게 미인인가 했더니, 어머니 닮아서 그런 거였네요.”

    시연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한 말에 경애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소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말도 못 하고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다른 손은 휘휘 내젓는 모습에 시연이 놀리듯 덧붙였다.

    “너무 젊고 미인이셔서 늙은 제가 사부인이라고 불러도 될는지.”

    “아유. 늙기는요. 그런 말씀 마세요. 사부인. 겸손이 너무 과하시다. 저야말로 신 서방이 왜 이렇게 잘생겼나 했더니 외탁을 해서 그런 거였네요. 아주 어머니를 꼭 빼닮았어요.”

    그러다 아차 싶은 얼굴로 현철을 본다.

    “아, 물론 사돈어른도 인물이 훤칠하십니다.”

    부랴부랴 칭찬을 덧붙여놓고 경애는 순간 아차 싶었다. 푼수같이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싶었다.

    ‘교양 없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입을 제 손으로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서 있는데 시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의 의미를 몰라 눈썹을 들어 올리며 눈을 굴리는데 현철 또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호쾌한 분위기가 경애의 어색함을 단숨에 물리쳐주었다.

    “인사는 이쯤 하고 이제 다들 자리에 앉으시죠. 애들 배고프겠습니다.”

    때맞추어 수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리자 모두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

    상견례 분위기는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좋았다.

    푼수 이미지가 박히면 어쩌나 했던 처음 걱정과는 달리, 긴장이 풀어진 경애는 가게 이야기를 맛깔나게 풀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진상 손님이 나가고 나서 다신 오지 말라고 소금을 문밖에다가 촥- 뿌리는데, 세상에 그 손님이 뭐 놓고 갔다고 다시 돌아오다가 그 소금을 맞은 거예요, 글쎄!”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어머. 어쩜 좋아.”

    책을 좋아하는 현철은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들었고 전업주부라 집에서만 생활하던 시연 또한 경애의 이야기를 재밌게 들어주었다.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경애의 만담은 빛을 발했다.

    선혜는 처음에 그런 경애를 보고 난감해하는 듯싶었으나 시연과 현철의 긍정적인 반응에, 그리고 다정히 손을 잡아 오는 태준의 손길에 마음을 놓았다. 새삼스럽게 엄마가 이렇게 말을 재밌게 하는 사람이었나 싶기도 했다.

    자기가 너무 그동안 말을 안 받아줬나. 과거를 되새기다 무미건조하게 반응하던 자신이 떠올랐다.

    괜히 엄마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이 짠하기도 하여 길게 경애를 바라보는데 경애가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았다. 다소 의아하게 바라보는 경애에게 살짝 미소 지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리는 때였다.

    “근데 두 사람 합가는 언제쯤 해?”

    선혜와 태준이 동시에 멈칫했다. 경애의 질문에 시연과 현철도 답이 궁금한 모양새로 쳐다보았다.

    “합가가 뭐야, 엄마?”

    수호의 질문에 선혜 대신 시연이 답했다.

    “응. 엄마랑 아빠랑 수호랑 같이 사는 거.”

    수호가 눈을 반짝이며 선혜와 태준은 번갈아 쳐다보았다.

    선혜와 태준이 눈만 굴리며 대답을 하지 못하자 시연이 물었다.

    “둘이서 아직 얘기 안 해 본 거야?”

    “엄마.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수호도 곧 학교 들어가는데 학교 가기 전에는 마무리 지어야지, 아들.”

    “그래. 네 엄마 말이 맞다. 할 게 산더미일 텐데.”

    현철까지 덩달아 재촉하자 선혜와 태준이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나선 건 선혜였다.

    예의 바르게 미소 지은 선혜가 어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저희가 아직 거기까지는 얘기를 못 해서요. 상의하고 말씀드릴게요.”

    태준이 동의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가 어른들도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혜의 말에 수긍하였다.

    어느덧 코스 요리는 막바지에 이르러 디저트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디저트를 맛있게 먹는 수호에게 어른들이 자신의 디저트를 양보하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상견례는 무사히 마무리 지어졌다.

    *

    상견례가 끝난 뒤 경애는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좋은 분들이어서 다행이야.’

    경애는 부잣집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품고 있었다. 가진 돈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인성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연과 현철에게서는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남을 배려하는 따듯한 인품을 지닌 사람들. 그리고 가족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재력을 떠나 선혜를 보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집안이었다.

    ‘선혜가 시집을 가는구나.’

    상견례까지 하니 비로소 실감이 난다.

    선혜가, 결혼을 한다.

    미혼모 센터에서 재회한 날 선혜를 안고 울면서 제 탓을 했던 때가 떠올랐다.

    ‘엄마가 미안해, 선혜야.’

    그때 사과한 이유는 미혼모가 된 선혜를 보자 못난 자신의 팔자를 대물림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겠다.

    선혜는 행복할 것이었다.

    한 남자에게, 시부모님에게 진득한 사랑을 받으며 그렇게 앞으로 살아가겠지.

    자신과는 다르게 말이다.

    “수호야. 할머니가 우리 수호 주려고 집에 선물 잔뜩 사다 놨는데. 할머니 집 갈까?”

    “네, 좋아요!”

    수호의 솔직한 반응에 모두 웃었다.

    수호가 태준의 본가에 간다고 하니 당연하게도 선혜와 태준의 발걸음도 그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한 발 내딛던 선혜는 순간 경애가 떠올라 멈칫 섰다. 돌아보니 경애는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홀로 서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가자고 하고 싶은데 제집이 아니니 같이 가자고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엄마를 혼자 빼놓고 가기도 뭐하고.

    난감해하고 있는 때였다. 선혜의 표정을 살피던 태준이 눈치껏 빠르게 행동하였다.

    “장모님도 같이 가시죠.”

    경애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이제 저녁 준비하러 가게에 돌아가 봐야 해.”

    “같이 가시면 좋을 텐데.”

    시연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경애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시연과 현철은 다음을 기약하며 수호의 손을 잡고 차로 향했다.

    선혜와 태준은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아 서 있다가 경애를 향해 다가갔다.

    선혜와 태준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경애가 말했다.

    “두 사람도 얼른 가 봐. 나 진짜 가게에 가 봐야 해. 늦으면 춘희가 잔소리한다고.”

    때마침 춘희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이것 보라며 핸드폰을 내보이자 선혜도 태준도 할 말이 없었다.

    “엄마, 조심히 들어가. 차 카센터에 맡기고.”

    “알겠어. 얼른 가 봐.”

    선혜는 마지못해 돌아섰다. 태준이 그런 선혜의 손을 잡아주었다. 다정하게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던 경애도 이내 몸을 돌리며 춘희의 전화를 받았다.

    “어, 지금 끝나고 가. 벌써 바빠?”

    - 아뇨. 바쁘긴요. 아휴. 오늘따라 주말답지 않게 왜 이렇게 한가한지 모르겠네?

    경애는 고개를 갸웃했다. 춘희의 말과는 달리 전화기 너머에서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토요일 점심은 늘 예외 없이 바쁘곤 했다.

    - 사장님 오늘 상견례 해서 피곤하실 텐데 휴가 쓰시죠? 가게는 제가 잘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게다가 춘희의 목소리 톤과 말투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아무리 선의의 거짓말에 탁월하다 할지라도 연륜에서 비롯된 경애의 눈치를 피하긴 어려웠다.

    경애는 춘희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따져 묻는 대신 말했다.

    “알았어. 마무리 잘하고.”

    - 네. 푹 쉬세요!

    힘차게 말하는 춘희의 목소리에서 안도가 십분 느껴졌다.

    경애는 통화를 마친 이후에도 한참 동안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자리에 서 있었다.

    곧 급하게 큰길로 발걸음을 옮긴 경애는 손을 뻗어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손님?”

    가게 주소를 말하려던 경애는 순간 백미러에 비치는 자신의 차림새를 보고 멈칫했다. 잠깐 갈팡질팡하던 경애는 입을 열었다.

    “00 사거리요.”

    경애의 가게가 있는 주소였다.

    매도 빨리 맞는 법이 낫다고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빨리 확인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

    “휴.”

    경애와의 통화를 마친 춘희는 푹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못마땅한 눈으로 가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기용으로 마련된 벤치 위에는 석주가 앉아 있었다.

    석주가 온 건 열두 시경.

    ‘사장님 계세요?’

    바빠지기 시작한 시간대에 찾아온 그는 다짜고짜 경애를 찾았다.

    ‘사장님 안 계시니까 얼른 나가세요.’

    ‘어디 갔는데요?’

    ‘그건 아저씨가 아실 필요 없고요. 나가세요. 아, 나가시라구요!’

    석주는 춘희의 성화에 못 이겨 순순히 나가는가 싶었으나 가게 앞에 망부석처럼 서 있기 시작하였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바라보았지만, 석주를 멀리 쫓아낼 시간조차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손님들이 많은데 괜히 소란을 일으킬 수 없었으므로.

    금방 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웬걸.

    벌써 두 시간 째 저러고 있다.

    이제 손님도 별로 없기에 쫓아낼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춘희는 두 팔을 둥둥 걷어붙이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미간을 좁히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석주가 춘희의 기척을 따라 돌아보았다.

    “이제 좀 가시죠, 예?”

    석주는 입을 꾹 다물고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춘희는 기가 막힌 얼굴로 쳐다보다가 물었다.

    “우리 사장님은 왜 찾으시는 건데요?”

    “할 말이 있어서요.”

    “할 말이요? 무슨 할 말.”

    석주는 다시금 입을 고집스럽게 다물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선혜였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더니.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는 때였다.

    가게 앞 큰 길가에 택시가 한 대 와서 섰다. 둘은 동시에 택시 쪽을 바라보았고, 택시에서 내리는 경애를 보자 춘희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사, 사장님.”

    택시에서 내린 경애는 석주를 보자마자 얼굴을 굳히고 자리에 멈춰 섰다. 석주는 표정 없는 얼굴로 경애를 보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석주는 재회한 이후로 처음으로 경애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고 있었다. 경애는 그런 석주의 속을 가늠하기라도 하듯 석주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서 둘을 바라보는 춘희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경애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시선을 피한다.

    “그게…… 갑자기 오셔서 사장님을 찾으시길래 없다고 가라고 했는데도 영 가시지를 않아서. 지금 제가 한 번 더 가라고 말씀드리던 참이었어요.”

    말을 마친 춘희는 원망스레 석주를 흘겨보았다.

    춘희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경애의 시선이 다시금 석주에게 향했다.

    “여긴 왜 왔어?”

    “할 말이 있어서.”

    “할 말? 왜. 나한테 말 못 했던 잘못이 더 있기라도 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경애는 석주가 하려는 말이 저번과 다른 종류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잘못을 고백하러 온 저번과는 태도가 달랐으므로.

    역시나 석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입을 꾹 다물고 쳐다보는 표정에서 얼핏 주저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잠시뿐. 이윽고 비장하게 변한다.

    결심한 듯 바라보는 눈빛이 단단하였다. 석주답지 않게.

    ‘얘가 왜 이래.’

    어째 불안하다 싶은 찰나, 석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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