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72화 (72/109)
  • #72. 상견례

    월요일 아침. 회의를 앞두고 선혜는 전보다 일찍 커피 심부름을 하러 카페에 내려왔다. 카페에는 아침잠을 깨우기 위해 커피를 테이크아웃하러 온 사원들이 여럿 있었는데 개중에는 형주와 성균도 있었다.

    카페 카운터에 다가간 선혜가 형주와 성균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좋은 아침이야 선혜 씨. 오늘은 회의 때문에 아침부터 커피 심부름이야?”

    “네.”

    대답하자 주문을 마친 형주와 성균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직 출근 전인 건지 오늘이 휴무인 건지 고은은 카페에 없었다. 보다 편한 마음으로 매니저에게 커피를 주문하고 테이크 아웃 카운터에 섰다.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저를 빤히 쳐다보는 형주와 성균,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는 것이 영 수상쩍었다. 나온 음료를 홀짝거리면서도 저를 힐끔댄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선혜가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형주와 성균은 동시에 화들짝 놀랐다. 성균은 마시던 커피가 목에 걸렸는지 기침을 해댔다.

    “아, 아냐. 할 말은. 아휴, 우리도 회의 시간 다 됐네. 얼른 가자, 임 대리.”

    “아, 네. 과장님. 가야죠, 회의.”

    각본을 읽듯 딱딱한 대화를 어색하게 주고받은 둘은 곧 자리를 떠 버렸다. 의아하고 꺼림칙한 눈으로 두 사람이 나간 문 쪽을 바라보는데 태준이 카페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카페에는 다른 직원들도 있었다. 해서 그를 향해 묵례만 까딱해 보이는 때였다.

    “점심 누구랑 먹어요?”

    선혜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태준이 자신한테 말을 건 게 맞나 싶었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자 아직 카페를 나가지 않은 다른 직원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태준은 직원들이 있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점심 약속 없으면 나랑 먹죠.”

    “태준 씨.”

    선혜가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말렸다.

    “신경 안 써도 돼요.”

    태준이 주위에 있는 직원들을 휘 둘러보았다. 다들 태준과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태준이 입을 열었다.

    “소문이 나서.”

    직원들이 동시에 움찔하고, 태준이 선혜를 보며 싱긋 웃었다.

    “어차피 다들 안다던데.”

    선혜가 그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주위를 둘러보자 태준의 말이 맞는 듯 서슴없이 점심 약속을 잡는 두 사람을 보고도 다들 생각만큼 놀란 것 같진 않았다. 그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

    이미 알고 있었고, 다만 눈앞에서 확인받은 것 같은 태도들이었다.

    태준의 눈치를 보던 직원들이 하나, 둘 카페를 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카페에는 선혜와 태준 둘만이 남았다.

    “점심, 같이 먹을 거죠?”

    어안이 벙벙하던 선혜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선혜가 놀라는 건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김지민 대리가 또 괴롭히면 말해요.”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태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다 아는 수가 있죠.”

    정수기에 팔을 걸친 그가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심하게 괴롭혀요?”

    “그런 건 아니고. 일 몇 개 넘기는 정도?”

    “아아. 일 몇 개.”

    느긋하게 읊조리는데 눈빛이 제법 위험했다. 당장이라도 자를 기세다.

    선혜가 서둘러 말했다.

    “나서지 마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흠. 봐서요.”

    태준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선혜가 그런 태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근데 김형주 과장님이랑 임성균 대리님 방금 좀 이상하던데.”

    “아, 그거요.”

    머쓱한 표정으로 얼굴을 긁적이는 태준을 보는 선혜의 눈이 가늘어지는 때였다.

    “나, 말해 버렸어요.”

    “뭘요?”

    태준이 해맑게 웃었다.

    “수호가 우리 아들이라는 거.”

    선혜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저절로 손이 올라가더니 퍽! 태준의 어깨를 내리친다.

    “아야, 왜 그래요? 어차피 곧 다들 알 텐데.”

    “아니, 그래도……!”

    한 대 얻어맞았는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태준은 실실거리고 있었다.

    선혜는 어이없는 얼굴로 태준을 보다가 그를 흘기고는 옆을 스쳐 지나갔다. 태준은 맞은 어깨를 어루만지며 나간 선혜의 뒷모습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

    회의실. 각 팀원의 자리 앞에 커피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은 선혜는 얼얼한 손바닥을 가만히 응시하였다.

    ‘너무 세게 때렸나.’

    뒤늦게 과민반응했나 싶었다.

    다들 알면 어떠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장 상견례가 이번 주였다. 짐작하건대 어렵지 않게 결혼이든 합가든 결정될 터. 그리고 계속 일하다 보면 언젠가 수호의 사진이든 실물이든 동료들에게 보여주는 날이 올 것이다.

    어느덧 일한 지 반년이 다 되어가는데 지금까지 사진 한 장 안 보여준 게 용하달까.

    그래. 어차피 알게 될 거. 만인이 알게 된 것도 아니고 태준이랑 친한 두 사람뿐인데 뭐 어떠랴 싶었다.

    그나저나 사귄다는 소문은 어떻게 난 거지? 조심한다고 했는데. 소문의 출처가 어딘지 몹시도 궁금했다.

    짚이는 바가 있어 선혜는 고개 들어 지민 쪽을 쳐다보았다. 브런치 카페에서 태준과 자신을 못 봤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자기 생각일 뿐. 워낙 탁 트인 곳이었기에 지나가는 모습을 들켰을 수도 있었다.

    핸드폰을 붙들고 실실거리던 지민이 시선을 느꼈는지 선혜 쪽을 쳐다보았다. 얼굴에 드리워진 웃음기를 거짓말처럼 싹 지우고 새침하게 쳐다보더니 슬쩍 핸드폰을 덮는다.

    한편 기주는 지민과 선혜를 번갈아 힐끔거리다가 앞에 놓인 핸드폰 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바라보는 시선에 약간의 난감함이 섞여 있다.

    회의 들어오기 직전 태준이 메시지를 보냈었다.

    [팀장님. 김지민 주임이 선혜 씨한테 일 넘긴다는데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웃음 웃음은 대체 뭔지. 안 보내느니만 못하다. 더 무섭잖아.

    기주는 한숨을 내쉬고 회의 들어오기 직전에 그간의 업무 보고서를 훑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회의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말이야.”

    다들 의아한 얼굴로 기주를 바라보았다.

    “우리 다음부터 야근할 거면 다 같이 사이좋게 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

    지민이 선혜 쪽을 흘기다가 기주에게 말했다.

    “굳이 뭐 하러……. 업무 서툴면 야근도 하고 그러는 거죠.”

    “후배가 부족하고 서툰 만큼 우리 선배들이 도와주는 아량을 베풀어보자, 이거지.”

    기주가 장난스레 어깨를 펴고 넓어진 가슴께를 툭툭 쳤다.

    “물론 그 선배 중에는 나도 포함일 테고.”

    입은 활짝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제법 냉랭했다. 그의 시선은 말을 하는 내내 줄곧 지민에게 꽂혀 있었다.

    지민은 그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깔며 마른 입을 축이기 위해 커피를 마시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 뜨거!”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눈빛이 선혜를 향했다. 선혜는 무감한 눈으로 지민을 보고 있다가 물었다.

    “찬물이라도 떠다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지민은 묵묵히 손등으로 입술을 눌렀다. 지민의 옆에 있던 민영이 주의를 시키듯 무릎으로 지민을 툭 쳤다. 깨갱 하며 주눅 드는 것도 잠시, 선혜를 보는 눈빛이 또 앙칼져졌다. 선혜는 모르는 척 눈을 피했다.

    그날 회의 이후로 선혜에게 일거리가 더 얹어지는 일은 없었다.

    지민이 선혜를 몰래 째려보는 일은 더 많아졌지만 말이다.

    이대로 괜찮을까 싶었지만, 불안도 잠시뿐. 상견례가 가까워지며 선혜는 불안감을 잊었다.

    *

    상견례 당일. 경애는 전에 없는 차림새로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괜찮나.”

    중요한 날이니만큼 신경을 쓰긴 했는데 괜찮은지에 대한 확신이 잘 서지 않았다. 아마도 이렇게 꾸민 게 오랜만이어서 그런지도.

    어제 미용실에서 새로 한 머리와 오랜만에 한 화장도 어색하기만 했다. 무엇보다도 입고 있는 옷은 더욱 그러했다.

    경애가 입고 있는 분홍빛 투피스는 춘희가 백화점에 끌고 가 골라준 옷이었다.

    자신의 안목을 믿으라며 당당히 말했던 춘희의 말을 믿고, 덩달아 백화점 직원의 칭찬에 넘어가 산 옷인데 이제 와서 보니 너무 화려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냥 다른 거 입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뿐.

    “어머, 내 정신 좀 봐.”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는지. 출발 시각이 임박해 있었다. 경애는 가방을 챙겨 서둘러 마당을 가로질러 나왔다. 그리고 곧장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데.

    어라.

    “이거 왜 이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 탈탈거리더니 가라앉기를 여러 번. 어느 순간부터는 시동이 걸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왜 이래, 정말.”

    급해 죽겠는데. 경애는 혀를 짧게 차고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구두를 신으니 언덕길이 새삼 아찔하게만 느껴졌다. 경애는 한숨을 푹 내쉬고 조심조심 언덕길을 내려갔다.

    갈수록 조심성보다는 조바심이 앞섰다. 타다다다 아슬아슬 언덕길을 내려가는 때였다. 어느 순간 갑자기 발목이 휙 꺾였다.

    “어맛!”

    경애의 몸이 순간 휘청이는 때였다.

    누군가가 경애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덕분에 넘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경애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를 빤히 쳐다보는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했다. 순간적으로 흠칫하는데 남자가 씩 웃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 네.”

    경애는 황급히 팔을 뺐다. 경애의 팔을 꾹 잡고 있던 남자는 순순히 팔을 놔 주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온통 검게 입은 그의 옷차림을 훑어내리던 경애는 시선을 올리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퍼뜩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살짝 머리를 숙여 보인 경애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발목을 삐는 불상사는 면하여 걷는 데 무리는 없었다. 아까보다 조심조심 걸어가는 때였다. 문득, 쎄한 느낌에 경애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경애의 팔을 잡아 부축해준 남자가 그 자리에 서서 경애를 쳐다보고 있었다.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다 이내 걸음을 옮긴다. 경애는 자기도 모르게 재킷에 감싸인 팔을 손으로 문질렀다.

    “……기분 나쁜 사람이네.”

    돋아난 소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

    다행히도 경애는 늦지 않게 상견례에 도착하였다. 허겁지겁 도착한 경애는 오자마자 물을 찾았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데 와 닿는 시선들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선혜도, 태준도, 수호도 반짝이는 눈으로 경애를 보고 있었다.

    “……왜 그래?”

    “할머니. 진짜 예뻐요.”

    수호가 엄지를 척하니 들어 올렸다.

    예쁘다는 말이 여자에게 가장 큰 칭찬인 건 노소 무관한 법. 수호의 솔직한 칭찬에 당황함도 잠시 경애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춘희 언니가 옷 잘 골라 줬다, 엄마. 진짜 잘 어울려.”

    “그래? 너무 화려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태준이 손사래를 치며 끼어들었다.

    “아뇨. 전혀. 진짜 잘 어울리세요. 장모님. 너무 어려 보이셔서 선혜 씨 어머니가 아니라 언니라고 해도 믿겠어요.”

    “호호. 신 서방도 참.”

    경애가 소녀처럼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선혜가 뒤늦게 경애에게 물었다.

    “근데 왜 그렇게 허둥지둥 왔어? 오다가 무슨 일 있었어?”

    “아, 그게. 차가 고장 나서 시동이 안 걸리지 뭐니. 부랴부랴 내려와서 택시를…….”

    아까 일을 회상하는데 자신의 팔을 붙들어준 남자가 팟 하고 떠올랐다. 저를 보던 까만 눈동자. 말을 하던 경애의 표정이 별안간 경직되자 선혜가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 왜 그래?”

    경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아냐. 아무것도.”

    다소 어두워진 경애의 얼굴을 본 선혜가 물었다.

    “오다가 아버지라도 만난 거야?”

    경애가 손사래를 쳤다.

    “아냐. 그런 거. 늬 아버지 그날 이후로 코빼기도 못 보니까 걱정하지 마.”

    선혜가 경애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지만,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든 걱정은 괜한 노파심이었을까. 선혜 또한 더 이상 자신을 쫓아다니는 기색을 느끼지 못했다.

    근데 왜 이렇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기분이 묘해지는 건지. 갑작스러운 등장과 부재에 대한 후유증이라도 되는 걸까.

    괜히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물 한 모금을 마시는 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 문이 열렸다.

    열린 문 너머에는 시연과 현철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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