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잡았다
끼익!
바퀴가 바닥에 쓸리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급정거의 반동으로 앞으로 기울었던 몸이 등받이에 턱 하니 부딪혔다.
입 밖으로 거친 숨이 몰아쉬어 지고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사이드미러에는 더는 주차장 기둥이 비치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가오는 시선이 피부로 느껴졌다. 시선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다가오는 착각마저 일었다. 다시금 깜박거리는 불빛에 선혜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한시라도 빨리 여길 벗어나야 해.
핸들을 꽉 움켜쥔 선혜는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주차장 출구를 향하는 나선형 길을 달리는 그 짧은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주차장을 나오자마자 선혜는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자꾸만 들러붙는 음습한 느낌을 떨쳐내기라도 하듯이.
*
태준은 수호와 함께 만화 카페 건물을 나서고 있었다. 수호의 손에는 초콜릿과 슈가 파우더가 듬뿍 뿌려진 츄러스가 들려 있었다. 반지의 존재를 함구하는 조건으로 태준이 준 뇌물이었다.
“맛있어?”
입가에 초콜릿과 슈가파우더가 묻은 얼굴로 수호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태준이 입가를 닦아주자 먹어보라며 내밀었지만, 태준은 괜찮다며 손짓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을 때 길에 서 있는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차. 선혜의 차였다.
“수호야. 엄마 오셨다.”
태준이 가리킨 방향을 본 수호가 눈을 빛내면서 곧장 차를 향해 다가갔다. 태준은 수호의 손을 잡은 채 운전석으로 향했다. 운전석 앞에 도착한 태준은 몸을 기울여 차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선혜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답지 않게 다소 멍해 보였다.
‘야근해서 많이 피곤한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창문을 노크하는 때였다.
선혜가 화들짝 놀라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놀라는 선혜의 얼굴을 태준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태준을 알아본 선혜가 안도하는 얼굴로 숨을 길게 내쉬더니 운전석 문을 열고 나왔다.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
“아니에요. 미안하긴요.”
“엄마. 많이 힘들었어?”
수호가 선혜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선혜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선혜의 모습을 지켜보던 태준이 제안했다.
“운전 내가 할까요? 많이 지쳐 보이는데.”
괜찮다고 하려던 선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의 일 때문에 사이드미러를 볼 때마다 긴장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꾸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고.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수호랑 뒤에 타요.”
고개를 끄덕인 선혜는 수호와 함께 뒷좌석에 올라탔다.
태준은 차창 너머로 비치는 선혜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집으로 가는 내내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던 수호는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잠이 들었다.
선혜는 제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이 든 수호의 머리칼을 잠잠한 손길로 쓰다듬고 있었다.
시선은 창밖을 향하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찾는 듯 배회하는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했다. 태준은 운전하면서 백미러를 통해 걱정스럽게 선혜를 보고 있었다.
곧 차가 선혜의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차가 도착했는데도 선혜는 선뜻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태준이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눈이 마주쳤다. 마주친 선혜의 까만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선혜는 황급히 태준의 시선을 피하고는 수호를 깨우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수호야. 집 다 왔는데.”
그런데 생각보다 깊이 잠든 수호는 쉽게 깨지 못했다. 웅얼거리며 더욱 선혜의 다리에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
“깨우지 말아요. 내가 안아서 데려다줄게요.”
“무거울 텐데.”
“무겁긴요.”
태준의 말에 선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에서 내렸다. 운전석에서 내린 태준은 수호를 번쩍 안아 들었다. 잠결에 수호가 태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곤히 잠든 수호를 데리고 지하주차장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데 선혜의 발걸음이 문득 멈춰 섰다. 태준의 발걸음도 덩달아 멈추었다.
멀지 않은 기둥 옆으로 한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모자를 쓴 젊은 청년이었는데 손에 든 스마트 폰을 보고 키득거리며 지나가다가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돌아보았다.
모자를 쓴 것만 같을 뿐, 나머지 옷차림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고 그러다가 뒤에 서 있는 태준과 부딪히고 말았다.
깜짝 놀라 돌아보는 선혜와 뭔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선혜를 바라보는 태준의 곧은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선혜는 다시금 태준의 눈을 피했다.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었지만, 핸드백 손잡이를 잡은 선혜의 손은 잔뜩 힘이 들어간 채로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태준은 그 모습을 눈에 담다가 말없이 선혜의 뒤를 따라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별말이 없었다. 잠든 수호를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비로소 선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잘 가라는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나 목마른데.”
태준이 말했다.
“차 한 잔만 하고 가도 돼요?”
선혜가 눈을 들어 태준을 보았다.
뭔가 눈치챈 얼굴. 맑은 다갈색 눈동자를 응시하던 선혜는 곧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태준은 이불을 고쳐 덮어주고 선혜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부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따듯한 레몬차가 놓여 있었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선혜가 입을 열었다.
“네.”
“저번에 누가 욕했다더니. 그 사람 때문이에요?”
선혜는 고개를 저었다. 태준의 의아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요?”
선혜는 대답 대신 차를 한 잔 머금었다. 찻잔을 감싼 선혜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잠자코 지켜보던 태준이 손을 내밀어 선혜의 손을 감싸주었다. 태준의 온기와 듬직한 눈빛에 불안하게 흔들리던 마음이 차츰 진정되었다.
“아까 퇴근을 하는데.”
떠올리기만 해도 두려워 선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누가 날 지켜보고 있었어요.”
태준의 얼굴이 굳었다.
“누가요?”
“모르겠어요. 얼굴을 제대로 못 봐서…….”
태준이 선혜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자세히 말 해 봐요.”
선혜가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찬찬히 입술을 뗐다.
“퇴근하려고 주차장에 갔는데 어떤 남자가 있었어요.”
말을 하는 선혜는 전혀 초연하지 못했다.
“그 남자가 날 몰래 쳐다보고 있었어요. 처음엔 헛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그러길 바랐는데.
“아니었어요.”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등줄기로 소름이 돋아났다.
“얼굴 봤어요?”
“아뇨. 모자를 써서…….”
“모자요?”
순간 태준의 머릿속에 경애의 가게 근처를 배회하던 수상한 남자가 떠올랐다.
설마 같은 사람일까?
확인이 필요했다.
“문단속 단단히 하고 있어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말을 마친 태준은 그대로 선혜의 집을 나섰다.
*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태준은 곧바로 선혜의 차에 달린 블랙박스를 확인했다. 하지만 오가는 사람 중에 선혜가 말한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회사 지하주차장도 마찬가지.
남자는 벌써 자리를 떴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서 있었다는 기둥 근처를 살펴도 마찬가지. 그러다 주차장 천장에 자리한 CCTV를 보던 태준은 곧장 경비실로 향했다.
“CCTV요?”
다짜고짜 찾아와 묻는 태준에게 경비가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네. 좀 볼 수 있을까요?”
일반 회사원도 아니고 본사 회장 막내아들이기에 경비는 기꺼이 태준을 경비실로 들였다.
태준은 선혜의 차가 주차되어 있던 지하 2층 주차장의 저녁 여덟 시 경 CCTV 화면을 요구했고 경비는 시간에 맞추어 CCTV 영상을 보여주었다.
CCTV 영상 속에는 선혜의 뒷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차 열쇠를 떨어뜨리고, 줍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기둥 쪽을 살핀다.
선혜의 말마따나 기둥 뒤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검은 모자를 쓴 남자였다.
너무 작게 보여 나이와 체격 등이 제대로 가늠이 되지 않았다. 블랙박스 영상을 얻기도 어려웠다. 남자가 나타난 시간대에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차는 없었으니까.
“다른 각도로 찍은 건 없어요?”
“다른 각도면…… 아, 여기 있네요.”
경비가 다른 화면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남자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심각한 얼굴로 화면을 보고 있던 태준은 경비를 향해 말했다.
“이거 CCTV 파일 좀 가져갈 수 있을까요?”
“네, 뭐. 그러세요.”
다음으로 태준이 향한 곳은 경애의 국밥집이었다.
국밥집 입구 쪽에는 CCTV가 하나 달려 있었다. 경애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CCTV 영상이라도 얻으려고 했던 태준은 불이 꺼져 있는 가게를 보고 낭패감 짙은 표정을 지었다.
쉬는 날이신 것 같은데. 연락해도 되려나. 이 늦은 시간에?
어느덧 시간은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태준은 낮게 한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들어 경애의 가게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뒤늦게 깨달았다. 여기 이곳이 저번 그 남자가 서 있던 곳이라는 사실을.
오늘 선혜가 주차장에서 본 남자와 저번에 여기 있던 사람이 같은 인물일까?
하지만 같은 인물이라 해도 의문이었다.
왜 둘 모두한테?
무슨 목적을 가지고?
답이 나오지 않아 골몰하는 때였다.
가게 앞으로 다가서는 누군가가 포착되었다.
검은 모자에 검은 상·하의를 입은 한 남자.
태준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저 사람이다.’
남자만 바라보며 발걸음을 내딛던 태준은 빠앙하는 클랙슨 소리에 뒤로 주춤 물러났다. 신호가 아직 빨간 불이었음을 태준은 그제야 깨달았다.
태준은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
같은 시각.
춘희와 경애는 장을 보고 가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장만 보고 오려고 했는데 춘희가 방어 회에 소주 한 잔만 하고 가자고 조르는 통에 횟집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햐. 밤공기 너무너무 좋다!”
술에 취해 고양되었는지 춘희가 허공에다가 소리쳤다. 경애는 곁눈질하면서도 웃어버리고 말았다.
“우리 사장님, 요새 기분 엄청 좋아 보이시네요?”
보통 때 같으면 같이 장을 보면서도 술 한잔하자는 춘희의 제안을 거절했을 경애였다. 맥주는 몰라도 소주는 잘 입에 대지 않았으니까.
“기분 좋지, 그럼.”
“선혜 시집 보내는 게 그렇게 좋아요?”
경애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선혜는 참 복도 많은 것 같아요. 그렇게 훤칠한 남편에 빵빵한 시댁이라니.”
“그러게.”
경애는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선혜가 태준의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는 말에 노심초사했었는데. 좋은 분들이라 참 다행이었다.
“우리 사장님도 슬슬 새 시작 하셔야죠.”
춘희의 말에 경애가 눈살을 찌푸리며 춘희를 돌아보았다.
“넌 아주 틈만 나면 새 시작 하라고 성화더라? 나 그럴 생각 없다고 대체 몇 번을 말하니?”
“선혜 시집가고 나면 우리 사장님 외로울까 봐 그러죠. 사장님 댁 혼자 살기에 너무 넓어서 휑하기도 하고.”
“됐어. 새 시작 할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자꾸 말 꺼내지 마.”
질색하는 경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춘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에요, 사장님. 선혜 아빠랑 재회하게 되면 어떨 것 같아요?”
경애가 춘희를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그건 왜 물어?”
“아니 그냥. 선혜가 애 아빠 다시 만나서 잘 되는 거 보니까 우리 사장님도 만약 그럴 기회가 오면 어떨까 싶어서요.”
“재회해도 그럴 일 없다.”
“왜요? 그래도 애까지 낳은 사이인데 미련 없으세요?”
“지나간 세월이 얼만데. 있던 미련도 증발해 버린 지 오래야.”
경애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춘희가 물었다.
“그럼 만약에 우연히 재회하게 되어도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실 거예요?”
“아니.”
의외의 말에 춘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련 없으시다더니?”
“미련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만나면 할 얘기가 좀 있거든.”
“할 얘기요?”
“물어볼 게 좀 있어서.”
“뭔데요?”
경애는 대답 해주지 않았다. 종알종알 묻던 춘희는 경애가 끝끝내 대답하지 않자 조용히 입을 비죽이며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가게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런데 불 꺼진 가게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검은 모자를 쓴 초라한 차림새의 남자 하나. 모자를 푹 눌러 썼음에도 춘희는 남자를 곧장 알아보았다. 춘희가 비장하게 눈을 빛내며 경애에게 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넘겼다.
비스듬히 땅을 보고 걷고 있던 경애는 얼결에 장바구니를 받아들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춘희를 쳐다보았다.
“사장님. 잠깐 짐 좀 맡아줘요.”
말을 마친 춘희가 두 팔을 둥둥 걷어붙였다. 심상치 않은 춘희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던 경애는 춘희의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가게 앞에 서 있는 키가 큰 남자 하나를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저 사람은?”
왜 불 꺼진 가게 앞에 서성거리지? 도둑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 사이 춘희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그것도 잠시뿐. 이내 쏜살같이 남자를 향해 달려간다.
“쟤, 쟤가 지금 뭐 하는 거야?”
경애가 놀라 소리침과 동시에 남자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사색에 잠겨 있던 남자는 춘희를 보더니 기겁을 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거기 서라!”
춘희가 여장군처럼 소리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벌어진 추격전에 행인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쫓고 쫓기는 둘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난처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다 바짝 쫓아온 춘희를 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 택시라도 잡아타서 도망가기 위해 갓길을 향해 달려갔다. 택시 뒷좌석 문을 막 열어젖히는 그때였다.
탁.
길을 건너 달려온 누군가가 차 문을 도로 밀어 열리려던 문이 도로 닫혔다. 남자는 뻣뻣하게 굳어 옆을 돌아보았다. 매섭게 빛나는 다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 맞죠, 스토커?”
남자가 그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때였다.
춘희가 날쌔게 달려들었다.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