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63화 (63/109)

#63. 그림자

모처럼 차려 입은 게 아깝다며 태준은 셋이서 좀 더 시간을 보내기를 제안했다.

때마침 눈에 띄는 공원이 있었다. 선선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공원이라도 산책할까 했지만 공교롭게도 주말을 맞이하여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원이 태준의 오피스텔 근처라는 사실.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차를 두고 내리는 때였다.

“여기가 아빠 집이에요?”

“응. 온 김에 구경이나 시켜줄까?”

태준이 선뜻 제안하자 수호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혜는 손을 잡고 앞서 걷는 두 남자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그리하여 도착한 태준의 오피스텔. 신발을 벗으며 들어서자마자 수호가 말했다.

“아빠 냄새 나요.”

“그래?”

“응.”

수호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선혜는 구두에 혹사당한 발을 쉬게 할 겸 거실 소파에 가서 앉았고 태준은 수호를 데리고 이리저리 오피스텔을 구경시켜 주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몸을 지그시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는 때였다.

“우와! 짱이다!”

수호의 감탄 어린 목소리에 선혜가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서재 쪽이었다.

좀처럼 감탄하지 않는 수호임을 알기에 선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걸음 들어선 선혜는 수호만큼이나 눈을 커다랗게 떠 보였다.

“이게 다 뭐예요?”

서재 한쪽 벽에 잔뜩 쌓여 있는 장난감들.

“수호 주려고 산 거예요.”

태준이 장난감을 하나하나 수호에게 보여주었다. 선혜도 태준이 수호에게 장난감을 구경시키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조금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화감이 들기도 했고.

수호는 블록이나 로봇 같은 실내에서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을 좋아하는 거로 아는데. 서재에 쌓여 있는 장난감들은 죄다 실외에서 가지고 놀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각종 구기 종목의 공들과 배드민턴 채, 연, 그리고 조종형 헬리콥터와 드론까지 있었다. 값비싼 장난감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드론은 선혜도 접해 본 적이 많지 않아 신기하여 구경했다.

“우리 이거 공원에 가지고 가서 놀까?”

태준의 제안에 수호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감을 두둑이 챙긴 세 사람은 오피스텔을 나서서 공원으로 향했다.

*

선혜는 벤치에 앉아 멀리서 태준과 수호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깨에는 태준의 재킷이, 무릎 위에는 수호의 재킷이 덮어져 있었다.

셔츠에 정장 바지, 옥스퍼드 구두까지 신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차림새에 국한되지 않은 채 재밌게도 놀고 있었다.

공을 주고받고, 배드민턴도 치고, 드론을 날리기까지. 드론이 촬영하는 화면을 보며 수호는 왼쪽 뺨이 보조개로 움푹 패도록 활짝 웃었다.

실내에서 로봇이나 블록을 가지고 놀 때는 결코 볼 수 없던 표정이었다.

수호가 밖에서 노는 걸 저렇게나 좋아하는 애였나.

근데 왜 지금까지 나가자고 조르지 않았지.

생각을 이어가다 불현듯, 확신에 가까운 짐작 하나가 가슴을 푹 찌르고 들어왔다.

‘설마 내 눈치를 본 건가.’

아파도 괜찮다고 하는 조숙한 아이였다. 그러니 재택근무를 하는 엄마의 상황을 배려하여 실내 놀이만 고수한 거로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직접 낳아 기른 게 무색하게도 수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한없이 아연했다.

그리고 자신이 놓친 부분을 알아채고 마음을 써준 태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선혜는 아이만큼이나 신이 나서 노는 태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조금 서툴지만 아빠 노릇을 하려 무던히도 애쓰는 그의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그 서툰 모습마저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엄마, 이거 봐!”

수호가 제 손으로 드론을 조종하며 선혜를 향해 외쳤다. 드론이 청명한 가을 하늘로 거침없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드론이 높이 떠오르는 것처럼 선혜의 마음도 붕 떠올랐다.

“우와. 멋지다, 우리 수호.”

모처럼 만에 선혜는 아이처럼 웃으며 감탄했다. 태준은 선혜의 웃는 얼굴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수호도 그런 태준을 돌아보며 뿌듯한 얼굴로 활짝 웃어 보였고.

하늘로 날아오른 드론이 촬영한 화면에는 행복한 세 사람의 모습이 담기고 있었다.

화창한 가을하늘 아래. 쏟아지는 햇살이 유독 찬란했다.

*

햇살이 환하고 찬란한 만큼 나무들이 우거진 곳의 그림자는 크고 짙었다.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공원의 구석에 누군가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검은 모자 너머의 음산한 눈동자 속에 태준과 수호,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혜의 웃는 얼굴이 담겼다.

해사하게 웃는 선혜를 보던 남자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래. 실컷 행복해하렴.

지금이야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겠지만 곧 너도 알게 될 거야.

가진 걸 다 잃은 그 절망감을. 그 좌절을.

왜냐. 너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내가 빼앗을 거거든.

네가 가장 행복한 그 순간에.

악의를 품고 눈을 형형하게 빛내던 남자는 제 존재감을 들키기 전 조용히 몸을 돌려 멀어졌다.

걸음걸음마다 짙은 그림자가 뒤따르고 있었다.

***

평일 저녁. 한 만화 카페.

커튼이 쳐진 작은 공간에 태준과 수호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손에는 똑같은 만화책을 든 채였다.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는 두 사람이 까먹은 과자와 음료수 따위가 널브러져 있었다.

책장을 넘기던 수호가 문득 고개 들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태준에게 물었다.

“엄마 많이 늦는대요?”

태준 또한 시간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게.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선혜는 야근 중이었다. 갑자기 야근하게 되었다며 수호를 태준에게 맡긴 선혜였다.

둘이서 밥을 먹고 선혜를 기다릴 만한 마땅한 곳을 찾다가 이곳을 보고 눈을 빛내는 수호를 데리고 곧장 들어온 터였다. 편하게 시간을 때우기에 이만한 곳이 없었다.

“엄마 배고프겠다.”

“걱정하지 마. 이 아빠가 다 챙겼으니까.”

수호가 태준을 돌아보았다.

“어떻게요?”

“저녁 거리 배달시켰거든. 괜히 컵라면 같은 거로 저녁 때울까 싶어서.”

오. 수호가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물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였다.

수호는 다시 만화책을 들여다보았다. 한 권을 다 읽은 태준은 책을 덮고 수호가 책을 다 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호가 읽는 책이 태준이 읽고 있는 만화의 다음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수호가 읽기를 기다리던 태준의 시선이 손목시계로 향했다. 시간은 어느덧 여덟 시를 넘기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어지네.’

선혜에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마지막으로 온 선혜의 메시지는 [끝나면 연락할게요.]였다. 괜히 업무에 방해될까 싶어 섣불리 연락할 수가 없었다.

선혜에게 연락할 수도 없고, 새 책을 가져오기는 또 귀찮고.

한가로이 누워 의미 없이 허공에 시선을 두는 때였다.

“근데 아까 그거요.”

아까 그거.

수호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태준은 금방 알아챘다.

“혹시 엄마 선물이에요?”

수호의 직설적인 질문에 태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태준이 수호를 유치원에서 픽업하여 이곳으로 오던 길. 무심결에 콘솔박스를 연 수호는 그 안에 든 작은 쇼핑백을 발견했다.

언뜻 보기에 안에는 작은 푸른색 벨벳 상자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수호가 그것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태준이 황급히 콘솔박스를 닫아버렸었다.

수상쩍기 그지없는 행동에 뭘까 고민하던 수호는 때마침 읽던 만화책 안에서 그와 비슷한 그림을 보았다. 만화책에서 나오는 박스 안에는 화려한 디자인의 반지가 있었다.

“반진가?”

태준이 질겁한 얼굴로 수호를 돌아보았다.

“야, 너는 무슨 애가 눈치가 그렇게 빨라? 너 일곱 살 맞아?”

수호에게 들킨 그 물건은 다름 아닌 프러포즈 링이었다. 어제 귀금속 가게를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반지였다. 로즈골드 바디에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디자인을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구매한 것이었다.

태준의 격한 반응을 보며 수호는 뿌듯한 얼굴을 했다. 퀴즈라도 맞춘 느낌이었다.

태준은 떨떠름한 얼굴로 수호를 보다가 말했다.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왜요?”

“서프라이즈니까.”

“……맨입으로요?”

태준이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수호가 키득거렸다. 어이없어 바라보던 태준은 허탈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뭐 해줄까. 맛있는 거 사 올까?”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영악하게 덤벼든 것에 비하면 소박한 요구사항이었다.

태준은 지갑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방을 나서려는 때였다.

띠링. 핸드폰이 울렸다.

[나 끝났어요.]

태준이 눈을 빛내며 수호를 돌아보았다.

“엄마 끝나셨대.”

수호가 반색하며 책을 덮고 발딱 일어났다. 둘은 그길로 만화 카페를 나섰다.

*

업무를 마친 선혜는 지친 얼굴로 사무실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한숨이 입 밖으로 절로 흘렀다.

디자인 팀에서 야근을 한 건 선혜 혼자뿐이었다. 바쁘게 일한 것도 선혜 혼자뿐이었고.

다들 느긋하게 일하다가 칼같이 퇴근했는데 선혜만 남았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주에 민영에게 보내려다 실수한 척 보낸 메시지 덕분이었다. 기주가 반차를 써서 없는 틈을 타 이런 수작을 부리다니. 화가 나다 못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앞으로도 기회를 틈타 이런 짓을 하겠지. 다시 한번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이런 순간을 숱하게 겪어 본 선혜는 안다. 감정이 앞서는 상황일수록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화가 나 씩씩거리는 대신 선혜는 차분히 대응 방안을 고민했다.

그러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어느덧 주차장이 있는 지하에 도착해 있었다.

주차장에는 선혜의 차만 홀로 주차되어 있었다. 휑한 적막 속에서 선혜의 구두 소리만 또각또각 울려 퍼졌다.

원격으로 차의 잠금장치를 풀고 운전석에 다가갔다. 그런데 운전석 문을 열다가 차 키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미끄러운 바닥 재질을 타고 차 키가 차 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오늘 무슨 날인가.’

나려던 짜증은 맥이 풀림에 그대로 가라앉았다.

선혜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무릎을 바닥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차 키를 향해 손을 뻗던 선혜의 눈에 주차장 기둥 옆에 서 있는 발이 들어왔다. 검은 운동화를 신은 발이.

아까 주차장에 누가 있었던가?

‘아무도 없었는데.’

선혜가 기억하기로는 분명 그랬다.

차 키를 손에 쥔 선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는 긴장이 잔뜩 서려 있었다. 몸을 일으키는 그 짧은 순간에 심장이 몇 배는 더 빨리 뛰는 착각이 일었다. 지하 주차장의 공기가 더없이 서늘하게만 느껴졌다.

조심조심 몸을 일으키던 선혜는 어느 순간 허리를 번쩍 들어 차 너머로 보이는 기둥을 응시했다.

하지만 기둥 옆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은 선혜의 기척을 빼고는 조용했다. 잠깐 전력문제가 발생했는지 등이 깜박거렸다. 괜히 등골이 오싹해졌다.

‘헛것이라도 본 건가.’

여름이 다 지나서 이게 무슨 일인지. 기분 나쁜 경험을 빨리 털어버리고자 선혜는 재빠르게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자꾸만 시동 버튼 위에서 미끄러졌다.

겨우 시동을 넣고 기어를 당겨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핸들을 돌리며 주차장 입구로 향하는 차가 기둥 옆을 서서히 지나쳤다.

기둥 뒷면이 서서히 드러났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오랜만에 무리해서 헛것을 보았나 보다. 별일이 다 있다며 안심하고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 때였다.

“……!”

무심코 사이드미러를 쳐다본 선혜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기둥 뒤에 서 있는 수상한 검은 그림자가 고개를 빼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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