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폭탄선언
퇴근 후. 선혜와 수호를 데리고 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태준은 폭탄선언을 했다.
“이번 주 주말이요?”
밥을 먹던 선혜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태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 주 주말.”
너무 이르지 않냐고 하려던 선혜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 이르지 않다. 오히려 늦었으면 늦었지. 어른들을 생각하면 하루 빨리 알려주는 것이 좋았다.
반응이 어떨지 몰라 주저하는 건 이미 두 번이나 해 보았다. 두 번 다 선혜는 후회했었다. 좀더 일찍 알려줄걸, 하고.
태준의 부모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렵긴 하지만 그래도 전처럼 머뭇거리기 싫었다.
결과가 어찌 됐든 간에 부딪혀는 봐야지.
“알겠어요.”
대신 신중하게.
선혜가 태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모님 뭐 좋아하시는 거 없어요? 뭐라도 사 가야할 것 같은데.”
“음. 그건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태준이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슬쩍 닦았다.
“수호 옷부터 사러 가요, 우리.”
“수호 옷이요?”
“저요?”
한참 밥을 먹고 있던 수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그날 네 역할이 제일 중요해, 수호야.”
“뭔데요?”
수호가 밥을 먹다 말고 태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선혜 또한 태준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태준이 손짓하여 세 사람은 작전을 공모하듯 테이블 위에서 머리를 모았다.
머리를 맞대고 속닥속닥. 그 모습이 어찌나 은밀한지 지나가는 직원들과 손님들이 한 번씩은 쳐다보았다.
태준이 덧붙이는 말을 끝으로 모아져 있던 세 사람의 머리가 천천히 떨어졌다.
선혜는 미간을 살짝 좁히고 있었다. 그건 수호도 마찬가지.
오직 태준만 여유롭고 당당한 얼굴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태준이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네.”
도톰한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
“괜찮을 테니까, 나만 믿어요.”
*
그날 밤. 선혜는 조금 심란하여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가 안방 옷장 앞에 놓인 커다란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쇼핑백 안에는 오늘 태준이 수호에게 사준 옷이 들어 있었다. 검은 정장 재킷에 검정 바지. 흰 셔츠와 체크무늬 멜빵. 그리고 빨간색 나비 넥타이.
그가 사준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던 수호와, 그런 수호를 만족스럽게 웃으며 바라보던 태준의 모습 또한 떠올랐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너무 귀엽고, 너무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으니까.
결과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뭐? 얘가 뭐라고?’
순간, 옛 기억이 칼날처럼 가슴속을 파고 들었다.
아버지인 석주와, 어머니인 경애의 손을 잡고 들어선 석주의 집.
석주가 어렵사리 꺼낸 진실에 경악하던 할머니의 얼굴.
‘누가 손녀라는 거야? 피 섞이면 다 손녀라디?’
격하게 부정했던 그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베갯잇을 꾹 움켜잡았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할 텐데.
그때의 자신처럼 수호가 상처받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뒤늦게 걱정이 밀려왔다. 두려움도 함께.
하지만 이미 약속 날짜는 잡혔다. 이번 주 토요일 점심으로.
째깍째깍. 시간이 흘러간다. 자정을 넘기는 시곗바늘. 겨우 월요일에서 하루가 가고 화요일이 되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초조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
금요일. 퇴근 후 태준은 가회동 본가를 들러 부모님을 모시고 고급 한식당 전문점으로 가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푸짐하게 차려진 밥을 배부르게 먹고 후식으로 나온 매실차와 홍시를 먹고 있는데 시연이 별안간 홍시를 떠 먹던 작은 티스푼을 내려놓았다.
“아들.”
부르는 소리에 태준은 홍시를 떠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한테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태준은 시연이 먹다 만 홍시에 눈을 두었다. 기왕이면 후식까지 다 끝내고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할 말이 있다고 부른 게 조바심을 유발한 모양이었다.
티스푼을 내려놓은 태준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청심환을 꺼내 내려놓았다.
“이거 드세요. 너무 놀라시지 않게.”
청심환을 보는 시연과 현철의 눈이 허공에서 불안하게 마주쳤다.
“아니,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시연이 말을 하는 사이 현철이 조용히 청심환 하나를 삼켰다. 그 모습을 보던 시연은 현철이 조용히 눈짓하자 청심환을 주섬주섬 까서 입에 넣었다.
두 사람이 물을 마시는 걸 본 태준이 본격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번 주 토요일 점심에 두 분 다 스케줄 비워놓으셨으면 좋겠어요.”
“스케줄은 왜.”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어서요.”
시연의 미간이 살짝 좁아지고 연륜으로 다져진 눈치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설마…… 너 만난다는 그 아가씨 말하는 거니?”
“역시 우리 엄마 눈치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가볍게 농담 삼아 말한 태준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네. 맞아요. 그 사람 엄마랑 아버지께 소개하고 싶어요.”
“가볍게 연애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결혼이라도 하려고 그러는 거야?”
“네.”
결혼이라는 말이 나오자 시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래. 뭐 하는 아가씬데?”
대체 뭐 하는 여자길래 청심환까지 먹이고 이야기를 하나 싶어 불안한 마음이 점차 커졌다.
“우리 회사 디자인팀 직원이에요. 올해 입사했고, 나이는 서른.”
“서른?”
나이를 들은 시연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서른이면 너보다 세 살이나 많잖아.”
“네.”
“잠깐만. 나이 서른에 디자인팀 입사한 사람이면…… 혹시 그 사람 말하는 거냐? 윤선혜?”
시연이 현철을 휙 돌아보았다. 현철이 선혜를 알고 있을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태준도 놀라 현철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어떻게 아세요?”
“알고말고. 현성 출판사 본사에도 소문이 자자한 걸. 입사하기 전부터 미인에, 앤틱이라는 작가명으로 유명세도 떨쳤었고. 그리고…….”
미간을 좁히며 선혜의 필모그라피를 읊던 현철의 얼굴이 굳었다. 태준은 현철이 무엇을 떠올렸는지 알 수 있었다.
“……미혼모라고 하던데.”
시연의 눈치를 살피던 현철이 무거운 목소리로 이야기하기가 무섭게.
“뭐? 미혼모?”
시연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반문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사실이야? 그 여자가 미혼모라는 거?”
태준은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태준아!”
시연이 빽 소리쳤다. 태준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었다. 문제는 이 이후였다.
아니나 다를까. 충격을 받은 시연은 횡설수설하며 언성을 높여댔다.
“아니, 미혼모라니, 이게 무슨…… 너 설마 지금 남의 자식 가진 여자랑 결혼하겠다는 거야? 너 대체……!”
“남의 자식, 아니에요.”
“……뭐?”
시연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반쯤 멍해진 시연을 대신하여 현철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남의 자식이 아니라니.”
“그 사람 아이.”
태준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내 아이예요. 내 아들.”
순간의 정적. 시연과 현철 둘 다 눈을 크게 뜨고 굳어버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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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네 아들이라니. 그 여자 애가 네 아들이라니.”
평정을 잃은 시연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거듭 물었다.
충격으로 눈을 부릅뜨고 반쯤 질린 얼굴.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은 모양새에 현철이 조용히 옆으로 다가와 시연의 손을 잡아주었다. 현철이 엄한 얼굴로 태준을 향해 물었다.
“사실이야?”
“네.”
시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현철이 또 물었다.
“애가 몇 살인데.”
“일곱 살이요.”
그 말을 들은 시연은 한 번 더 기함했다.
“이, 일곱 살?”
“네.”
“그럼 대체 언제…….”
“저 니스 갔을 때요.”
“니스?”
“네.”
태준이 한층 차분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곤조곤한 투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태준을 보는 현철과 시연의 얼굴 위로는 시시각각 다채로운 표정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
한편 같은 시각. 선혜는 핸드폰으로 태준의 부모님에 대해 검색해 보고 있었다.
태준의 아버지인 현철은 한국 출판계에서 큰 획을 그었다 평가되는 인물이었다. 책을 사랑한 가난했던 청년은 출판사를 차리겠다는 꿈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극강의 노력으로 회사를 일구고 키워냈으며 그 당시 미스코리아에서 진중에 진이라 불리던 시연과 결혼까지 하여 남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산 인물이었다.
두 사람이 꾸준히 이어온 자원 봉사와 기부 행보들이 눈에 띈다.
재벌임에도 검소한 옷차림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 되는 시연에 대한 이야기도 눈에 들어왔다.
태준의 형인 태석. 누나인 태연도 부모님과 비슷한 이미지로 거론되고 있었다.
하지만 선혜는 알고 있다. 태연의 부드러운 미소 뒤에 숨겨져 있던 그 날카로운 시선을.
“후.”
그만하자. 자꾸 봐 봤자 마음만 심란하지.
선혜는 인터넷 창을 끄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앞에 켜진 TV에 집중을 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TV를 꺼버리는 때였다.
핸드폰이 요란하게 벨소리를 터트렸다. 긴장하고 있던 선혜는 깜짝 놀라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발신자를 보니 더더욱 긴장이 되었다. 발신자는 태준이었으므로.
“여보세요?”
- 뭐 하고 있어요?
“그냥 TV 보고 있어요.”
잠시 사이를 두고 선혜가 물었다.
“태준 씨는요? 부모님께 말씀 잘 드렸어요?”
- 네.
네. 그 뒤로 별말이 없다. 선혜가 소파 위에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뭐라세요?”
- 당장 데리고 오라고 하시는 거, 겨우 말렸어요.
“많이…… 놀라셨어요?”
- 네. 그래도 청심환 드셔서 그런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어요.
청심환까지 준비해 갔을 줄이야. 태준의 준비성에 작게 놀라는 때였다.
- 선혜 씨.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에 선혜는 귀를 기울였다.
- 너무 걱정하지 마요.
전화기 너머로 작게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 다 잘 될 거니까.
지금껏 불안하고 초조했던 마음이 그 한마디로 가라앉았다.
“……네.”
- 그럼 내일 봐요. 수호한테 그 옷 꼭 입혀주고.
태준이 덧붙였다.
- 내가 말한 거 잊지 말고.
태준이 선혜와 수호에게 말한 건 별거 없다.
예의를 차리되, 너무 스스로를 포장하려 하지 말고 하던 대로 하라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이다.
*
다음 날 점심.
태준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는 동안 시연은 내내 혼란스러운 얼굴로 차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태준에게 폭탄 선언을 듣고 하루가 지났지만 그럼에도 충격은 완전히 채 가시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태준이가 아들이 있다니.
어제 들은 자초지종을 밤새 되새겨본 시연이었다.
그러면서 시연은 선혜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했다.
여행에서 만난 낯선 남자와 벌인 하룻밤 불장난. 아마도 수치심과 자괴감에 도망쳤겠지.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를 낳고, 기르고.
아이를 셋이나 낳아서 길러본 시연은 안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 엄마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성애가 아닌 책임감이 더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을.
남편이 있는 자신도 힘들었던 일을 혼자 견뎌내야 했으니 배로 힘들었을 터. 현철의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아이를 키우면서도 착실하게 일까지 해 일러스트 분야에서는 꽤 유명하다고 했었다.
‘좋은 아이였으면 좋겠는데.’
저절로 그런 바람이 들었다.
동시에 수호라는 아이에 대한 궁금증도 거세게 풍랑처럼 일었다.
어떻게 생겼을까. 어떻게 자랐을까, 태준이의 아들은.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차창 밖으로 움직이던 풍경이 느려지다가 멈춰섰다.
어느덧 차는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