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60화 (60/109)

#60. 속셈

시연은 태준과 통화를 마치고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옆에 앉아 TV를 시청 중이던 현철이 물었다.

“태준이가 온대?”

“갑자기 내가 보고 싶다나.”

“갑자기?”

“응. 갑자기.”

현철이 미심쩍은 얼굴로 턱을 손으로 쓸다가 입을 열었다.

“뭐 사고라도 친 건 아니겠지?”

“설마요.”

믿고 싶지 않은 듯 시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 보죠.”

“둘 다일 수도 있고.”

“당신도 참. 괜히 불안하게.”

시연이 새침하게 눈을 흘기자 현철은 입을 다물었다. 보고 있던 앨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연이 부엌으로 가서 부산하게 움직이자 현철이 물었다.

“뭐 해?”

“아들이 오랜만에 온다는데 와인이라도 같이 한잔할까 해서요.”

와인 냉장고를 뒤적거리는 시연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현철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내가 할 테니까 보던 앨범 마저 보고 있어.”

“금방 하는데요 뭐.”

“어허. 오늘 서재 정리한다고 무리해서 손목 아프다면서. 가서 쉬어 얼른.”

현철의 나무람에 별수 없이 부엌을 벗어난 시연은 다시 소파에 앉았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낡은 앨범이 여러 권 쌓여 있었다.

오늘 서재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옛날 앨범들이었다. 사진을 보며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한참 보고 있던 터였다.

때마침 펼친 앨범 속에는 태준의 사진이 있었다.

언제였나 되새김질할 필요도 없이 절로 떠오르는 추억 한 자락. 저절로 입가에 피어오르는 미소.

“이때 진짜 예뻤는데, 우리 막내.”

사진 속에서는 일곱 살짜리 태준이 턱시도를 입고 나비넥타이를 맨 채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호의 사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수호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

언제 의심을 했냐는 듯, 태준이 도착하자 시연과 현철은 태준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거실 테이블에 마련된 와인과 치즈를 본 태준이 물었다.

“저 온다고 차려 놓으신 거예요?”

“네 아버지가 얼마 전에 선물로 받아오신 와인이 맛이 좋더라고. 온 김에 셋이 오붓하게 마셔볼까 해서.”

“좋네. 셋이서 오붓하게.”

소파에 앉은 태준이 잔에 와인을 따르고 셋은 잔을 부딪쳤다.

“근데 태준이 너 갑자기 이 시간에 웬일이냐?”

와인을 한 모금 머금은 현철이 불현듯 물었다. 태준은 와인을 음미하다가 잔을 내려놓으며 태연히 대답했다.

“엄마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요.”

현철의 눈이 가늘어지자 태준이 서둘러 덧붙였다.

“물론 아버지도.”

현철은 서운한 기색 없이 그저 헛웃음을 쳤다. 언뜻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하는 얼굴. 시연이 못 말린다는 듯이 웃으며 일러바치듯 태준에게 말했다.

“너 갑자기 온다고 하니까 네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는 줄 아니? 너 사고 친 거 아니냐고 하더라.”

“사고는요.”

속으로 뜨끔했지만, 태준은 애써 웃으며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러다 거실 테이블에 쌓여 있는 앨범을 발견했다. 화제를 돌릴 겸 태준이 앨범을 보며 물었다.

“저거 우리 어렸을 때 사진 있는 앨범 아니에요?”

“맞아. 오늘 서재 정리하다가 발견했어.”

“너희 엄마가 어찌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저거 찾자마자 온종일 저것만 들여다보고 있었다니까?”

“오랜만에 보니까 옛날 생각나고 재밌더라고.”

시연이 앨범 하나를 가져와 펼쳤다. 그리고 동화책을 읽어주듯이 사진 하나하나에 담긴 추억들을 조곤조곤 읊어주었다.

태준은 와인을 홀짝이며 시연의 다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사진 속 태준은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신생아의 모습에서, 돌을 지난 아기가 되었고, 아기에서 아이로, 그리고 어린이로 자라났다.

그리고 그 어린이의 모습은 차츰 수호와 비슷한 모습이 되어갔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신기하여 울고 웃는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때였다.

“태준아. 너 이때 기억나니?”

문득 시연이 가리킨 사진을 본 태준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이건…….’

완전 수호잖아.

턱시도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불퉁한 얼굴을 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수호였다.

“기억나?”

시연이 재차 묻자 태준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결에 고개를 젓자 시연이 친절하게 설명을 이었다.

“너희 막내 고모 결혼식 날 이렇게 입혀놨더니 마음에 안 든다고 울고불고 아주 난리가 났었는데.”

시연이 하는 말에 비로소 기억이 났다.

일곱 살의 어린 태준에게는 턱시도는 너무 불편한 옷이었고 목을 조이는 나비넥타이도 마찬가지로 불편했다. 거기에 이대 팔로 넘긴 머리는 우스꽝스러움을 더했기에 싫다고 울고불고 했었지.

반면 엄마인 시연은 그때 태준의 모습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었다.

때문에 그 뒤로도 이처럼 입히려는 시도가 계속 이어지곤 했지만, 태준은 고집을 피우며 입지 않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시연은 그 옷을 두 번 입히지 못하고 버리기에 이르렀었다.

“이 옷 버리면서 얼마나 아까웠던지.”

“이 촌스러운 옷이 그렇게 좋았어?”

“촌스러웠어도 얼마나 귀여웠었는데. 그때 너 진짜 너무했었어. 엄마가 그렇게 부탁했는데 입는 척이라도 좀 해 주지.”

태준은 그때 일을 떠올리며 아쉬워하는 시연의 얼굴을 보다가 사진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고는 사진 속 차림새를 하나하나 머리에 새기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 빨간색 나비넥타이. 그리고 턱시도.

‘이거다.’

태준의 눈동자에 반짝, 이채가 서렸다.

“엄마, 있잖아.”

흐뭇한 얼굴로 한참 사진을 들여다보던 시연이 눈을 들어 태준을 보았다.

그 얼굴을 보자 순간 누나인 태연이 한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다음 가족 모임 때 청심환 하나씩 사 와. 어머니 아버지 혈압 있으셔서 얘기 들으면 쓰러지실지도 모르니까.’

당장 말하기에는 조심스러워 태준은 입을 다물었다. 시연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냐. 아무것도.”

“뭔데 그래?”

보채는 시연을 보며 태준이 미소지었다.

“나중에요. 나중에 알려드릴게.”

*

다음 날 아침.

선혜는 쏟아지는 업무 속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그동안 쌓인 작업과 더불어 지민이 은근슬쩍 넘기는 일 때문에 쉴 틈 없이 일해야 했다. 오랜만에 무리한 손목이 뻐근하게 아플 정도였다.

덩달아 뻐근해지는 목을 주무르며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는 때였다.

지잉- 울리는 핸드폰. 화면에는 태준이 보낸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일 잘하고 있어요?]

선혜는 핸드폰을 들어 답장하기 시작했다.

[네. 태준 씨는요?]

[당 떨어져서 카페 가는 중이에요. 음료나 간식거리 사다 줄까요?]

음. 선혜가 고민하며 머뭇거리는 때였다.

지잉- 핸드폰이 다시금 울렸다. 핸드폰 상단에 뜨는 메시지.

[대리님. 대리님도 선혜 씨한테 일 넘기세요. 완전 편해.]

……이게 뭐지?

메시지를 보는 순간 가슴께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선혜는 느릿하게 팝업창을 터치했다. 그러자 지민과의 메시지 창이 떴다.

메시지는 계속 오고 있었다.

[아니, 생각할수록 어이없지 않아요? 자기가 나서서 일 더 하겠다고 해야지. 꼭 내가 얹어줘야 하나? 우리가 자기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빡세게 굴렀는데.]

선혜는 무표정한 얼굴로 메시지 창을 계속해서 보고 있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주임님. 메시지 잘못 보내신 것 같은데요.]

답장은 의외로 곧장 왔다.

[어머, 미안해요. 임 대리님인 줄 알고. 둘이 프사가 똑같아서.]

선혜는 답장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파티션 너머를 쳐다보았다. 비스듬하게 앉아 있는 지민이 슬쩍 이쪽을 쳐다보는 게 보였다.

당황하지도, 그다지 놀라지도 않은 얼굴. 미안해하기는커녕 희미하지만 분명 싱긋거리는 입가.

고의. 아니, 악의……라고 해야 하나.

그동안 수도 없이 겪은 상황이기에 선혜는 차분히 대응했다.

[방금 작업한 거 메일로 보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동요하지 않기.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굴기.

반응을 끌어내려는 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적절한 대처는 없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대한 반응이 없자 지민은 입을 비죽거리고 있었다.

선혜는 천천히 심호흡하고 태준의 메시지에 뒤늦게 답장했다.

[단 거로 부탁해요.]

내색하지 못한 속이 쓰려 단 것이 몹시도 당겼다.

*

선혜와 태준은 늘 그렇듯이 비상구 창가에서 잠깐 짬을 내어 만나고 있었다.

티라미수의 단맛과 아메리카노의 조화가 일품이었다. 저조해졌던 기분이 금방 나아지는 느낌.

“일 많이 힘들었어요? 안 찾던 단 걸 다 찾고.”

“오랜만에 일하니까 그런가 봐요.”

선혜는 어깨를 으쓱하며 티라미수를 크게 떠먹었다.

입가에 묻은 가루를 태준이 손을 뻗어 닦아주었다. 머쓱하게 태준의 손길이 스쳐 간 부분을 손으로 문지르던 선혜가 커피를 마시는데 고개를 기울이고 선혜를 빤히 쳐다보던 태준이 물었다.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요?”

선혜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얼굴이다.

“누가 괴롭히나?”

“별거 아니에요.”

“선혜 씨 그거 알아요?”

태준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티 안 내려고 노력하는 거 알겠는데.”

그가 손끝으로 선혜의 뺨을 장난스럽게 툭 쳤다.

“티 무지 나요.”

내가? 선혜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태준의 손끝이 닿은 제 뺨을 문질렀다.

태준이 눈치챈 마당에 더 숨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선혜는 체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냥, 내 뒷담화 하는 걸 들었어요.”

“뒷담화?”

“네.”

흔한 일이다. 자신의 뒷담화를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듣게 되는 것은.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현상이랄까. 자신을 헐뜯는 사람은 어딜 가나 한 명씩은 꼭 있었다.

“들었는데 가만히 있었어요?”

태준이 굳은 얼굴로 따지듯 물었지만, 선혜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대거리 해봤자 싸움만 나고. 피곤한 건 질색이라.”

말하는 걸 보니 한두 번이 아닌 듯싶었다. 태준은 기가 막힌 얼굴로 헛웃음을 쳤다.

“누구예요? 말 해 봐요.”

“말하면 혼내주기라도 하게요?”

“당연하죠.”

선혜가 피식 웃었다.

“됐어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런 사람들은 신경 쓰면 쓸수록 더 날뛰는 법이거든요.”

게다가 자신도 아닌 태준이 대응을 한다면 더 악효과가 있을 수 있었다. 지민이 자신을 미워하는 건, 아무래도 태준으로 인해 비롯된 질투 때문일 테니.

“아니, 어떻게 신경을 안…….”

씨근덕거리며 말을 잇던 태준은 선혜가 입에 티라미수를 떠서 밀어 넣자 말을 잇지 못했다. 어찌 됐든 입에 들어온 음식은 먹어줘야 예의가 아니겠는가. 입을 우물거리는 태준을 보며 선혜가 피식 웃었다.

“묻었다.”

다가온 손끝이 입가에 묻은 가루를 털어냈다.

웃는 선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준은 옆에 있던 커피를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선혜의 말을 듣고 자신이 더 화가 난 모습이었다. 화제를 돌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선혜가 입을 열었다.

“이따가 퇴근하고 태준 씨가 수호 데리러 가는 거죠?”

“네.”

태준이 선혜에게 물었다.

“선혜 씨 오늘 저녁에 약속 없죠? 야근도 없고.”

“네. 왜요?”

“그럼 우리 데이트합시다.”

“데이트요? 수호는 어쩌고…….”

“둘 말고, 셋이서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선혜가 눈을 깜박였다. 태준이 씩 웃었다.

“가족 데이트하자고요.”

데이트만 목적인 건 아닌 것 같은데.

빤히 쳐다보는 사이 태준이 티라미수를 떠서 입에 넣어주었다.

입에 담긴 티라미수가 혀에 감겨 녹아드는 건 한순간이었으나 단맛의 여운은 길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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