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직면
태준은 망연한 얼굴로 유치원 현관을 나서는 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멈췄던 숨을 천천히 내쉬는데 제 손을 꼭 잡아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수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누나랑 잠깐 얘기 좀 하고 올 테니까, 세빈이랑 있어. 금방 올게.”
“괜찮은 거예요?”
“그럼. 당연하지.”
애써 웃는 태준의 얼굴을 보던 수호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
태준은 다시금 입꼬리를 끌어올리고는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를 펴고 현관을 나섰다. 수호는 태준이 나가고 나서도 한참을 자리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려 미닫이문 너머로 들어왔다.
그런 수호에게 세빈이 물었다.
“우리 외삼촌이 왜 너를 데리러 와?”
수호는 물끄러미 세빈을 볼 뿐 답하지 않았다.
작게 좁혀진 미간만이 수호의 심란한 속내를 내비치고 있었다.
아까 그 사람이 아빠의 누나. 그리고 장세빈은 아빠 누나의 딸.
그렇다면 세빈이 자신의 사촌이라는 건데.
“응? 왜냐니까?”
보채는 세빈을 이기지 못하고 수호가 입을 열었다.
“우리 아빠니까.”
세빈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
수호가 세빈을 향해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너희 외삼촌이 우리 아빠야.”
*
한편. 태준은 천천히 태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태연의 하이힐 굽이 잔디밭 위로 찍히는 걸 응시하면서 말이다. 차마 뒷모습조차 고개 들어 쳐다볼 수가 없었다. 손에 땀이 차서 자꾸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유치원 마당을 벗어난 태연은 입구 앞에 세워진 흰색 벤에 올라탔다.
태연과 세빈을 기다리던 태연의 매니저, 창수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며 물었다.
“어? 세빈이는요?”
그러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태준을 보더니 반가운 얼굴을 해 보였다.
“태준이 오랜만…….”
“창수야.”
태연이 선글라스를 벗어 내리며 창수의 말허리를 잘랐다.
“잠깐만 나가 있을래? 내가 태준이랑 둘이서 할 말이 있어서.”
고저 없이 서늘한 목소리. 무표정한 얼굴.
신인 시절부터 태연의 옆을 지켜온 창수는 지금 태연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하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의아한 얼굴로 태준을 힐끔 쳐다본 창수였지만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고 알았다며 벤을 나갔다.
진하게 선팅된 창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창수는 벤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아하니 대화가 꽤 길어질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팔장을 끼고 뒤에 드리워진 나무에 등을 기대는 때였다. 그런 창수의 눈에 수상한 남자가 포착된 것은.
“뭐야, 저 사람?”
유치원 앞을 기웃거리는 검은 그림자. 검은 옷차림에 푹 눌러쓴 모자가 한눈에 보기에도 수상해 보였다. 고개를 빼고 눈을 가늘게 뜨는데 시선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모자 챙을 내리고 멀어지는 뒷모습. 몸을 돌리기 직전 창수는 분명 보았다. 작게 무어라 읊조리는 입모양은 분명 욕설이었다.
“기분 나쁜 사람이네.”
저물어가는 노을에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창수는 길어진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남자가 멀어진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태연은 차에 올라 타서는 줄곧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는 태연 때문에 태준은 죽을 맛이었다. 자꾸만 입이 말라서 혀로 입술을 축이는 게 여러 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조바심을 이기지 못한 태준이 태연을 향해 말문을 틔우려는 때였다.
“수호라는 애.”
창밖을 보고 있던 태연이 태준을 돌아보았다.
“누구야?”
“저기, 누나. 그게…….”
“사족 붙이지 말고.”
태연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요점만 말해. 똑바로.”
천천히 심호흡한 태준이 곧 입을 열었다.
“내…… 아들.”
대답을 들은 태연이 천천히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등받이에 등을 깊게 기대며 다리를 꼬는 얼굴은, 얼핏 보면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 태연이 다리를 꼬고 뾰족한 구두 끝을 응시하며 읊조렸다.
“아들이라고.”
픽. 실소가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아들.”
하지만 그 미소는 곧 씻은 듯이 사라졌다. 자신을 돌아보는 태연의 얼굴을 본 태준이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차를 뛰쳐 나가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억!”
옷자락이 잡히더니 몸이 그대로 끌려가고, 반쯤 열린 문이 닫혔다.
그리고 퍽, 퍽. 등짝과 팔뚝에 매서운 손길이 사정없이 내려찍히기 시작했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진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다가 애까지 만들어서는! 게다가 이제까지 말도 안 하고 숨겨?! 너 장난하냐, 진짜?!”
“아, 아, 누나. 잠깐만! 내 말 좀, 악!”
태준은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흥분해서 후려갈기는 손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막는 건 포기하고 웅크린 채 등을 기꺼이 내주는 때였다.
수그린 태준의 시야에 태연이 구두 한 켤레를 벗어 들어올리는 게 포착되었다. 눈을 부릅뜬 태준이 재빨리 몸을 들어올려 태연의 손목을 잡아 막았다. 허공에 들어올려진 힐의 뾰족한 굽이 흉기처럼 번뜩거렸다.
태준이 정색하며 태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누나, 이건 좀…….”
“우리 세빈이는 어떻게 책임질래?”
“……뭐?”
갑자기 세빈이가 왜 나와?
어리둥절한 얼굴로 태연을 쳐다보는데 씨근덕거리던 태연이 빽 소리쳤다.
“우리 세빈이는 어떡할 거냐고 이 나쁜 자식아!!”
“아니, 제대로 말을 해 봐. 세빈이가 뭐 어쨌는데 그래.”
“세빈이가 수호 좋아한단 말이야!”
태준의 얼굴이 단번에 창백해졌다.
“뭐? 누가 누굴 좋아해?”
“세빈이가, 네 아들 좋아한다고!”
태준의 얼굴이 멍해졌다.
.
.
.
잠시 뒤. 태연은 차 안에 구비되어 있는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그런 태연의 옆에서 태준은 죄인처럼 앉아 있었다.
생수 한 병을 단숨에 비운 태연이 심호흡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애 엄마는 그때 방황하면서 만난 여자야?”
태준을 돌아보는 눈빛이 삐딱하기 그지없었다. 태준이 맞잡은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니스 여행 갔을 때.”
“니스 여행? 너 그때 겨우 이박삼일만 다녀오지 않았어?”
“그랬지.”
기가 막히는지 태연이 허공에 헛웃음을 쳤다.
“스물한 살짜리가 여행 가서 여자랑 눈맞아서 애까지 낳았다고.”
할 말이 없는 태준은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근데 너도 참 대단하다. 그동안 어떻게 가족들한테 숨겨가면서까지 딴 살림을 다 차렸냐?”
말을 하던 태연의 눈이 별안간 서슬 퍼렇게 빛났다.
“너 혹시 그 여자한테 애 때문에 코 꿰여서 돈 뜯기고 있는 건 아니지?”
그 말에 태준이 발끈했다.
“선혜 씨 그런 사람 아니거든?”
“그럼 왜 지금까지 말 안 했는데?”
한숨을 푹 내쉰 태준이 입을 열었다.
“나도 안 지 얼마 안 됐어.”
“뭐? 안 지 얼마 안 됐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여행 가서 만난 뒤로 계속 못 보다가 올해 봄에 겨우 다시 만났어. 그 사람 아들이 내 아들인 것도 얼마 전에 겨우 알았고. 애한테도 알려준 지 얼마 안 됐어.”
태준이 고개를 들어 태연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가족들한테 숨기려고 한 적 없어. 다음 가족 식사 자리에서 다 같이 모였을 때 얘기하려고 했단 말이야.”
그 전에 누나인 태연한테 들킬지는 꿈에도 몰랐지만. 태준은 또다시 나오려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태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연은 태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다.
태연은 복잡한 얼굴로 팔짱을 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는 노을빛에 물드는 유치원의 건물이 비치고 있었다.
“세빈이가 수호 많이 좋아한대?”
태준이 조심스럽게 던진 질문에 태연이 대꾸했다.
“몰라, 나도.”
“……미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건네어지는 사과에 발끈해서 돌아본 태연은 죽을상을 하고 있는 태준을 보고는 맥이 풀려버렸다.
사고를 친 태준이 괘씸하여 욱하긴 하였으나 그래도 가족이라서 그런지 날 선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태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가족 모임 때 청심환 하나씩 사 와. 어머니 아버지 혈압 있으셔서 얘기 들으면 쓰러지실지도 모르니까.”
태연의 말에 태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들이나 데리러 가자. 많이 기다렸을 것 같은데.”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연을 따라 벤에서 내렸다.
“세빈이한테는 내가 얘기할게.”
“그래라.”
앞서 걸어가는 태준의 얼굴은 심란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하나. 많이 놀랄 텐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민이 차츰 커졌다.
하지만 고민한 게 무색하게도 두 사람이 아이들을 데리러 도착하여 문을 열자마자 세빈이 선수를 쳐서 물었다.
“외삼촌. 외삼촌이 진짜 윤수호네 아빠야?”
확인사살을 하는 세빈의 모습에 놀란 것도 잠시뿐. 태준은 곧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응.”
흔들리는 아이의 눈. 천천히 떨어지는 고개.
“그렇구나.”
혹여라도 세빈이 울까 싶어 긴장하던 두 어른은 충격에 멍해진 아이의 얼굴을 보며 도리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빈은 울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저 초점 없는 눈으로 같은 말을 반복할 뿐.
세빈은, 울지 않았다.
*
태연은 집에 가는 내내 세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법한 게 여느 때처럼 세빈이 조잘거리지 않고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니저인 창수의 헛기침 소리가 차 안에 들리는 소음의 전부였다.
세빈은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태연이 손을 뻗어 세빈의 자그마한 손을 감싸자 세빈이 고개 들어 태연을 보았다.
“세빈아. 너 괜찮아?”
“뭐가?”
“많이 놀란 것 같아서.”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태연을 마주하던 세빈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놀랐었는데, 지금은 괜찮아.”
“정말?”
“응.”
고개까지 끄덕이는 세빈.
“그냥 신기해. 윤수호가 갑자기 가족이라고 하니까.”
그것은 세빈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거짓 하나 없는.
친구가 갑자기 가족이라니 신기할 밖에.
하지만 그러면서도 왜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허한지 모를 일이다.
싹트기도 전에 꺾인 마음이 남긴 작은 후유증임을 세빈은 아직 어려 알아채지 못했다.
*
수호를 데려다 준 태준은 선혜와 수호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배부르게 밥을 먹은 뒤에 태준은 할 말이 있다며 선혜를 불러 부엌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눈치껏 빠져준 수호는 홀로 거실에서 TV를 시청 중이었다.
태준의 입에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들은 선혜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놀라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가족들한테 얘기를 하겠다고요?”
“네. 이번 달 말에 가족 모임이 있거든요. 아무래도 그때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예상한 시나리오긴 했다. 이전에 마주쳤을 때 태연은 반쯤 눈치를 챈 것 같았으니까.
태준의 가족들한테 수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마땅한 일이었다. 손주의 존재를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굳이 그럴 이유도 없었고.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태준의 부모님의 반응이 예상되지 않는다는 것.
웃으면서 환영해 줄 확률은 희박하고.
많이 당황하고, 어쩌면 언짢아하실 수도 있겠다.
마지못해 받아들여 줄 가능성도 있겠지.
환영받지 않는 상황은, 원치 않는데.
자신이 겪어 봤기에 선혜는 잘 알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가 얼마나 서러운지. 그걸 수호가 겪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무거워졌다.
“선혜 씨?”
선혜의 표정이 별안간 어두워지자 태준이 선혜를 불렀다. 선혜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음울한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저를 담고 있는 맑고 투명한 갈색 눈동자를 마주 보던 선혜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래요. 말씀 드려야죠. 어른들도 아셔야 하니까.”
“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 돼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이 둔한 남자가.
진심으로 놀라 태준을 빤히 쳐다보는데 태준이 손을 뻗어 선혜의 손을 움켜잡았다.
“걱정하지 마요. 선혜 씨가 걱정하는 일, 없게 할 테니까.”
비장하기까지 한 태준의 얼굴을 보던 선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게도, 말뿐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조금 놓였다. 어쩌면 손을 통해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네.”
부드럽게 미소지은 태준이 수호를 흘끗 보다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오늘은 수호가 있어서 밤에 같이 못 있어 주겠네요.”
오늘 아침의 일이 떠올라 선혜가 굳어 있는 사이 태준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만 갈게요. 내일 회사에서 봅시다.”
말을 마친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혜도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 삼아 그의 뒤를 따랐다.
“수호야, 아빠 간다.”
태준이 간다는 말에 수호도 소파에서 폴짝 내려와 다가왔다. 선혜와 수호가 바라보는 가운데 태준이 신을 신었다.
시간대가 아침이었다면 영락없이 출근길을 배웅하는 아내와 아들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길게 응시하던 태준은 아쉬운 얼굴로 인사를 마치고 돌아섰다.
현관문을 나서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태준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불안을 담고 어둡게 가라앉았던 선혜의 얼굴.
사실 태준도 자신의 부모님이 진실을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할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한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나. 그건 남이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해당되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그 속내를 하나하나 다 알 수는 없으니.
융통성이 있는 것 같다가도 고지식한 면모를 보이던 부모님.
기왕이면 서로 마음 상하지 않고 좋은 결말을 맞이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하던 태준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별안간 핸드폰을 꺼내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건, 엄마인 시연의 목소리.
“엄마. 나 지금 본가 가도 돼?”
- 지금?
“응.”
- 갑자기 왜?
“그냥.”
이유를 찾아 머릿속을 더듬거리던 태준이 입을 열었다.
“그냥 엄마가 보고 싶어서.”
고민만 주구장창 하느니 직접 가서 부딪혀보는 게 낫겠지.
성과가 있든 없든 말이다.
생각을 마친 태준이 제법 비장한 얼굴로 핸들을 꺾었다.
유턴한 차가 달리는 방향은 가회동 쪽. 태준의 본가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