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58화 (58/109)

#58. 위기일발

거센 기세에 선혜의 고개가 저절로 뒤로 젖혀지고 그 뒤를 태준의 커다란 손이 감싸 쥐었다.

지난번 비상구 때의 입맞춤과는 차원이 달랐다. 숨도 못 쉬게 몰아붙여 머릿속이 새하얘져 버렸다.

온순한 강아지 같았는데. 분명 그랬는데…….

잡아먹힐 것 같아.

그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거세고 저돌적이었다.

우스운 건 그게 싫지 않다는 것.

선혜는 발뒤꿈치를 들고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몸이 맞붙으며 고개가 더욱 젖혀지는가 싶더니 몸이 붕 떠올랐다.

가볍게 선혜를 끌어안은 태준이 열 오른 얼굴로 슬며시 웃었다. 선혜도 마찬가지인 얼굴로 웃으며 그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태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선혜의 입술을 받아 머금었다.

선혜의 몸이 침대에 눕혀지며 잠시 입술이 떨어졌다.

태준은 가만가만 선혜를 훑어내렸다. 용케도 수건은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선혜의 어깨에 가만히 입을 맞춘 태준이 손을 들어 수건을 붙잡는 때였다.

“……태준 씨.”

선혜가 문득 태준을 불렀다. 아래로 입술을 내리려던 태준이 고개를 들어 선혜를 보았다.

“너무…… 밝아.”

태준은 맥없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커튼이라도 치고…… 해요.”

“커튼.”

태준이 나직이 읊조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커튼이 있는 창가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다시 선혜를 내려다보더니 별안간 씩 웃었다. 그러더니 이불을 홱 끌어 올려 두 사람의 몸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됐죠?”

선혜는 어이없는 얼굴로 태준을 보다가 웃어버리고 말았다. 태준은 쪽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며 입술을 점차 아래로 내렸다. 그의 손길에 수건이 선혜의 몸 위에서 사라졌다.

밝은 톤의 이불은 아침 해를 완전히 가려주지 못했다. 때문에 태준의 행동이 고스란히 선혜의 눈에 비쳤다.

그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데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손바닥 너머에서 들려왔다.

“뭘 새삼 부끄러워해요.”

그가 선혜의 손을 붙들어 내리며 말했다.

“애까지 만든 사이에.”

능글맞은 말에, 선혜는 결국 웃어버리고 말았다.

다시금 겹쳐지는 입술. 은밀히 다가와 어루만지는 손길.

들썩이는 이불 속 공기는 점차 뜨거워지고, 그 열기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쯤, 태준이 말했다.

“……힘들면 말해요.”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선혜는 입 밖으로 내뱉기 부끄러운 말을 삼키며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낮은, 밤보다 길고 길었다.

*

형주와 성균은 둘이서 밥을 먹고 본사 1층 카페를 찾았다. 그런데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지민이 지루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앉아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형주가 손을 흔들며 지민에게 알은체했다.

“어이, 김 주임!”

하지만 그런 두 사람과는 달리 지민의 표정은 가히 좋지 않았다. 얼굴이 불만투성이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서글서글한 얼굴로 물으며 형주가 지민의 맞은편에 앉았다. 주문을 마친 성균도 형주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윤선혜 씨 오늘도 결근이에요.”

잔뜩 지친 얼굴로 지민이 테이블에 풀썩 엎드렸다.

성균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선혜 씨가? 왜?”

“아프대요. 아들한테 감기가 옮았다나.”

성균과 형주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지민은 그런 두 남자를 아니꼽게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선혜가 결근했기에 기주의 커피 심부름은 자연히 지민의 몫이 되었다. 겨우 막내 역할에서 벗어나서 좋아했는데 선혜가 결근한 지난주부터 죽 잡일을 도맡아 했다.

선혜의 구멍을 메우는 것도 당연히 지민의 몫이었다. 하필이면 타 플랫폼의 공모전이 끝나고 작품이 밀려 들어오는 시기라 업무량이 많아져 야근도 해야 했다.

“근데 신 주임님은요? 오늘 안 보이시는 것 같던데.”

문득 지민이 두 사람을 흘긋대다 물었다.

“신 주임 오늘 연차라서 쉬는 날이야.”

“연차요?”

“응. 어제 부장님한테 급한 일 생겼다고 연락했다던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지민이 중얼거렸다.

“연애하는 거 어지간히도 티 내네.”

형주와 성균이 그 얘기를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와중 형주가 어색하게 웃음 지으며 지민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김 주임?”

“시치미 떼지 마세요. 윤선혜 씨랑 신 주임님 연애하는 거 우리 회사에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뜻밖의 소리에 형주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사람들이 다 안다고?”

“당연하죠. 둘이 티를 그렇게 내는데.”

회사는 눈과 귀가 어디든 산재해 있는 법이다.

나름 몰래몰래 만난다고 했지만, 휴게실에서, 출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혹은 비상구에서 둘이 만나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초기에 두 사람이 여행 가서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에 힘입어 두 사람이 만난다는 소문은 일파만파 퍼지고 있었다. 다만 태준이 회장의 막내아들이기에 다들 쉬쉬하여 본인들만 모를 뿐이다.

무엇보다도 지민은 두 사람의 데이트 장면을 목격한 바 있었다. 민영과 브런치를 먹으러 간 날, 입구를 들어서다 도망치듯 나가던 선혜와 태준의 모습을 닫히는 문 사이로 보고 만 것이다.

지민이 말해준 덕에 민영도 알고 있었다. 당사자인 선혜에게 모르는 척 묻기에는 이미 소문이 파다하여 그러지 않았을 뿐이다. 무엇보다 확인받기가 내키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었던 소문이었으니까.

“능력도 좋아. 애 엄마가 새파란 총각을 다 만나고.”

픽 웃으며 중얼거리는 말에는 비아냥이 가득했다. 형주와 성균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헛기침을 작게 했다. 죄 없는 두 사람을 슬쩍 노려보는데 음료가 나왔다는 고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런데 음료가 담긴 캐리어 말고도 포장된 쿠키가 하나 더 놓여 있었다. 지민이 보고만 있자 고은이 손으로 쿠키를 슥 밀었다.

“서비스예요.”

지민이 좋은 내색을 숨기고 물었다.

“웬 서비스예요?”

“자주 오시잖아요.”

친절하게 웃는 고은의 얼굴을 지민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얼마 전에 선혜와 다투었다는 아르바이트생이 이 사람인가. 얼핏 떠오른 생각에 지민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고은이 내민 쿠키를 지민이 선선히 집어 갔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고맙긴요. 안녕히 가세요.”

고개를 까딱인 지민이 곧 멀어졌다. 고은의 시선이 그런 지민의 뒤를 쫓았다.

‘능력도 좋아. 애 엄마가 새파란 총각을 다 만나고.’

지민이 한 말을 떠올리던 고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선혜의 주위에는 늘 저런 사람이 한 명씩은 있었다. 선혜를 질투하는 사람. 혹은 선혜에게 경쟁심리를 가지는 사람.

둘 다라면 이야기는 더욱 쉬워진다.

‘잘하면 써먹을 수 있겠어.’

그런 사람들은 늘 고은의 장기 말이 되어주었다.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할 시한폭탄을 가슴속에 지닌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고은의 얼굴에 즐거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

선혜는 눈을 떴다. 눈은 떴지만, 몸을 일으키기가 좀처럼 힘이 들었다.

겨우 협탁에 손을 뻗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네 시 반. 기절하듯 잠이 들기 전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시간이 열 시 무렵이었으니까 다섯 시간 정도 잔 것이었다.

핸드폰에는 부재중 통화 내역이 여러 개 찍혀 있었다. 경애와 수호에게서 전화가 왔었고 기주에게서도 괜찮냐는 연락이 와 있었다. 직장 상사인 기주에게 덕분에 잘 쉬었다는 인사를 메시지로 적어 내려가는 때였다.

“깼어요?”

등 뒤로 묵직하게 체중이 실려 오더니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선혜가 돌아보면 이제 막 깬 듯 부스스한 얼굴의 태준이 있었다. 선혜를 보며 미소 짓던 그가 선혜가 든 핸드폰을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일어나자마자 다른 남자한테 메시지 보내는 거?”

“팀장님한테 감사 인사 보내는 거예요.”

“흠.”

태준이 선혜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메시지 내용을 유심히 살피더니 읽어내렸다.

“팀장님. 신경 써 주신 덕택에 몸 잘 추스를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많이 괜찮아졌어요. 감사드립니다. 웃음 웃음?”

마지막이 마음에 안 드는지 태준이 인상을 홱 찌푸렸다.

“왜요?”

“저거 지워요. 웃음 웃음.”

“그럼 너무 딱딱한데.”

“나한테는 저런 거 한 번도 보낸 적 없으면서 이러깁니까?”

잠시 어이없는 얼굴로 태준을 보았지만, 그 말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다정하게 이모티콘을 붙여 보낸 적이 없었으니까.

얼른 메시지를 보내야 하는데 태준의 눈치가 보여 차마 전송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망설이며 손끝을 오므리는데 아뿔싸. 손끝이 하필이면 전송 버튼 위를 스쳤다. 그 바람에 터치를 감지한 핸드폰이 그대로 메시지를 보내고 말았다. 가슴이 철렁한 선혜는 뻣뻣하게 눈을 굴려 태준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린 태준이 부루퉁한 표정을 짓더니만 선혜의 등 뒤에서 떨어졌다.

선혜가 멋쩍은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태준은 선혜를 등지고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선혜가 손을 내밀어 그의 등을 툭툭 쳤다.

“태준 씨.”

태준은 답이 없었다. 슬며시 다가간 선혜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태준 씨. 삐졌어요?”

“삐지긴 누가 삐져요.”

잔뜩 삐진 목소리로 잘도 부정한다 싶었다.

선혜가 슬쩍 그의 어깨에 입을 맞추더니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슬며시 그의 등에 머리를 기댔다. 선혜 나름의 애교였다.

태준은 어깨너머를 흘긋거리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고 있었다. 겨우 표정을 갈무리한 태준이 비딱한 표정을 지어내며 뒤를 돌아보려는데 선혜의 핸드폰이 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혹시 기주인가 싶어 진심으로 표정이 안 좋아지는데 선혜의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엄마’ 였다.

몸을 돌린 선혜가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 일어났어?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응. 다 나은 것 같아.”

- 다행이네. 연락 안 돼서 걱정되던 참이었는데. 자느라 연락 안 됐던 거야?

조금 민망하여 선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랬지, 뭐. 어제 수호 잘 잤어? 유치원은 잘 갔고?”

- 그럼. 잘 먹이고 잘 보냈으니 걱정 마셔. 오늘도 유치원에서 내가 데리고 올까?

“아냐. 내가 갈게.”

- 그래. 수호한테도 연락 한번 해 주고. 애가 걱정 많이 하는 것 같던데.

“응. 알았어.”

- 혹시 모르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알았지?

“알았어. 걱정 마, 엄마.”

통화를 마치고 한숨을 내쉬는 때였다.

“수호 내가 데려올 테니까 선혜 씨는 집에서 더 쉬어요.”

태준이 선선히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무심결에 돌아본 선혜는 햇살에 고스란히 드러난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 고개를 돌렸다. 태준이 그런 선혜를 보고 피식 웃었다. 자기 전에 같이 씻기까지 해 놓고 내숭은.

침대 아래로 떨어진 옷을 차례대로 주워 입은 태준이 화장대 거울 앞에서 뻗친 머리를 살짝 매만지고는 선혜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다녀올게요.”

선혜가 이불을 가슴께로 끌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웃음 지은 태준이 선혜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수호 오기 전에는 잘 입고 있어요.”

민망하여 굳은 선혜의 얼굴을 보고 짓궂게 웃은 태준이 곧 발걸음을 돌려 침실을 나갔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선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노곤한 몸을 침대 헤드에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고는 미안한 얼굴로 수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수호야. 엄마야.”

*

수호를 데리러 가는 길. 태준은 시간을 힐끔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조금 늦겠네.”

끝나는 시간에 딱 맞춰 데리러 가고 싶었는데 조금 늦을 것 같았다. 슬슬 퇴근 시간이 되며 도로 정체가 시작되는 것도 늦는 데 한몫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게 나으려나.’

자신이 수호를 데리러 가는 걸 누군가 본다면 한참 시끄러워질 터.

학부모들이 아는 건 딱히 상관이 없지만, 그 학부모 중에 누나인 태연이 있는 게 문제였다. 바쁜 스케줄 탓에 학부모회 같은 모임에 참여하지 않아 소식이 느릴지도 모르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니 말이다.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알리기 전에 태연이 미리 알게 되는 것은 사절이었다. 무엇보다 태연의 성격상 난리가 날 터.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처져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데 지잉 핸드폰이 진동했다. 빨간불에 차를 정차시키고 핸드폰을 확인하자 수호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언제 오세요?]

태준은 내비게이션에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답장했다.

[십분 뒤 도착.]

시간을 확인했다. 셋이서 저녁 먹기에 딱 좋은 시간대.

돌아가면서 뭐라도 사 갈까나. 고민하는 태준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유치원 앞은 한산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주위를 둘러보던 태준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유치원 안으로 발을 들였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때마침 지나가던 선생님이 반가운 얼굴로 알은체를 했다.

“세빈이 외삼촌 아니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태준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선생님이 웃으며 물었다.

“세빈이 데리러 오셨나 봐요?”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태준은 뭔가 쎄한 느낌에 선생님에게 물었다.

“세빈이가…… 아직 유치원에 남아 있어요?”

유치원 선생님이 의아한 얼굴로 태준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빈은 분명 오늘 엄마가 데리러 온다고 했었다. 외삼촌이 아니라.

사색이 되는 태준의 얼굴을 수상쩍게 쳐다보던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저기서 친구랑 같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선생님이 가리킨 곳에는 미닫이문이 하나 있었다. 불투명한 유리 사이로 앉아 있는 두 아이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태준이 설마 하는 얼굴로 선생님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그 친구가 수호인가요?”

“네. 맞아요.”

태준이 뜨악한 표정을 겨우 웃음으로 갈무리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렇구나.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태준이 멀어지려는 그녀를 붙들어 세웠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얼굴을 붉히는 걸 보던 태준이 퍼뜩 손을 놓고 말했다.

“선생님. 오늘 제가 여기 온 거, 비밀입니다. 앞으로도 저 여기 올 건데 선생님들끼리 비밀로 좀 해달라고 전해주세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선생님을 보며 태준이 안도한 얼굴을 해 보였다. 선생님은 잔뜩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더 캐묻지 않고 돌아섰다.

태준은 심호흡을 길게 내쉬고는 미닫이문으로 다가가 섰다. 소리 없이 슬쩍 열어 보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아이가 있었다. 세빈과 수호였다.

얼른 문을 닫으려는데 이쪽을 돌아본 세빈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태준은 자기도 모르게 쿵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말았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타박타박 다가온 세빈이 문을 열더니 태준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외삼촌?”

태준은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더듬었다. 세빈의 입을 단속시킬 만한 간식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어디 데려가서 사 줄 시간 또한 부족했고. 태준이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세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근데 외삼촌이 여기는 왜 왔어? 나는 엄마가 데리러 온다고 했었는데?”

“그게…….”

태준이 버벅거리는 사이, 수호가 의자에서 내려와 다가왔다.

세빈이 태준에게 다가가 서는 수호를 의아하게 쳐다보다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외삼촌 윤수호 데리러 온 거야? 외삼촌이 윤수호를 왜…….”

세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수호의 손을 잡고 한걸음 성큼 들어온 태준이 등 뒤로 문을 닫았기 때문에. 주춤 물러나는 세빈과 눈을 마주하고 앉은 태준의 눈빛이 더없이 간절하게 빛났다.

“세빈아.”

초조함에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태준이 한 손으로 세빈의 어깨를 부여잡고 입을 열었다.

“외삼촌이 나중에 엄-청 크고 맛있는 초코아이스크림 사 줄 테니까 오늘 일은 못 본 거로 해 주라. 특히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 주고.”

세빈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태준이 안심한 얼굴로 세빈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급히 일어났다. 수호의 손을 꼭 잡으며 태준이 말했다.

“가자.”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야 한다. 태연이 오기 전에. 급한 마음에 태준은 불투명한 유리 너머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

문 앞에 선 늘씬한 인영을 보고 몸을 굳혔다.

굳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든 태준은 태연을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누, 누나.”

선글라스를 쓴 채로 조소를 머금고 있던 태연이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선글라스가 벗겨지고 드러난 두 눈은 무서울 정도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이 태준과 수호를 느릿하게 훑었다. 맞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도. 다시 태준을 보는 태연의 눈빛은 이제 흉흉하기까지 했다. 입가에 맺혀 있던 조소는 사라진 지 오래.

“너.”

꿀꺽. 태준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따라 나와.”

서늘하게 읊조린 태연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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