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57화 (57/109)

#57. 삼켜지다

태준은 마른침과 함께 숨을 조용히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밤에요?”

묘한 분위기를 희석하려 태준이 웃음 지으며 물었다.

선혜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태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차 가셨다.

뭘까 이건. 유혹인가.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정말 말 그대로 잠시뿐이었다. 태준이 머리를 흔들며 탈탈 털어버렸기 때문에.

아까부터 아픈 사람을 두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정신 차려, 신태준.’

아파서 그런 거다. 혼자 아픈 게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운데.

태준은 홀로 미국이란 낯선 땅에서 처음 맞이한 겨울날 감기에 걸려 골골댔던 경험을 떠올리며 합리화를 했다.

자꾸 이런 합리화를 하는 것은, 선혜의 저 말과 눈빛과 지금의 행동이 유혹 나부랭이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머리에 새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합리화가 머릿속에서 엉망진창으로 꼬여대기 시작했다. 수영장 레인을 수십 번 왕복한 것처럼 거세게 뛰는 심장이 그에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씻고…… 올까요?”

이런 멍청한 말을 내뱉고 만 것은.

자기가 내뱉고도 놀라 돌처럼 굳어 있는 때였다.

선혜가 웃음을 터트렸다. 비눗방울이 터지듯 맑고 쨍한 웃음이었다.

태준의 손을 놓아주고 똑바로 누워 손으로 눈을 가린 채로 선혜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한참을 웃었다. 이어지는 웃음은 태준의 자괴감과 수치심에 부채질하는 격이었고 덕분에 태준의 두 귀가 눈에 띄게 빨개졌다.

한참 할 말을 찾아 버벅거리던 태준이 원망스럽게 선혜를 쏘아보았다.

뒤늦게 알았다. 이 여자가 자기를 골려 먹었다는 사실을.

“웃지 마요.”

울지 말라는 말에 울음을 터트리는 게 순리이듯, 태준의 말에 오히려 선혜의 웃음소리는 점차 커져만 가고.

“아, 웃지 말라니까요? 자꾸 웃으면 나 집에 갑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태준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선혜는 그런 태준을 바라보다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이리 와요.”

태준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선혜가 짚은 옆자리와 선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보채듯, 선혜가 다시금 옆을 툭툭 두드렸다.

“이리 오라니까요.”

“아, 내가 무슨 강아집니까? 개예요? 그렇게 부르면 갈 줄 알고? 어?”

입과 몸이 따로 논다. 성을 잔뜩 내면서도 태준은 침대를 돌아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옆에 앉았다. 그런 태준을 보는 선혜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선혜를 힐끔 쳐다본 태준은 풀썩 몸을 뉘었다. 그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버렸다. 반듯이 누워 있던 선혜는 작게 키득대며 태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선혜가 손을 뻗어 이불자락을 슬그머니 내리자 태준이 작게 원망 서린 눈으로 보다 물었다.

“나 놀리니까 재밌어요?”

“네.”

선혜의 대답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반응이 귀여워서.”

귀엽다니. 어처구니없어서 태준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지금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 절대 저런 말을 못 할 텐데.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자 자꾸만 옛날 일이 생각이 났다. 비에 젖은 몸으로 서로를 정신없이 탐했던 그때 일이. 지금 선혜의 모습이 너무 무방비해서 더욱 그러했다.

차마 선혜의 얼굴을 더 볼 수가 없어 다시 이불을 끌어 올리는데 선혜의 손이 다시 이불을 내렸다.

다시 덮고, 내리고. 먼지가 작게 일어나는 실랑이가 한참이나 이어지다가 이내 선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불을 내린 선혜가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태준은 결국 낮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곧 태준은 선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제 위에 있던 이불을 덮어주고,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려 주고. 아까처럼 완연하진 않지만 아픈 기색이 조금은 남아 있는 선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이제 좀 괜찮아요?”

선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덕분에요.”

덕분에요. 그 말에서 오는 뿌듯함이 꽤 컸다.

“좀 더 자요. 아직 다 안 나은 것 같은데.”

선혜는 자지 않고 태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손을 뻗더니 태준의 손을 잡았다. 눈을 감은 채로 선혜가 입을 열었다.

“잔다고 어디 가면 안 돼요.”

선혜의 손을 꼭 잡으며 태준이 말했다.

“안 가요. 절대.”

안심한 얼굴로 선혜는 눈을 감았다. 작은 장난에도 금방 지쳐버렸는지 곧 잠이 들었다.

새근거리며 잠든 선혜와는 달리 태준은 쉬이 잠들지 못했다.

당신은 모른다. 내 안에 얼마나 커다랗고 음흉한 늑대가 사는지.

태준은 선혜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오늘만이에요.’

손만 잡고 자는 건.

깊어진 눈으로 선혜를 보던 태준은 이내 억지로 잠을 청하며 눈을 꼭 감았다.

*

경애의 집은 선혜가 사는 동네와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복잡한 번화가의 불빛이 멀찌감치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작은 동네. 한때 부촌이었다지만 개발 시기를 놓쳐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곳이다.

낡은 양옥집이 몰려 있는 그곳에서 가장 아담하고 깨끗한 집이 있었다.

낮에는 파란 지붕이 새파랗게 빛나고 잔디가 반짝거리는. 어두운 밤에는 노르스름한 조명이 불을 밝히는 소박한 곳.

그곳이 바로 경애의 집이었다.

작은 마당을 낀 주택은 베란다를 하나 끼고 있었는데 난간을 없애 시골집의 툇마루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위에 나란히 앉은 수호와 경애는 냉장고에서 묵혀 물렁거리는 복숭아와 자두를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엄마는 아직도 연락 안 돼?”

자두를 한 입 크게 베어 문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숭아를 깎던 경애가 물었다.

“아빠는?”

“아까 엄마 다시 잔다고 연락 온 뒤론 없어요.”

“둘 다 잠들었나 보네.”

“그런가 봐요.”

경애가 무심한 수호의 표정을 살피다가 물었다.

“수호야. 아빠 생기니까 좋아?”

쑥스러워서 말을 안 하거나, 부정하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다행이에요.”

복숭아를 깎던 경애의 칼이 멈칫했다. 고개 들어 바라본 수호의 얼굴은 영 어린아이 같지 않았다.

“엄마가 아플 때 할머니랑 나 말고 또 있어 줄 사람이 생긴 거니까.”

경애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복숭아를 다시 깎기 시작했다.

“선혜 걔는 복도 참 많다. 우리 수호 같은 아들내미 둬서.”

칭찬임을 알아들은 수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베어 문 자두에서는 달콤한 맛이 났다. 문득 엄마에게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에게도.

“수호야. 엄마랑 아빠랑 빨리 결혼해서 셋이 살았으면 좋겠다. 그치.”

고개를 끄덕이던 수호가 문득 물었다.

“할머니도 같이 살면 안 돼요?”

“그럼 늬 아빠가 되게 불편할걸?”

“그럼 할머니는 계속 여기 혼자 사실 거에요?”

“그럼. 할머니는 여기 있을 거야. 떠나지 않고 오래오래.”

“할머니는 여기가 좋아요?”

이곳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아파트에 비하면 불편한 점이 많았다. 골목도 밤이 되면 제법 으슥했고. 때문에 선혜도 아파트로 이사하라고 잔소리를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처럼 경애는 변함없이 완강하다.

“응. 난 여기가 좋아.”

“왜요?”

“여긴 할머니의 꿈이 실현된 곳이거든.”

처음 듣는 말이기에 수호의 눈이 호기심에 반짝였다.

“할머니 꿈이요?”

“응.”

마치 전래동화를 읊어주듯 경애가 입을 열었다.

“파란 지붕에 잔디가 깔린 작은 마당이 있는 집. 거기서 사는 게 할머니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거든.”

그러면서 집을 둘러보는 경애의 얼굴에는 꿈을 이룬 사람 치고 제법 쓸쓸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이유를 모르는 수호는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바람이 춥다. 이만 들어갈까?”

깊어진 가을밤의 공기가 제법 서늘했다. 경애의 말에 팔을 어루만지던 수호가 힘차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과일 껍질만 남은 쟁반을 들고 한 손으로 수호의 손을 잡고 경애는 돌아섰다.

그리고 그 밤. 경애는 홀로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맥주 한 캔이 놓여 있었고.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마당을 응시하는 경애의 눈이 낮게 깔려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경애에게는 꿈이 있었다.

파란 지붕에 잔디가 깔린, 작은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

고아원에서 길러진 경애는 가족을 늘 갈망했다.

그리고 그 가족을 이루고 싶은 한 남자를 만났었지.

그때 경애의 나이는 꽃 같았던 스물셋이었다. 청춘을 다 바쳐 사랑했지만, 현실이란 벽에 부딪혀 다시 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던 마음.

개천에서 난 용이나 다름없는 석주를 홀몸으로 애지중지 키운 그의 어머니는 고아원 출신인 경애를 며느리로 들이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 했다.

그 현실을 납득하며 돌아섰지만 이미 그의 아이가 배 속에 있었다. 그의 딸인 선혜가.

주위에서는 지우라 권유했지만 차마 지울 수 없었고, 부족한 살림에 홀몸으로 아이를 낳아 기르며 온갖 힘든 일을 겪어 절망할 무렵, 꿈처럼 석주를 다시 만났었다.

만나며 다시 꿈을 꾸었지만, 좌절당했었지.

그래도 납득했다. 너에게는, 너를 홀몸으로 아득바득 키워온 어머니가 가장 소중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사랑하는 딸자식을 떼어놓는 심정이 생 심장을 뜯는 듯 아팠지만 그래도 견뎌냈다. 이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네가 부족함 없이 선혜를 키워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뿐인 가족을 잃었지만 그래도 꿈을 잃지 않았다.

파란 지붕에 잔디가 깔린 작은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사는, 그 꿈을.

성공하여 꿈을 이뤘음에도 가슴이 한동안 허전했던 거로 기억한다.

선혜를 다시 만나고 그 손주를 이리로 데려와 잠깐 같이 지냈던 그때도, 마음 한 켠은 공허했었지.

그 이유를, 경애는 모르지 않는다.

마당을 바라보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지고 벌어진 입술 새로 나직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선혜 너는 좋겠다.”

아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나의 이상을 현실로 이룬 네가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피식 나오는 실소가 공허하고 쓸쓸했다.

경애는 눈을 들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둥근 달이 경애의 집을 비췄다.

파란 지붕에 잔디가 깔린 마당이 있는 집에서.

나는 사실, 너와 함께 사는 꿈을 꾸곤 했었다.

“이제는 다 부질없어졌지만.”

혼잣말을 중얼거린 경애가 맥주 캔을 들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맥주의 탄산이 유난히 쓰라리고 따가웠다.

가슴도 마찬가지였고.

*

선혜가 잠에서 깨어난 건 새벽녘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잠든 태준의 얼굴. 어제 그에게 장난을 치고, 그의 반응이 귀여워 웃고, 장난을 쳤던 일련의 과정들이 느릿하게 머릿속을 스쳤다.

몸은 어제보다 확실히 가뿐해져 있었다. 지끈거리던 머리도 이제 더는 아프지 않았고 전신을 짓누르던 권태감도 없었다. 다만 몸이 몹시도 꿉꿉했다.

열이 올랐다 내리는 과정에서 땀이 꽤 많이 난 모양이었다.

당장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선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흘러내린 이불을 태준의 몸 위로 다시 덮어준 뒤 선혜는 침실에 딸린 욕실로 걸음을 옮기려다 멈칫했다.

고요한 새벽에는 모든 것이 소란스럽게만 느껴졌다. 방금 내디딘 발걸음을 멈춘 소리만 해도 그랬다. 혹여나 그 소리에 태준이 깨지 않았을까 싶어 돌아볼 만큼.

그러니 아마도 샤워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릴 수도 있으리라.

선혜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소리 없이 방을 나섰다. 그리고 거실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갈아입을 옷을 깜박하고 두고 왔다는 사실이 떠오른 건 몸에 바디워시를 바른 후였다. 수호가 주로 사용하는 욕실이기에 가운 한 벌조차 없었다.

몸을 가릴 만한 건 커다란 수건 한 장뿐. 덜렁댄 자신을 탓하며 한숨을 내쉰 선혜는 다시 샤워에 임했다.

며칠 씻지 못한 것처럼 꿉꿉한 몸을 씻어내느라 샤워는 생각보다 꽤 길어졌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땐 어느새 새벽 여명이 걷히고 동이 터 날이 환해져 있었다. 한 손으로는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다른 한 손으로는 수건의 매듭진 부분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침실로 가는 걸음에 긴장이 실렸다.

맨몸을 수건으로 가린 허전한 상태로 태준의 앞을 지나치게 될 거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마도 마주하면 꽤 민망한 상황이 될 터.

‘조심하자.’

조심, 또 조심. 선혜는 발소리를 죽이고 복도를 지나 거실로 접어들었다. 몇 걸음만 가면 곧 침실이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침실 앞에 당도했을 무렵. 문고리에 손을 막 가져다 대려는 그때였다.

쿵쿵쿵쿵.

문 너머로 커다란 발걸음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발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당황한 선혜가 놀라 멈칫거리는 사이 반대편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선혜는 동그래진 눈으로 굳어서 문 너머에 서 있는 태준을 바라보았다.

태준은 악몽이라도 꾼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선혜를 보는 다갈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선혜는 민망한 상황임에도 걱정스럽게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기, 왜 그…….”

선혜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태준이 갑작스레 손을 뻗어 선혜를 품에 안았기 때문이었다. 선혜는 커다래진 눈을 깜박이며 그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하아.

안도의 숨결이 귓가를 간질였다. 물에 젖은 귓가에 닿는 숨결은 더 뜨겁게 느껴졌다.

“또 가버린 줄 알았네.”

또? 하지만 의문은 잠시뿐. 선혜는 태준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가긴 어딜 가요. 여기 우리 집이잖아요.”

“그러게요. 근데…… 옆자리 빈 거 보고 철렁했어요.”

마음이 저릿했다. 그때는 정신없이 일탈의 현장에서 벗어나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때 도망친 자신의 행동이 태준에게 꽤 큰 상처였나보다.

선혜가 한쪽 팔로 태준의 등을 감싸 도닥였다.

“안 가요, 이제.”

“진짜죠?”

“응. 진짜.”

태준의 몸에서 몸을 뗀 선혜가 그의 눈을 마주하며 말해주었다.

“진짜로.”

아직도 불안이 가시지 않은 그의 얼굴을 보다, 선혜가 발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그의 뺨으로 향하던 입술이 잠깐의 생각을 거치고 우회를 했다. 안착한 곳은 태준의 입술 위.

“안 가요. 태준 씨가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딜 가.”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고 다정한 음성으로 말해주었다.

다행히 효과가 있는지 태준의 눈동자에서 불안이 차츰 가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선혜 또한 안심하며 그의 등을 끌어안은 때였다.

“……근데요, 선혜 씨.”

“네?”

“다 나은 거예요?”

“네. 그런 것 같…….”

나오려던 말들은 품에서 떼어낸 태준의 눈빛을 보는 순간 잦아들었다.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수건 매듭을 쥔 손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

불안도, 웃음기도, 장난기도 사라진 태준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선혜를 훑어내렸다.

수건 위로 드러난 둥근 어깨, 그 아래 둘러싸인 굴곡진 선. 엉덩이만 겨우 가린 수건 아래 곧게 뻗어진 다리. 바닥을 짚고 선 발. 오므라진 발가락들.

다시 눈을 들어 선혜의 얼굴을 본 태준의 시선이 뜨거웠다.

“저기, 태…….”

준씨.

뒷말은 태준의 입술 사이로 고스란히 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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