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56화 (56/109)

#56. 가지 마

선혜는 비상구 계단 한쪽에 앉아 있었다.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모습이 흡사 주저앉기라도 한 모양새다.

아래로 떨구어진 얼굴은 벌겠고 마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이 제법 거칠었다.

선혜는 지금 아팠다. 생각보다 아주 많이.

분명 어젯밤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때문에 약도 더 먹지 않고 기분 좋게 잠들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겨우 수호를 데려다주고 출근길에 약국에서 약을 사다 먹었지만 무용지물.

약은 이제 소용이 없었다.

- 여보세요?

“엄마.”

- 너 목소리가 왜 그러니? 어디 아파?

눈치 빠른 경애는 자신을 부르는 선혜의 목소리에 아픈 낌새를 금방 알아차렸다. 어차피 경애에게 숨길 의도는 없었기에 선혜는 말했다.

“응. 조금.”

- 조금은 무슨 조금이야.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진짜 별로 안 아파. 그냥 기침하느라 목이 좀 쉬어서 그래 보이는 거지.”

말을 끝내자마자 잔기침이 쏟아져나왔다. 선혜는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귓가에서 멀리 떼어내고 고개를 돌려 기침을 했다. 기침이 가라앉자 선혜가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대고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엄마. 혹시 수호 오늘 하루만 맡아 줄 수 있어?”

- 수호를?

“응.”

말을 잇는 선혜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수호 퇴원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나한테 옮아서 아플까 봐 걱정돼서.”

- 그럼 너는.

“병원 가서 주사 맞고 집에서 푹 쉬면 될 거야. 안 그래도 팀장님이 오늘 반차 주시고 내일도 쉬라고 연차 주셨거든.”

아픈 내색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만 나오는 기침 탓에 티가 나고 말았다.

선혜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린 기주가 결국에는 선심 쓰듯 휴가를 쓰라며 결재를 해주었다.

“그러니까 내일 저녁까지만 부탁 좀 할게, 엄마.”

- 그래. 수호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너 몸이나 잘 추슬러. 응? 알았지.

“응. 고마워.”

- 고맙긴. 얼른 끊고 병원이나 가. 갔다 와서 연락하고.

“응, 엄마.”

경애와 통화를 마친 선혜는 다소 안심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손바닥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눌러 짚었다. 오랜만에 아파 심란한 속을 겨우 달랜 뒤 선혜는 수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어, 수호야. 엄마야.”

- 응. 엄마 왜?

“오늘은 엄마 말고 할머니가 수호 데리러 갈 거라서, 그거 알려주려고.”

어떻게 하면 아이가 놀라지 않게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나. 잠시 사이를 두고 고민하는 때였다.

- 엄마 많이 아파?

먼저 선수를 쳐서 묻는 수호의 목소리에 선혜가 놀라 눈을 깜박거렸다.

“어, 응……. 근데 어떻게 알았어?”

- 아침부터 아파 보였단 말이야.

조금은 울먹거리는 아이의 음성. 괜히 목이 메어 선혜는 심호흡하고는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수호야. 엄마 지금 회사에서 조퇴하거든. 가서 푹 쉬고 내일이면 엄마 다 나아서 짠 하고 수호 데리러 갈게.”

- 응. 할머니랑 잘 있을게.

“그래. 착하다.”

아픈 와중에도 별수 없이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하루하고도 반나절 못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이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는 법.

“그럼 전화 끊을게, 수호야. 유치원에서 잘 놀다 오고.”

- 엄마.

전화를 막 끊으려는 찰나였다. 수호가 부르는 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이는데.

- 아프지 말고 힘내, 엄마. 그리고.

그리고.

- 사랑해, 엄마. 파이팅.

조금은 쑥스럽게 덧붙여진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는 끊어졌다.

선혜는 한참 동안 귓가에 핸드폰을 대고 서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눈시울이 다 붉어졌다. 아파서 감정 조절이 잘되지 않는 모양인지 아이가 사랑한다는 말에 감동하여 눈물까지 나려 했다.

‘나도 참 주책이다, 정말.’

자조적인 실소가 힘없이 새어 나왔다.

*

“선혜 어디 아프대요?”

소리 없이 옆으로 다가온 춘희가 물었다. 경애가 잔뜩 속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춘희에게 말했다.

“너 잠깐 카운터 좀 보고 있어.”

말을 마친 경애는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밥을 짓기 위해 미리 불린 쌀을 냄비에 쏟아부은 경애는 죽 재료로 쓸만한 것들을 모조리 찾아 도마 위에서 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죽을 만들고 있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경애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신 서방은 아나 모르겠네.”

선혜 성격상 아프다는 걸 말하지 않았을 것 같다.

게다가 제 아들도 못 알아본 태준의 둔한 눈치로 미루어 봤을 때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 들은 바에 의하면 같은 회사에 다닌다고 하더라도 부서가 달라 많이 마주치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행주로 손을 닦은 경애는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태준에게 미처 전화를 걸진 못했다.

너무 참견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위 달달 볶는 장모가 된 느낌이 들기도 했고. 잠시 고민하던 경애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뭐.’

걱정도 함께 내려놓은 경애는 죽을 마저 쑤기 시작했다.

태준이 눈치껏 알아채 주기를 속으로 바라면서 말이다.

*

선혜는 자차가 아닌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운전할 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회사 건물을 나서는 선혜의 입 밖으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로 일주일을 쉰 것도 모자라 이번엔 자기가 아프다는 핑계로 하루 반이나 휴무를 얻다니.

사무실을 나오기 전 뾰로통했던 지민의 얼굴이 생각났다. 애써 괜찮다고 했지만 난처해하던 민영의 얼굴도. 차라리 관심 없어 보이는 희재의 모습을 떠올리는 게 제일 마음 편했다.

내일까지 다 낫고 돌아오면 열심히 일해야지.

결의를 다지고 택시를 잡기 위해 큰길가로 나섰다.

택시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요새는 앱으로 택시를 부르는 게 대세라서 ‘예약’ 문구가 반짝이는 택시들은 맥없이 선혜를 스쳐 지나갔다. 그 때문에 한참이 지나도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그냥 택시를 부를까.’

늘 자가용을 타고 다녔기에 선혜에게 있어서 택시를 부르는 앱은 낯설기만 했다.

새로 깔고 로그인을 하고 조작을 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아파서 손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도 한몫했다. 겨우겨우 도착지점을 지정하고, 택시를 부르려고 손가락을 뻗는 그 순간이었다.

전화가 수신되며 화면이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선혜는 허무하게 핸드폰 화면을 보다가 발신인을 보았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태준이었다.

아침부터 외근을 한다고 했던 그였다. 웹 소설이 게시되는 플랫폼과 미팅이 있다고, 그리고 그 미팅이 길어져 점심까지 먹고 돌아온다고 했던 연락이 생각이 났다.

근데 이 시간에 왜 연락을? 의아하면서도 그에게 아파서 회사 빠진다는 말을 안 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난감했다.

말하면 엄청나게 걱정할 게 뻔하다. 그렇다고 반차까지 써서 회사를 조퇴하는 마당에 안 아프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떡하나 고민하다 통화가 끊어질까 싶어 전화를 받으려는 때였다.

미끄러지듯 갓길에 커다란 SUV가 섰다. 선혜는 고개를 들었고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더니 태준의 얼굴이 드러났다.

“타요.”

갑작스러운 등장에 선혜가 얼떨떨해하는데 태준이 운전석에서 내려 다가왔다. 한숨을 내쉰 그가 손을 뻗어 선혜의 이마를 짚었다. 손등을 뺨에도 대 본 태준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불덩이네, 아주.”

조수석 문을 열어준 태준이 말했다.

“타요, 얼른. 병원 들렀다가 집으로 데려다줄 테니까.”

“어떻게…… 알았어요?”

태준이 그 말에 핸드폰을 내밀었다.

[엄마 잘 부탁해요, 아빠.]

수호에게서 온 메시지가 화면에 떠 있었다.

언젠가 본 듯한 광경이다 싶어 기시감에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데 태준이 허리 숙여 부드럽게 눈을 맞췄다.

“얼른 갑시다, 병원. 수호가 걱정 많이 한다고요.”

선혜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뒤 태준은 근처 죽집에서 죽을 한 그릇 사서 선혜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경애가 먼저 왔다 간 건지 죽이 올려진 소담한 밥상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식지 않은 채로 말이다.

태준은 선혜를 식탁에 앉히고 죽을 한술 떠서 들이밀었다. 선혜는 받아먹는 대신 수저를 제 손으로 잡았다. 아프면서도 무안한 얼굴이었다.

“내가 먹을게요.”

“다 먹어야 해요. 아니면 먹는 데까지 최대한 먹고. 먹어야 낫는다고요.”

엄마 같은 잔소리에 선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준은 수호와 경애에게 병원을 다녀온 선혜의 상황을 알리고는 선혜가 죽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죽을 먹던 선혜가 문득 물었다.

“회사에는 안 돌아가 봐도 괜찮은 거예요?”

태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외근해서 할 일 다 마쳤는데 뭐 더 할 일이 있다고요. 참, 내일 연차 내서 쉬는 날이거든요. 또 아프거나, 뭐 필요하면 불러요. 바로 달려올 테니까.”

선혜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태준이 물었다.

“선혜 씨 차 회사에 있죠?”

“네.”

“차 키 줄래요? 밥 먹는 동안 제가 가져올게요.”

그러면서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때였다.

“저기.”

선혜가 조용히 태준을 불렀다. 태준이 일어나다 말고 선혜를 보았다.

선혜가 수저를 쥐고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태준을 보았다.

“밥 다 먹고 가면…… 안 돼요?”

태준이 빤히 쳐다보자 민망한지 시선을 내린 선혜가 죽을 뒤적이며 말했다.

“급한 거, 아니잖아요.”

혼자 밥 먹기 싫어서라는 이유는 숨긴 채, 그렇게 말했다.

“아…… 네 그렇죠.”

선혜의 말을 들은 태준의 엉덩이가 다시 얌전히 의자에 착석했다.

선혜는 자리에 앉은 태준을 힐끔 쳐다보고 다시 죽을 먹었다.

태준은 헛기침하다가 선혜를 보았다.

천천히 죽을 먹는 선혜는 평소와는 달리 잔뜩 약해진 모습이었다. 아픈 모습에 가슴이 짠하다가도 방금 마주했던 눈빛을 떠올리자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열기에 풀려 나른해진 눈빛으로 부탁하는 모습이 참…….

짝!

느닷없이 살 부딪히는 소리에 선혜가 놀라며 태준을 쳐다보았다. 제 손으로 자신의 뺨을 후려친 태준이 민망한 얼굴로 허허 웃으며 붉어진 뺨을 어루만졌다.

“날파리를 잡는다는 게. 하하…….”

“……?”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잠시뿐. 선혜는 마저 죽을 먹기 시작했다.

태준은 속으로 자신의 뺨을 사정없이 내려치고 있었다.

무심결에 아픈 모습이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미친놈.’

아픈 사람을 두고 대체 무슨 뻘 생각을 하는 건지.

자괴감 어린 한숨이 몹시도 뜨거웠다.

*

밥을 다 먹은 선혜가 약을 먹고 누워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태준은 선혜의 집을 나섰다.

회사 사람들이 혹여라도 볼까 조심하며 선혜의 차를 아파트로 끌고 와 찾기 쉬운 곳에 주차하고는 차 키를 두고 오기 위해 선혜의 집으로 올라왔다.

선혜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간 태준은 차 키를 거실 좌탁 위에 놓아두고 선혜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침실로 발을 들였다.

선혜는 쌕쌕거리며 잠이 들어 있었다. 약을 먹었다고는 하나 아직 효과가 돌지 않는지 이마가 뜨끈했고 숨이 가빴다. 간간이 앓는 소리도 내고 있었고.

태준은 열을 식혀 주기 위해 물수건을 하나 만들어와 선혜의 이마 위에 얹어 주었다. 아무래도 바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열이 좀 떨어지는 거라도 보고 가야지.

그렇게 얼마나 선혜의 옆을 지키고 있었을까.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점점 기울더니 붉은 노을빛이 바닥에 깔렸다.

시간을 확인한 태준은 선혜를 깨워서 저녁을 먹여야 하나, 하다가 그냥 재우기로 마음먹었다. 비로소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든 선혜를 억지로 깨우는 게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혹시나 잠에서 깬 선혜가 배가 고플까 하여 작은 그릇에 죽을 담아 잘게 썬 김치와 함께 쟁반에 올려 침대 옆 작은 협탁에 올려놓았다. 배고프면 먹으라는 작은 쪽지와 함께.

이제 가야지.

‘물수건만 새 걸로 바꿔 주고 가자.’

태준은 머릿속에 든 생각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런데 다시 차가워진 물수건을 선혜의 이마에 올려놓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때에 선혜가 잠에서 깼다.

“아, 미안해요. 너무 차가웠나.”

“……이제 가는 거예요?”

“네. 참, 여기 죽 놨는데. 지금 먹을래요?”

선혜는 대답도 하지 않고 빤히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잠에서 막 깬 눈빛은 아까보다 훨씬 나른해져 있었다. 잠에 반쯤 취해서 더욱 그러했다.

노을빛을 등진 선혜의 얼굴에 드리운 음영이 짙었다. 어쩐지 시선을 뗄 수 없어 한참 내려다보다가 태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메마른 선혜의 입술이 태준의 시야에 들어왔다. 물이라도 갖다 줄까 싶어 몸을 돌리는 때였다.

하지만 태준은 몸을 완전히 돌리지 못했다. 소맷자락을 잡아챈 강한 힘 때문에. 선혜의 하얀 손이 태준의 셔츠 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가지 마.”

짧지만 강한 한마디.

약해진 선혜의 눈빛이 잘게 떨려 왔다. 달싹이는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있기…… 싫어.”

소맷자락에서 내려온 선혜의 손이 태준의 손을 살며시 움켜잡았다.

태준은 움찔 몸을 떨고는 선혜를 보았다.

선혜는 애처롭고, 쓸쓸하게 태준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짧고, 강하게 말하길.

“같이 있어 줘.”

그 말이 태준의 심장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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