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작은 바람
수호를 집에 데려다주는 길. 운전하던 태준은 빨간불에 차를 정차하고 옆에 앉은 수호를 돌아보았다.
“전화 안 받으셔?”
“네.”
귓가에서 핸드폰을 떼어낸 수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영 강습이 끝나고 때마침 점심때라 선혜와 셋이서 밥이라도 먹을까 했는데 선혜가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주무시나?”
“그래도 전화 몇 번 하면 깼단 말예요.”
수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핸드폰을 쳐다보고, 그런 수호와 핸드폰을 번갈아 보는 태준의 얼굴에도 걱정이 서렸다.
혹시 몰라 자신의 핸드폰으로 통화를 시도하지만 긴 신호음 끝에 들리는 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알림음.
‘설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무슨 일 있나.”
태준이 속으로 생각한 말을 수호가 혼잣말로 읊조렸다.
“걱정하지 마. 그냥 주무시는 거겠지.”
태준은 수호를 안심시키고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수호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파란 불로 바뀌는 신호등. 태준은 속력을 높여 선혜의 집으로 향했다.
*
엘리베이터 안. 수호는 옆에 서 있는 태준을 힐끔거렸다.
전에 없이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잔뜩 좁힌 채 다리를 달달 떨고 있다. 좀처럼 한 자세로 서 있지 못하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팔짱을 끼고 한쪽 어깨를 주무르기도 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어른스럽게 달랠 때는 언제고, 정작 자신이 더 걱정하는 모습이라니.
외려 어린아이인 자신이 달래주어야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 엄마 자다가 전화 못 받은 적 많아요.”
“그래?”
“네.”
위로차 건넨 거짓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이야 회사에 다니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해서 덜하다지만 프리랜서로 재택근무를 할 때는 한 번 잠들면 좀처럼 깨지 못하는 선혜였다.
지난 일주일 내내 밤을 지새워 가면서 자신을 간호했던 엄마임을 안다. 오늘 아침에도 피곤해 보였으니 피로가 풀리려면 수면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었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한 번 그러긴 했었다. 수호에게 컵라면을 먹였다고 혼이 났던 날.
생각보다 잠이 많은 편이구나.
새삼 선혜에 대한 사실 하나를 깨닫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선혜의 집이 있는 층에 도착해 있었다.
수호가 앞으로 척척 걸어 나가고 태준은 그 뒤를 따랐다.
작은 손이 야무지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이 열렸다. 태준이 열린 현관문 너머를 보며 들어가도 되나 싶어 머뭇거리는 사이 수호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안 들어오고 뭐 하세요?”
당연하다는 듯 묻는 그 말에 마음이 더욱 편해졌다.
태준은 미소를 지으며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갔다.
“엄마, 나 왔어-.”
수호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총총 뛰어들어갔다. 태준은 신발을 벗으며 느릿하게 그 뒤를 따랐다.
문이 반쯤 열린 침실로 쏙 들어간 수호가 선혜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 수호 왔구나…….”
태준은 멀찍이 서서 고개를 빼고 침실 안을 쳐다보다가 선혜의 목소리가 들리자 안심한 얼굴을 했다. 수호의 말대로 정말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안도의 숨을 살짝 내뱉던 태준은 뒤늦게 집을 눈으로 훑었다. 술에 취한 선혜를 데려다주며 들른 전적이 있긴 하지만, 그땐 경황이 없었기에 집을 구경하지도 못했었다.
화이트 톤으로 모던하게 꾸며진 집은 선혜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듯 깔끔하고 차분했다. 중간중간 수호의 그림이 붙여져 있고, 장난감이나 인형 따위가 널브러져 있는 걸 제외하면 그랬다.
거실을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문득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도 깔끔하게 정리가…….
움직이던 그의 시선이 별안간 우뚝 멈췄다.
하얀 정수기 옆에 놓인 손바닥만 한 빨간 박스가 옥에 티처럼 선명했다. 뭔가 싶어 쳐다보는데 박스 위에 흰색으로 적힌 글귀가 보였다.
국민 진통제 혹은 해열제라고 불리는 약의 상품명이었다. 그 옆에는 먹다 만 물컵이 놓여 있었고. 약을 먹은 흔적이었다.
약이라니.
‘어디 아픈가.’
태준의 시선이 다시금 침실로 향하는 때였다.
“배고프지?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
수호의 손을 붙잡고 다정하게 말하며 침실을 나오던 선혜가 태준을 보고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시간을 확인하고 부랴부랴 나오는 선혜를 보며 수호가 미처 태준이 와 있다는 말을 하지 못한 탓이었다.
“수호 데려다주느라요. 전화 안 받으셔서 걱정되기도 했고.”
태준이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자다 깬 모습을 보이는 게 민망한지 선혜가 버릇처럼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태준이 그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근데 선혜 씨 어디 아파요?”
선혜가 눈을 들어 태준을 보았다. 잠이 조금 달아난 얼굴 위로 그녀의 생각이 그대로 투영되는 듯했다. 어떻게 알았지?
“약이 있길래.”
“아.”
선혜가 생각난 얼굴로 정수기 쪽을 돌아보았다. 아까 미처 정리하지 못한 약 박스와 물컵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차 싶은 얼굴로 바라보던 선혜가 어물쩍 대답했다.
“머리가 좀 아파서요.”
“머리가요? 왜요?”
“그냥 편두통이에요. 신경 쓰지 말아요.”
에둘러 말했지만, 태준은 좀처럼 걱정을 덜어내지 못한 얼굴이었다. 선혜가 괜찮다는 의미로 살짝 웃어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머리 많이 아파? 내가 호 해 줄까?”
수호가 옆에서 손을 꼭 부여 잡은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선혜가 괜찮다며 수호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무용지물. 난감한 얼굴로 수호를 보다가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태준은 수호와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표정을 짓고 선혜를 보고 있었다. 두 남자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달래나. 그런 고민을 하는 때였다.
꼬르륵.
누군가의 배곯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소리와 크기로 보았을 때 주인공은 아마도.
선혜와 수호의 시선이 동시에 태준을 향했다. 태준은 배를 손으로 감싼 채 잔뜩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그게…….”
어쩔 줄 몰라 하며 수호와 선혜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선혜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태준의 귀가 빨개졌다.
웃음을 갈무리 지은 선혜가 말했다.
“온 김에 밥 먹고 가요.”
*
선혜는 집게 핀으로 머리를 올리고 앞치마를 두른 채 요리에 임하고 있었다. 인덕션 위에서는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 위에서는 호박전이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수호가 까르륵 웃는 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수호와 태준은 블록 높이 쌓기 놀이를 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져 주는 거겠지만 태준은 벌칙대로 수호에게 계속 이마를 내어놓고 있었다.
수호의 딱밤이 아프면 얼마나 아프겠냐마는 맞으면 엄살이라는 엄살은 다 부려가며 쓰러지는 시늉까지 했다. 그게 재밌는지 수호가 연신 깔깔 웃어댔다.
‘잘 놀아 주네.’
선혜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문득 이마를 문지르던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선혜는 그와 잠시 눈을 맞추다 고개를 돌려 요리에 임했다.
호박전을 접시에 올려 담고 찌개 간을 보고 있는데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태준이 서 있었다.
“뭐 도와줄 거 없어요?”
아까와 또 같은 걸 묻는 태준이었고.
“수호랑 놀아주는 게 도와주는 거라니까요.”
같은 말로 대답하는 선혜였다.
그런데 태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귓가에 속삭이기를.
“수호가 엄마 도와주래요.”
선혜가 놀란 얼굴로 옆을 돌아보자 태준이 빙긋 웃었다. 설마 하는 얼굴로 수호 쪽을 돌아보자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 중인 옆모습이 보였다.
옆에서는 태준이 팔을 둥둥 걷어붙이고 있었다.
“밥이라도 풀까요? 식탁 행주로 닦고, 수저랑 젓가락도 놓고?”
선혜는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준은 수저와 젓가락을 식탁에 세팅했다. 말해 주지 않았는데 수호의 수저랑 젓가락을 척척 찾아 올려놓았다. 밥공기도 마찬가지. 선혜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요리를 마무리 지었다.
“근데 아픈 건 괜찮아요?”
태준이 문득 물어옴에 선혜가 한숨 쉬듯 대답했다.
“안 아프다니까요.”
“진짜요?”
선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팠으나, 약이 효과가 좋았는지 지금은 증상이 싹 사라졌으니까. 약을 먹고 푹 잔 덕분이었다.
“간이나 봐 봐요.”
선혜가 찌개를 한술 떠서 내밀자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다 입을 벌려 받아먹은 태준의 눈이 반짝였다.
“맛있어요.”
“수호랑 같이 앉아 있어요.”
“다 끓인 거 아니에요? 내가 가져가죠, 뭐.”
그러더니 주방 장갑으로 번쩍 찌개 냄비를 들어 올렸다. 더는 말리지 못하고 선혜는 호박전이 담긴 접시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된장찌개와, 호박전. 소시지 야채 볶음, 김치, 계란말이, 그리고 김.
꽤 푸짐한 점심상이 차려졌다.
“수호야, 밥 먹자.”
태준이 부르는 소리에 소파에서 수호가 다가오더니 식탁 앞에 앉았다.
선혜도 앞치마를 풀고 자리에 앉았고 태준도 자리를 잡았다.
태준은 수호의 식사를 보조했고 괜찮다며 툴툴거리면서도 수호는 태준이 수저 위에 올려놓는 반찬을 얌전히 받아먹는다. 덕분에 선혜의 수고가 한층 덜어졌음은 물론이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낯선 식탁의 풍경을 선혜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 하나가 더해졌을 뿐인데 전보다 훈훈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무엇보다 따듯했다.
“자, 선혜 씨도 호박전 하나.”
이 남자 덕분이겠지.
밥 위에 호박전을 올려놓는 태준을 보던 선혜는 태준 몰래 작게 미소지었다.
셋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이 모습이 일상이 되었으면 하고 선혜는 바랐다.
*
집으로 가는 내내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맛있는 밥, 그것도 선혜가 해준 밥으로 배가 불렀으니 노래가 안 나올 리가.
“요리도 잘하네.”
피식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태준은 사거리에서 우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섰다.
그런데 도로 위 풍경이 낯이 익었다. 왜 그런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태준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경애의 국밥집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였지, 참. 반가운 얼굴로 가게를 응시하는 태준의 눈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가늘어졌다.
가게 근처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남루한 차림새에 모자를 눌러쓴 남자. 희끗희끗한 머리를 보니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으로 보였다.
오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멀리서 지켜보는 그 모습이 수상쩍어 시선을 사로잡았다. 뭔가 싶어 지켜보는데 몸을 돌린 남자가 태준이 서 있는 교차로 신호등으로 다가와 섰다.
가까이 보니 키가 컸다. 잠시 모자를 벗고 머리를 헝클이는데 드러난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태준은 자기도 모르게 뚫어지게 남자를 쳐다보았다.
곧 파란불이 켜졌다. 남자는 아쉬운 얼굴로 뒤를 잠시 돌아보다가 신호를 건너갔다.
태준의 시선이 줄곧 남자를 좇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이라도 하는 듯 자꾸만 모자를 눌러쓰는 남자의 뒷모습을.
곧 파란 불이 켜지고 차를 출발시켰음에도 남자의 잔상이 머릿속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태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처음 보는 남잔데.
왜 이렇게 낯익은 느낌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
다음날.
경애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바쁜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유, 사장님. 너무 잘 먹었어요! 여기 근처 식당 중에 최고네, 최고야.”
얼마 전부터 빌라 건축이 시작된 건설현장. 인부들을 끌고 식사를 하러 온 소장이 카드를 내밀어 계산하며 호쾌하게 말을 걸었다.
“감사해요. 다음에 또 오세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우리 사장님이 또 워낙 미인이신가.”
능글맞게 웃음 지은 그가 경애의 손등을 슬쩍 쳤다. 웃으며 바라보던 경애의 얼굴이 잠깐 굳었지만 이내 풀렸다.
“얼른 가세요.”
다신 오지 마세요.
그 말을 속으로 꾹 삼키며 인사를 마친 경애는 소장이란 남자가 나가자마자 질색한 얼굴로 손을 탈탈 털었다.
“하여간 저런 변태 같은 인간들 꼭 있다니까.”
식당을 운영하면서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었지만 겪을 때마다 늘 소름이 돋았다. 젊은 시절보다는 덜하다고는 해도 저런 식으로 집적대는 인간이 한두 명씩은 꼭 있었다.
진저리를 치며 인부들이 먹고 나간 테이블을 정리하러 가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한 경애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얘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래?”
선혜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