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54화 (54/109)
  • #54. 아빠라고 불러 봐

    선혜는 아파트 정문 앞에서 수호와 함께 태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수영장을 오고 갈 때, 그리고 유치원 등·하원을 할 때 태준이 수호와 동행하기로 했다. 태준의 제안이었다.

    태준은 선혜에게서 육아에 대한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어했고 동시에 수호와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내고 싶어했다.

    그 마음이 고맙고, 또 한편으로는 기특하기도 하여 선혜는 허락했다. 물론 수호의 동의 하에 결정된 것이었다.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멀리서 태준의 차가 가까이 다가와 섰다. 차에서 내린 태준은 어제보다 훨씬 멀끔한 모습이었다.

    “왜 나와 있어요. 아직 더운데. 도착하면 전화한다니까.”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직 날이 무더웠다.

    걱정스럽게 말하며 다가오는 태준에게 수호는 휴대용 선풍기를 척 하니 내보였다. 괜찮다는 의미였다. 그런 수호가 귀여워서 태준은 웃으며 수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선혜가 말했다.

    “수호 좀 잘 부탁할게요.”

    “별말씀을. 이따가 안전 귀가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사모님.”

    장난스럽게 말하는 태준에게 선혜가 작게 미소지었다.

    선혜는 수호에게 손 인사를 건네고 태준과 손 인사와 더불어 눈짓을 주고받았다.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선혜는 돌아섰다.

    돌아서는 순간 얼굴에 서려 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침부터 지친 얼굴을 한 채로 선혜는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와 곧장 부엌으로 들어갔다. 물을 한 컵 따르고 알약을 물과 함께 삼켰다. 집에 남아 있던 마지막 감기약이었다.

    약을 먹은 선혜는 곧바로 침실로 들어갔다. 권태감과 나른함에 몸이 쓰러지듯 침대에 눕혀졌다. 이마에 손등을 올려놓자 애매한 열기가 느껴졌다.

    많이 아프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괜찮지는 않은 상태.

    온몸이 쑤시는 전신 통증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감기 증상이 없었기에 병원에 가기도 뭐했다.

    이럴 땐 미량의 약과 휴식이 알맞은 치료인 법.

    수호도 태준에게 맡겼겠다, 선혜는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

    주말 아침. 나들이하러 가는 사람이 꽤 많은지 도로 위는 차들로 빼곡했다.

    “차가 밀리네.”

    얼마 나아가지 못하고 신호가 걸리고, 차가 움직이다 멈추기를 여러 번. 태준은 나른한 표정으로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은 채 운전에 임하고 있었다.

    그런 태준에게 수호의 눈길이 힐끔힐끔 향했다.

    그 시선을 느낀 태준이 빨간불에 차를 정차시키고는 수호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눈이 마주치고 수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수호, 아빠한테 뭐 할 말 있어?”

    “아뇨. 딱히.”

    “근데 왜 아까부터 힐끔힐끔 쳐다봐? 아빠 얼굴에 뭐 묻기라도 했어?”

    태준이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면서 물었다. 수호는 눈을 다시 들어 그런 태준을 보았다.

    의아하여 양 눈썹이 삐딱하고 얼굴이 살짝 일그러져 있음에도 잘생긴 얼굴. 뭐 묻었냐고 하는 질문에 굳이 답을 하자면, 잘생김이 덕지덕지 묻었달까.

    힐끔힐끔 쳐다본 이유도 별거 없다. 그냥 운전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그랬다. 그렇게나 잘난 얼굴을 오래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제 속이 근질거려 수호는 버티지 못하고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런 수호의 속을 알 리 없는 태준은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다.

    “신호 바뀌었어요.”

    수호가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하는 말에 태준이 앞을 바라보았다. 수호의 말대로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어 있었다. 태준은 다시금 운전에 임했지만 얼마 안 가 다시 도로에 멈춰 서고 말았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강습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하거나 늦을 것 같았다.

    “강습 늦으면 아빠랑 둘이 수영하고 놀까?”

    꽤 반가운 제안인지 수호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습 끝나고는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엄마랑 셋이서.”

    “네.”

    “그리고 셋이서 또 장 보러 갈까?”

    “네.”

    “다음 주에는 어디 놀러도 가자. 가까운 공원이든, 놀이공원이든.”

    “네.”

    태준은 네네 봇처럼 대꾸하는 수호를 힐끔 쳐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다음에는 아빠 집도 놀러 오고.”

    “네.”

    “조만간 셋이 여행도 가 보고.”

    “네.”

    “아빠를 아빠라고 불러도 보고.”

    “……?”

    대답하려던 수호가 입을 반쯤 벌렸다가 멈칫했다. 곧 눈을 찌푸리며 태준을 돌아본 수호는 장난스럽게 씩 웃고 있는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슬쩍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본 수호가 툴툴댔다.

    “뭐예요, 갑자기.”

    “뭐긴 뭐야. 아빠가 아들한테 아빠 소리 듣겠다는데.”

    “……아직 어색하단 말이에요.”

    “어색?”

    수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색하다는 말에 얼굴을 살짝 찡그린 태준이었지만 이내 납득이 되었는지 표정을 애써 풀었다. 그래. 엄마밖에 모르던 애가 갑자기 아빠 소리를 하긴 어렵겠지.

    그래도 괜히 섭섭하다. 서운하기도 하고.

    “나 참. 네가 무슨 홍길동이냐. 아빠를 아빠라고 못 부르게.”

    그래서 괜히 툴툴거리게 되었다.

    “홍길동이 누군데요?”

    “있어. 옛날에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던 아주아주 불쌍한 사람.”

    어른답지 못하게 태준의 입이 댓 발 튀어나와 있었다. 수호는 그런 태준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리고 샐쭉거렸다.

    ‘어른인데 왜 참을성이 없지.’

    기다리면 어련히 알아서 불러줄 텐데.

    성격 참 급하다 싶었다.

    *

    강습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하게 되어 수호는 수영 강습에 참여 중이었다. 늘 그렇듯이 태준은 강습 장소와 가장 가까운 레인을 왕복하면서도 간간이 선베드에서 휴식을 취할 겸 수호 쪽을 주시 중이었다.

    수호는 열심히 수영 강습에 참여 중이었다. 전과 다른 게 있다면 몇몇 여자애들과 가까이 지낸다는 사실이다.

    강습 초반에는 쭈뼛쭈뼛 다가가 수호에게 이것저것 묻더니만 지금은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수호를 향한 호감을 여실히 보이는 여아들과는 다르게 수호의 표정은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철벽 치는 게 완전 지 엄마네.’

    이성을 대하는 눈빛을 비롯한 태도가 선혜와 판박이였다. 외모는 자신, 성격은 선혜. 둘을 반반씩 닮은 수호를 보니 괜히 흐뭇해져 자꾸만 웃음이 샜다.

    어느덧 강습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수영을 더 하기보다 강습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태준은 선베드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기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태준은 씩 웃는 여자를 보고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손 다 나으셨네요?”

    그때 그 여자였다. 집요하고 또 집요했던.

    태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에 경험해 본 바, 붙들리기 전에 피하는 게 답이었다.

    몸을 돌리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번처럼 앞을 가로막을 만한 여지를 완전히 차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손을 붙들렸다.

    손이라니. 태준은 사색이 되어 뒤를 돌아보았다. 곧장 뿌리쳤지만, 여자는 굴하지 않았다. 당황한 기색 하나도 없이 웃기까지 했다.

    “지금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왜 다짜고짜 남의 손을 잡아요?”

    언성이 저절로 높아졌다.

    선혜랑도 몇 번 잡은 적이 없는 손인데.

    진심으로 화가 났다.

    하지만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쪽이 저 무시하고 가니까 그렇죠.”

    오히려 태준의 탓을 하는 얼굴이 뻔뻔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태준은 치밀어오르는 울화를 겨우 내리누르고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저, 유부남입니다. 와이프도 있고, 애도 있다고요.”

    여자는 가볍게 실소했다.

    “반지, 안 보이는데요?”

    그 말에 태준은 텅 빈 왼손 약지를 더듬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 하지 마시고.”

    여자가 덥석 팔짱을 꼈다. 가슴을 은근히 팔에 누르기까지 했다. 태준이 눈을 부릅뜨고 여자를 보았다. 그 모습이 꽤 흉흉하여 주눅이 들 법도 한데 여자는 여유롭게 웃었다.

    “자, 저랑 밥 같이 먹어요. 제가 살…….”

    태준이 막 여자를 뿌리치려는 때였다.

    “아빠!!”

    우렁찬 목소리가 수영장을 쩌렁쩌렁 울린 것은.

    어찌나 크게 외쳤는지 메아리가 되어 계속해서 허공을 돌았다.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이 목소린…… 다름 아닌 수호의 목소리.

    태준은 천천히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수호가 있었다.

    잔뜩 화가 난 얼굴의 수호가.

    .

    .

    .

    얼마나 화가 났는지 수호는 얼굴이 다 벌겠다.

    씩씩거리는 모습이 꼭 딴 사람 같았다.

    수호는 수모랑 수경을 신경질적으로 벗어버리고는 힘주어 척척 걸어왔다. 수호의 걸음걸음마다 고여 있던 물이 사방으로 팍팍 튀었다.

    “아……빠?”

    태준과 팔짱을 끼고 있던 여자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여자의 팔에 힘이 빠진 틈을 타 태준은 얼른 자신의 팔을 빼서 거두고는 여자와 거리를 두고 섰다. 바로 수호 옆에. 쏙 빼닮은 태준과 수호를 번갈아 보는 여자의 시선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호는 비딱한 얼굴로 태준을 보다가 손을 내밀더니 태준의 손을 잡았다. 태준이 커다래진 눈으로 수호를 쳐다보았고 수호는 고개를 돌려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똑바로 보았다.

    “아줌마 뭔데 저번부터 자꾸 우리 아빠한테 집적거려요?”

    “지, 집적?”

    “네. 집.적.”

    여자의 턱이 힘없이 벌어졌다. 이내 손사래를 치면서 부정했다.

    “내가 언제 그랬어. 그런 적 없…….”

    하지만 수호는 변명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싫다는 사람한테 자꾸 들러붙는 게 집적거리는 게 아니면 뭔데요?”

    수호의 당돌함에 여자는 단숨에 기세가 꺾였다.

    태준의 손을 힘주어 잡은 수호가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 아빠 손은요, 우리 엄마만 잡을 수 있어요. 팔짱도 우리 엄마만 낄 수 있다고요.”

    수호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 아빠한테 집적거리지 마세요. 한 번만 더 그러면…….”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흐리던 수호가 서늘하게 내뱉었다.

    “우리 엄마한테 이를 거예요.”

    지극히 아이다운 말이었지만, 여자에게 있어서는 지독히도 무서운 말이었다. 애를 이토록 야무지게 키운 엄마라면 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으리라.

    심장이 철렁한 여자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이리저리 눈을 도록도록 굴리다가 뒤늦게 보았다. 자신을 향한 따가운 시선들을.

    수중 에어로빅을 나온 아주머니들이 다 들리게 여자 흉을 보고 있었다.

    “세상에, 겁도 없지. 아무리 간통죄가 사라졌어도 어떻게 유부남을…….”

    “내 말이. 남 보기 부끄럽지도 않나.”

    “쯧쯧쯧.”

    수치심에 얼굴이 벌게진 여자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사람들의 질타 어린 시선은 여자가 탈의실로 사라질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수호 또한 그런 여자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뜨거운 콧김을 흥 하고 뿜어냈다.

    “수호야.”

    그러다가 저를 부르는 태준의 목소리에 그를 쳐다보았다.

    태준은 한껏 감동한 눈으로 수호를 보고 있었다.

    “지금…… 아빠 지켜 준 거야?”

    그런 태준을 보는 수호의 얼굴이 씰룩거리는가 싶더니 손을 홱 놓았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태준이 미소지은 얼굴로 재빠르게 그 뒤를 쫓아갔다.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다시 잡았다. 수호는 태준을 곁눈질로 흘겨볼 뿐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태준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너 방금 아빠라고 부른 거 맞지?”

    “몰라요.”

    “모르긴 뭘 몰라. 응? ‘아빠!!’라고 부르는 거 다 들었는데. 메아리까지 쳐서 몇 번이나 울렸구만.”

    “아, 몰라요.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기는 뭘 안 나. 시치미 떼지 말고.”

    태준이 수호와 잡은 손을 흔들며 졸랐다.

    “또 불러 봐. 이번에는 다정하게, 응? 아빠- 하고. 응?”

    “아, 정말…….”

    “아, 한 번만-.”

    애한테 조르는 어른이라니.

    어이없어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수호는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반짝거리는 태준의 두 눈에는 기대가 만발해 있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부담이 되어 입이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빠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삐질 것만 같다.

    곰곰이 고민을 하고 있는데 문득, 어떤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곧 수호는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천천히.

    ‘아. 빠.’

    소리는 안 내고, 입모양으로만, 그렇게 말했다.

    아빠, 하고.

    두근거리며 바라보던 태준은 수호가 하는 양을 보더니 서서히 얼굴을 찡그렸다. 김이 빠진 얼굴이었다.

    그런 태준을 보며 수호가 새침하게 물었다.

    “됐죠?”

    기가 막혀서 태준의 입 밖으로 저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야, 너는 대체 어디서 그런걸…….”

    말을 하다 말고 태준은 멈칫했다.

    수영장에서 말 시키지 말라던 수호에게 자신이 했던 행동이 생각났기 때문에.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들이켠다더니.’

    태준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편 수호는 어이없어하는 태준의 얼굴을 힐끔거리다가 몰래 웃음 짓고 있었다.

    장난기 가득한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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