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52화 (52/109)
  • #52. 사위 사랑은 장모?

    선혜는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떴다. 미처 블라인드를 치지 못한 창문 너머로 눈 부신 햇살이 들이치고 있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선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처진다. 어제 너무 늦게 잠든 탓일까. 선혜는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고개를 들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현재 시각은 오전 열 시. 퇴원이 임박한 시간이었다. 선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침대에는 태준과 수호가 나란히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눈두덩이가 똑같이 부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새벽녘 일이 떠올랐다.

    부자 상봉은 꽤 요란하게 이루어졌다.

    달려온 태준이 병실 문을 열어젖히고 수호와 마주한 순간부터 눈물 콧물 바람이 폭풍처럼 일었다.

    답지 않게 아이처럼 엉엉 우는 수호. 술에 취해 잔뜩 감정이 격해진 태준.

    그런 둘의 시너지 효과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끅끅거리며 한참을 울었다.

    시간이 흐르고, 겨우 감정을 가라앉힌 태준이 수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왜 울고 그래, 수호야.’

    ‘아저씨, 미안해요. 나는 아저씨 싫다고 했는데. 막 못되게 굴었는데…….’

    ‘아냐. 아빠가 다 미안해. 아빠가 말 안해서 그런 거야. 우리 아들 알아보지도 못하고……. 수호 탓 아니야. 다 아빠 탓이야. 그러니까 미안해 하지 마. 응?’

    태준의 사과에 수호의 눈물 샘은 오히려 더 젖어 들었다. 그런 수호를 보며 태준은 웃으며 울었다. 울면서 웃었고. 그렇게 한참을 아이를 달래고 또 달래주었다.

    선혜는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짠한 마음으로 그 모든것을 지켜보았었다.

    울다 지친 수호가 태준의 품에서 늘어지자 태준은 아이를 다독여 침대에 눕혀주었다. 그리고 그런 수호의 옆에 웅크리고 눕는 태준을 선혜는 만류하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을 뿐. 새벽까지 술을 마신 데다 지칠 만큼 운 태준 또한 금세 잠에 빠져들었고 잠든 두 사람을 보다 선혜도 소파에서 잠을 청했었다.

    어제 일을 회상하며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때였다.

    수호가 눈을 떴다.

    “깼어?”

    손으로 눈을 비비던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느리게 눈을 끔벅거리던 수호가 제 옆에 누워 있는 태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태준을 보자마자 새벽 일이 떠올랐다.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화에 한달음에 달려와 주고, 못되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하는 말에 오히려 스스로를 탓하며 나무랐던 태준이었다. 그 모습에 차츰 무너지고 있던 마음의 벽이 힘없이 허물어져 내렸다.

    착한 아저씨다.

    아니…… 아빠지.

    세상에서 제일 착한, 우리 아빠.

    아빠라고 생각하니 새삼 달리 보인다.

    잘생긴 이목구비도, 큰 키도.

    질투의 이유였던 요소들이 이젠 자부심이 되어 가슴을 뿌듯하게 채웠다.

    괜히 가슴이 간질거려 수호는 몸을 꼼지락거렸다. 그런 수호의 몸을 태준의 팔이 단단히 껴안았다.

    엄마의 품보다 훨씬 크고 따듯한 아빠의 품.

    그런 아빠의 품에서 다시금 눈을 감으려는 찰나, 갑자기 수호가 얼굴을 확 찌푸리며 코를 틀어쥐었다.

    그 모습을 본 선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술 냄새나.”

    저런. 선혜는 탄식을 삼켰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선혜에게까지 술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데 가까이에서 마주 보고 누워 있는 수호한테는 더 진하게 느껴질 터.

    선혜가 아는 수호는 이런 상황에서 태준을 밀치고 일어나고도 남을 아이였다. 하지만 수호는 그러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더니만 코를 쥐고 있던 손을 떼고 눈을 감을 뿐.

    “으음…….”

    그런 수호의 속 사정도 모르고 나지막한 신음을 흘린 태준은 수호를 더욱 끌어안았다.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수호는 그런 태준을 밀치지 않고 꾹꾹 참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럽고 예뻐서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입을 가리고 슬며시 미소 짓는 때였다.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더니만, 경애가 들어왔다.

    “퇴원 준비는 다 했…… 어머.”

    빠른 걸음으로 들이닥치던 경애가 침대에 누워 있는 태준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 서방 아냐? 신 서방이 왜 여기서…….”

    “쉿.”

    혹여라도 그가 잠에서 깰까 싶어 선혜가 검지로 입술을 가리며 주의를 주었지만 이미 늦었다.

    놀란 경애의 목소리가 큰 탓에 태준이 잠에서 깨고 말았다.

    태준은 잠에서 덜 깬 눈으로 맞은편에 누운 수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수호도 피하지 않고 그런 태준의 눈을 응시하였다. 태준의 손길이 느릿하게 수호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나른한 미소를 지은 채 그가 물었다.

    “잘 잤어, 우리 아들?”

    “……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경애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선혜를 쳐다보았다. 경애가 입 모양으로 물었다.

    ‘말했어?’

    선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고 경애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한편, 태준은 수호의 부은 눈가를 손끝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어제 울어서 눈 부은 거 봐.”

    “……나만 부은 거 아닌데.”

    투덜거리듯 말하면서도 수호는 태준의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 모습이 기특하고 예뻐서 태준이 작게 미소짓는 때였다.

    “흠, 흠.”

    별안간 경애가 나지막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를 들은 태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반사적으로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뒤를 돌아본 태준은 경애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안녕하세요, 장모님.”

    “……풉.”

    느닷없이 경애가 웃음을 터트리자 태준은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터지려는 웃음을 눌러 참는 경애를 보고 있는데 옆에 서 있는 선혜가 말없이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왔다.

    ‘머리.’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하며 검지로 머리를 가리킨다. 그제야 제 뒤통수를 어루만지던 태준은 자느라 머리가 이리저리 뻗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둥지둥 손으로 눌러보지만 무용지물. 이내 머쓱하게 웃어 보이는 태준이다.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속으로 삼키는데 수호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선혜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앉아 있는 수호의 머리 또한 태준과 똑같이 뻗쳐 있었으므로.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 봐.”

    경애가 중얼거리는 말에 태준과 수호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태준이 장난스럽게 수호의 뻗친 머리를 눌러주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수호는 새침한 눈으로 태준을 쳐다보며 입을 비죽거렸다.

    그런 부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경애와 선혜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비슷하게 웃음 지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따듯하고 훈훈한 기운이 병실에 가득했다.

    *

    수호의 퇴원은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 퇴원 수속을 모두 마친 뒤 네 사람은 짐을 챙겨 주차장으로 갔다. 그다지 많지 않은 짐을 트렁크에 차곡차곡 넣은 태준이 트렁크 문을 닫으며 선혜에게 물었다.

    “운전 내가 할까요?”

    당연하다는 듯이 묻는 태준에게 선혜가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집에 같이 가게요?”

    “짐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아서 같이 정리해 주려고 했죠.”

    “뭐 하러 그래요. 피곤해 보이는데 얼른 집에 가서 쉬어요.”

    “별로 안 피곤한데.”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태준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몰래 하품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기도 했었다. 아쉬운 마음을 모르지는 않으나 선혜는 태준을 만류했다.

    “괜찮으니까 집에 가서 쉬어요. 짐 정리는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그래. 오늘만 날인가. 오늘은 가서 해장하고 푹 쉬어요.”

    경애까지 거들고 나서자 태준은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수호와 헤어지는 건 아쉬웠지만 경애의 말대로 오늘만 날이 아니었으니까. 숙취에 절은 오늘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태준은 수호를 바라보았다. 수호는 선혜의 손을 붙잡고서는 태준을 물끄러미 응시 중이었다.

    “내일 수영장 올 거지?”

    “네.”

    “아빠랑 같이 수영도 해 주는 거다?”

    수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호야. 아빠 안녕히 가세요, 해 봐.”

    경애가 허리를 굽혀 수호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태준이 기대 어린 얼굴로 수호를 보았다. 수호의 입을 통해 ‘아빠’라는 호칭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수호는 머뭇거리면서 선혜의 손만 만지작거릴 뿐 쉽게 입술을 떼지 못했다.

    서운하긴 했으나 수호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빠’라는 호칭이 아직은 어색할 터.

    태준은 서운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사를 건넬 뿐.

    “내일 수영장에서 보자.”

    “네.”

    선혜가 수호를 차에 태우고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이윽고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태준은 오래도록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선혜의 차가 완전히 주차장을 빠져나간 뒤였다.

    “신 서방, 집으로 가나?”

    경애가 태준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태준을 빤히 쳐다보던 경애가 입을 열었다.

    “내가 해장시켜줄까?”

    갑작스러운 제안에 태준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해장이요?”

    “나 국밥집 한다고 했잖아. 국밥 한 그릇 시원하게 말아 줄 테니까 먹고 가.”

    화통하게 제안하고 척척 걸어가는 경애의 뒷모습을 태준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뒤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경애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안 오고 뭐 해?”

    “아, 네. 갑니다.”

    대답을 마친 태준은 경애의 뒤를 얌전히 따라갔다.

    *

    경애의 국밥집.

    아직 점심시간을 맞이하지 않은 국밥집은 다소 한산했다. 얼마 없는 손님들의 주문을 받고 있던 춘희는 문이 열리는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어서 오세…… 어? 사장님?”

    커다래진 춘희의 눈이 경애를 보고 또 태준을 본다.

    태준을 보는 춘희의 턱이 힘없이 벌어졌다. 살면서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본다는 얼굴이었다. 가게를 둘러보던 태준이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춘희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콩나물 넣고 국밥 하나 시원하게 말아 줘.”

    “옆에는 누구……예요?”

    춘희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아, 우리 예비 사위.”

    “네? 사위요?”

    춘희가 놀라 빽 소리쳤다. 그 바람에 손님들뿐만 아니라 가게 직원들의 시선까지 이쪽으로 쏠렸다. 경애가 춘희의 팔을 아프지 않게 찰싹 때리고는 보챘다.

    “소리 지르지 말고 얼른 국밥이나 내 와.”

    춘희는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경애와 태준의 얼굴을 바쁘게 번갈아 보던 춘희는 경애가 눈썹 한쪽을 삐딱하게 추어올리자 그제야 주방으로 향했다. 태준에게 못 박혀 있는 시선은 쉬이 떼어지지 않았다.

    “거기 아무 데나 앉아요.”

    “아, 네.”

    경애의 말에 태준은 퍼뜩 자리에 앉았고 경애는 주방으로 향했다.

    “콩나물 많이 넣고. 황태도 팍팍 넣어 줘. 얼큰하고, 시원하게.”

    경애의 주문을 받은 주방 김 씨 아주머니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애가 슬쩍 태준을 돌아보았다. 태준은 반듯한 자세로 앉아 신기한 얼굴로 가게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태준에게 시선을 못 박은 채로 춘희가 경애의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와 은밀하게 물어왔다.

    “근데 예비 사위면 선혜 애인인 거죠?”

    “애인이다 뿐인가.”

    경애가 덧붙였다.

    “수호 친부 되는 사람이야.”

    “네? 수호 친부라고요?”

    놀란 춘희가 소리를 빽 내질렀다. 요리하던 주방 김 씨 아주머니도 삐끗하며 돌아보았고 태준도 무안한 얼굴로 이쪽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었다. 경애가 춘희를 흘겨보며 팔뚝을 찰싹 때렸다.

    “호들갑은.”

    “지, 진짜예요, 사장님?”

    “그래.”

    춘희가 아연한 얼굴로 태준을 본다. 아까와는 달리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보던 춘희가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다.

    “닮았네, 닮았어. 수호랑 아주 판박이네. 역시 씨 도둑질은 못 한다더니…….”

    경애가 별소리를 다 한다며 춘희의 어깨를 찰싹거렸다. 맞은 어깨를 손바닥으로 싹싹 비비던 춘희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선혜랑 수호는 어쩌고 저 남자만 달랑 데려왔어요?”

    “그냥 궁금한 게 좀 많아서.”

    그렇게 말하며 태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빛은 마냥 흐뭇하지만은 않았다.

    연륜에서 비롯된 감은 무시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감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 감에 기대었다가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경험이 있었으니까.

    제대로 알 필요가 있었다. 저 신태준이라는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사위 사랑은 장모라지만, 그 전에 사위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한 법이다.

    “사장님. 국밥 나왔어요.”

    주방 김 씨 아주머니에게 쟁반을 받아든 경애가 태준에게 다가갔다. 맞은편에 다가온 경애를 올려다보는 태준의 눈동자는 투명하고 맑았다.

    경애가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띠며 쟁반을 내려놓았다.

    “많이 먹어요. 더 먹고 싶으면 얘기하고.”

    태준의 앞에 국밥을 세팅한 경애는 쟁반을 옆자리에 치워두고 태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경애의 눈치를 보던 태준은 곧 수저를 듣고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경애는 잠자코 그런 태준을 응시하였다.

    태준에게 하고 싶은 많은 질문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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