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50화 (50/109)
  • #50. 있잖아요.

    태준이 돌아가고 난 뒤 수호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가 포장을 뜯어 건네준 로봇을 만지작거리는 수호의 눈이 혼란에 잠겨 가만히 흔들렸다.

    수호는 문득 눈을 들어 잠든 선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빠, 일까.

    아저씨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의문이 많았다.

    아빠라면 왜 이제야 나타났을까.

    또 수영장에서 자신에게 접근했을 때의 태도도 의문이다.

    처음 자신을 본 태준의 태도는 결코 아들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으니까.

    엄마에게 다가가려는 아저씨들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환심을 사기 위한 태도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이상한 건 엄마의 태도. 아빠라면, 왜 아빠라고 얘기해 주지 않는 걸까.

    물어볼까도 싶었지만 좀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마 잠든 엄마를 깨워 물어볼 수가 없었을뿐더러, 무거운 진실을 마주하기 두렵기 때문이리라.

    아니라면 별수 없지만, 만약에 맞다면.

    엄마는 왜.

    아저씨는 왜.

    다들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을까.

    의문은 계속해서 이어지지만 답은 내려지지 않았다.

    수호는 손에 들린 로봇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로봇이 답을 내려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염없이,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다.

    *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을 사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디자인팀 사무실을 지나치는데 성균이 선혜의 빈자리를 힐끔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윤선혜 씨 결근이 길어지네요. 애가 많이 아픈가.”

    오늘로써 선혜가 결근을 한 지 벌써 닷새째였다.

    “요새 감기가 독하더라고. 우리 애들도 걸려서 한참 고생하고 간호하던 마누라도 옮고……. 지독했지.”

    지친 얼굴로 한탄하던 형주의 얼굴이 측은함에 물들었다.

    “윤선혜 씨는 또 혼자라서 더 힘들 텐데.”

    그러면서 형주는 태준을 힐끔거렸다. 앞만 보고 커피를 마시는 태연한 얼굴을 보다가 그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하마터면 커피를 엎지를 뻔한 태준이 찡그리며 형주를 쳐다보았다.

    “윤선혜 씨는 좀 괜찮아?”

    대놓고 물어보는 형국에 당황한 태준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속일 사람을 속여라. 여기 임 대리랑, 나, 눈치 깐지 오래거든?”

    태준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금 음울해 보이는 성균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반사적으로 주위를 경계 어린 눈으로 돌아 보지만 때마침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걱정하지 마. 아직은 우리 둘밖에 모르는 눈치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가 하루 이틀 붙어 다녀? 맨날 같이 일하고, 밥 먹고 커피 마시고 하는데 당연히 눈치 채지.”

    태준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곧 뭐 어떠랴 싶었다.

    차라리 꽁꽁 숨기는 것보다 가까운 사람 몇몇은 아는 게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성균이 아는 건 달갑지 않았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그저 마음이 서로 엇갈렸다는 사실이 씁쓸할 뿐.

    “애가 많이 아픈 거야?”

    “많이 괜찮아졌어요. 열도 많이 내렸고.”

    느리지만 차츰 차도를 보이는 수호였다. 간간이 열이 난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여러 번이었지만 그 빈도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태준은 저녁에 퇴근하면 들러 얼굴을 비추고 오곤 했다. 아픈 아이의 신경에 거슬릴까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하지만 그것도 오늘은 불가능했다.

    “오늘은 회식이라 못 가보겠네?”

    형주의 말대로 오늘은 기획부 전체의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태준이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저희 회의가 몇 시랬죠?”

    “두 시.”

    현재 시각 한 시. 태준은 빠르게 회사와 병원 사이의 거리를 계산했다.

    왕복 시간이 대충 삼십 분. 여유는 한참이나 있었다. 씩 미소짓는 태준의 얼굴을 형주와 성균이 불안하게 쳐다보는 때였다.

    “회의 전에는 꼭 돌아올게요.”

    말을 마친 태준이 몸을 휙 돌려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태준을 붙잡으려 허공에 뻗어진 형주의 손이 힘없이 내려갔다. 허탈한 실소가 형주의 입가에 걸쳐졌다.

    “못 산다, 진짜.”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는데 태준의 뒤를 부러운 눈으로 좇는 성균이 보였다. 안타까운 얼굴로 성균을 보던 형주가 성균의 어깨를 툭 쳤다.

    “그만 포기해. 승산 없다니까.”

    “포기한 지가 언젠데요.”

    성균이 힘없이 웃으며 한 말에 형주의 마음이 다 짠했다.

    “이따가 내가 소맥 한 잔 시원하게 말아줄게.”

    형주의 말에 성균이 웃었다. 형주가 다시 한번 그의 어깨를 쳤다. 아까와는 달리 위로가 담긴 손길이었다.

    *

    같은 시각. 선혜는 태준에게서 온 전화를 받아들고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지금요?”

    - 네. 이따 저녁은 회식 때문에 못 갈 것 같아서요. 커피나 간식거리 좀 사 갈까 하는데. 뭐 먹고 싶어요?

    커피나 간식거리라. 태준이 말하니까 심히 땡기긴 했다. 수호의 옆에 붙어 있느라 마시는 거라곤 믹스 커피가 다였다. 카페에서 나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심하게 땡겼다.

    근데.

    “회사는 어쩌고요?”

    - 회의시간까지 한 시간 남았더라고요. 짬 낸 거죠. 여하튼 뭐 먹을 거예요? 아아?

    “네. 그걸로.”

    - 케이크는 저번에 얼그레이 잘 먹던데. 그걸로 사갑니다?

    “네.”

    그렇게 통화가 끊겼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얼떨떨하면서도 가슴이 기분 좋게 들뜨는 때였다.

    “아저씨 온대?”

    옆에 앉아 있던 수호가 물었다. 선혜가 고개를 끄덕이자 퉁명스러운 투로 묻기를.

    “회사는?”

    할 말이 없었다. 태준 대신 머쓱해진 선혜가 괜히 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수호가 투덜거렸다.

    “땡땡이나 치고. 불량 어른이야.”

    그러더니 하던 핸드폰 게임에 다시 집중한다. 선혜는 그런 수호를 힐끔 내려 보다가 피식 실소했다.

    “못하는 소리가 없어.”

    머리를 살짝 헝클이자 수호가 제 머리를 감싸 쥐고 비딱하게 선혜를 쳐다보았다. 선혜도 장난스레 눈에 힘을 주고 수호를 보았다.

    “왜. 뭐.”

    “눈곱 꼈어, 엄마.”

    수호가 툭 던진 말에 선혜의 눈이 커다래졌다. 서둘러 눈 쪽을 매만지던 선혜는 그제야 세수도 안 하고 샤워도 안 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선혜는 세면도구를 챙겼다.

    “엄마 잠깐 씻고 올게. 어디 가지 말고 있어?”

    “걱정 마.”

    핸드폰에 집중한 채로 수호가 대답하고 선혜는 병실을 나서서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실로 향하는 엄마의 발걸음 소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수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옆을 힐끔거렸다.

    침대 머리맡 옆에는 태준이 사다 준 로봇이 놓여 있었다. 포장만 뜯어진 채로 얌전히 앉아 있는 로봇. 로봇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의심과 혼란이 싹트던 그때 그 순간.

    결국 그날의 의문은 해소되지 못한 채로 며칠이 지났다.

    심란한 얼굴로 로봇을 만지작거리는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어? 엄마는?”

    태준이었다.

    *

    “엄마 샤워실 갔어요. 씻는다고.”

    “아, 그래?”

    태준이 수호의 말을 받으며 침대로 다가왔다. 들고 있는 종이 상자에는 케이크가 담겨져 있었고 다른 쪽 손에는 커피와 수호가 먹을 만한 스무디 한잔이 캐리어에 담겨 있었다. 태준의 것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수호는 먹을 것을 침상에 가지런히 올려놓는 태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호의 시선을 느낀 태준이 수호를 향해 싱긋이 웃어보이고는 포크를 내밀었다.

    “먹어 봐. 여기 케이크 맛있기로 유명한 데더라.”

    수호는 잠자코 포크를 받아들었다. 포크도 단 두 개뿐. 수호가 태준에게 물었다.

    “아저씨는요?”

    “아저씨는 괜찮아. 수호 너 많이 먹어.”

    태준이 그렇게 말하며 케이크를 수호 쪽으로 밀어주었다. 수호는 케이크를 포크로 한 번 크게 떠서 입에 물었다.

    밍밍한 병원 밥만 먹다가 달콤한 초코 맛이 느껴지자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스무디도 뚜껑을 열어 작은 종이컵에 덜어 건네 주자, 스무디도 맛있는지 수호의 눈이 아까와 똑같이 반짝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절로 웃음이 샜다.

    “그렇게 맛있어?”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케이크를 한 번 크게 펐다.

    ‘한입에 안 들어갈 것 같은데.’

    포크 위로 떠진 케이크의 양을 보며 작게 걱정하는데 케이크 덩어리가 눈앞으로 내밀어졌다. 태준이 눈을 깜박거리며 수호를 쳐다봤다.

    “나 먹으라고?”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했던 수호의 호의에 가슴 속에서 뭔가 찡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태준은 감동한 눈으로 수호를 보다가 천천히 입을 벌렸고 케이크를 받아먹었다.

    초콜릿이 혀끝에서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이게 뭐라고 감동해서 가슴이 다 울렁거렸다. 초콜릿이 묻은 입가를 슬쩍 닦아내며 살짝 미소 짓는 때였다.

    잠자코 지켜보던 수호가 물었다.

    “안 더러워요?”

    더럽냐니.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태준이 의아한 얼굴로 수호를 보았다.

    “뭐가 더러워?”

    수호가 손에 들린 포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거 제 침 범벅이었을 텐데.”

    “그게 뭐가 더러운데?”

    태준은 도통 이해되지 않는 얼굴로 눈을 깜박일 뿐이었다. 그런 태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수호와 태준 사이에 묘한 침묵이 찾아왔다.

    수호는 제 손에 들린 포크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준은 뭔가 깨달은 얼굴로 수호의 손에서 포크를 가져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포크를 깨끗하게 씻어서 수호에게 건네 주었다.

    “자, 여기.”

    “…….”

    “포크 새 걸로 갖다 줄까?”

    수호의 눈치를 보던 태준이 물었지만 수호는 고개를 젓고 케이크를 마저 먹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가라앉은 얼굴로.

    “저기, 아저씨가 뭐 잘못했어?”

    태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호는 고개를 젓고는 대답했다.

    “아뇨.”

    수호가 작게 덧붙였다.

    “아니에요, 그런 거.”

    수호가 포크로 케이크를 떠서 입에 밀어넣는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간호사였다. 태준에게 미소 띤 얼굴로 인사한 간호사가 수호의 체온을 재며 친근하게 물었다.

    “수호, 아빠랑 맛있는 거 먹고 있었어?”

    태준이 당황한 눈으로 수호의 눈치를 보았다. 수호는 대답 없이 케이크만 우물거릴 뿐이었다. 무안해진 간호사가 태준에게 대신 대답을 구하듯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게…….”

    태준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대답하지 못하며 진땀을 뺐다. 뻘뻘거리고 있는데 수호랑 눈이 딱 마주쳤다.

    그 순간 무슨 일인지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네. 제가 우리 아들 먹이려고 케이크 맛집 수소문 좀 했습니다. 하하!”

    망했……다.

    수호 앞에서 아빠 행세라니.

    저번에 수호를 괴롭히는 무리 앞에서 밝혔다가 낭패를 봤던 까닭일까.

    저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에 가슴이 다 선뜩해지는 것 같았다.

    “너무 보기 좋아요. 아버님이 애한테 워낙 지극 정성이시잖아요. 우리 수호는 좋겠다. 이렇게 좋은 아빠 있어서.”

    “하하.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하하하…….”

    간호사가 나간 뒤 태준의 입가에서 서서히 미소가 가셨다. 헛기침을 계속해서 하는 그의 귀 끝이 민망함에 빨갛다. 수호는 그런 태준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저씨.”

    “어, 응?”

    긴장하는 눈으로 수호를 바라보는 때였다.

    “있잖아요.”

    수호가 입술을 달싹이는 그때였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샤워를 막 마치고 병실로 돌아온 선혜였다.

    머리를 수건으로 틀어 올린 선혜가 태준을 보고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둘러 수건을 내리고 머리를 손으로 털어내는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애써 태연한 얼굴로 선혜가 다가왔다.

    “언제 왔어요?”

    “방금요.”

    태준이 문득 수호를 돌아보았다. 할 말 많은 눈으로 태준을 쳐다보던 수호는 이내 포크를 집어 들고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수호가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새가 없었다. 얼마 안 있어 회사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궁금증은 빠르게 풀어졌다.

    그날 밤 회식 자리에서, 수호에게서 전화가 왔기 때문에.

    - 있잖아요, 아저씨.

    수호답지 않게 떨려오던 목소리.

    - 아저씨, 우리 아빠예요?

    장마가 지나간 여름의 끝자락.

    귀뚜라미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던, 어느 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