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48화 (48/109)

#48. 아빠?

선혜는 엄마인 경애와 함께 장을 보러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꾸만 장난감 코너를 돌아보는 선혜의 팔을 경애가 잡아당기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괜히 있니?”

경애가 말했다.

“엄마인 네가 곁에 있으면 애 아빠한테 마음 열기 더 어려울 수도 있는 거야. 이렇게라도 자리 마련해 줘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지 않겠어?”

그런가. 장난감 코너로 멀어지던 두 사람의 뒷모습을 떠올리던 선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신 서방은 몇 살이야?”

“스물일곱.”

대답을 들은 경애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스물일곱이면 너보다 세 살이나 어리네?”

“응.”

“스물일곱이라…….”

그 나이를 상기하는 경애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러다 이내, 얼굴에 씁쓰레한 미소가 번졌다.

“좋을 때네.”

부러운 듯, 아련하게, 혹은 애틋하게 그렇게 말하는 경애의 얼굴을 선혜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얼마 전 석주를 마주쳤던 때가 떠올랐다. 하지만 말로 꺼낼 수는 없었다.

엄마에게 아버지는 상처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떠올리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게 만드는, 그런 사람.

아픈 기억 속에 잠시 발을 담그고 있는 엄마를 꺼내주고자 화제를 돌리려는 찰나였다.

선혜의 걸음이 별안간 우뚝 멈췄다. 그 기척을 뒤늦게 알아챈 경애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을 때, 선혜는 뒤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니?”

경애가 묻자 선혜는 황급히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순간적으로 싸했던 뒤통수를 매만지던 선혜가 애써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냐, 엄마.”

경애는 고개를 갸웃할 뿐 더 캐묻지 않고 앞서 걸어갔다. 경애의 옆으로 걸어가던 선혜가 잠시 뒤를 비스듬히 돌아보았다.

북적거리는 인파 속.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 것 같았는데.

수상한 사람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기분 탓인가.’

선혜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

선혜와 경애가 장난감 코너로 돌아온 뒤, 넷은 마트에 있는 푸드코트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했다. 태준은 경애와 선혜의 차 트렁크에 장 본 물건들을 차곡차곡 실어주었다.

힘이 좋다며 칭찬 일색이던 경애는 태준에게 가게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언제든지 와요. 우리 신 서방은 공짜 밥 해 줄 테니까.”

“네. 꼭 들를게요, 어머님.”

“어머님은. 호호. 장모님이라고 불러도 되는…….”

수호의 눈치를 보던 선혜가 슬쩍 팔뚝을 꼬집자 경애가 입을 다물었다. 선혜를 새침하게 노려볼 땐 언제고 태준을 향해 금세 상냥하게 웃어 보인다.

“다음에 또 봐요. 조심히 들어가고.”

“네.”

눈치 빠른 경애가 자리를 비켜주고 태준과 선혜, 그리고 수호만이 남았다.

“미안해요. 엄마가 좀 주책이어서.”

“미안은요.”

태준이 손사래를 쳤다. 둘이 짧게 인사 나누는 것마저도 내키지 않는지 수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슬쩍 선혜와 잡은 손에 힘을 주는 모양새가 재촉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저를 올려다보는 수호를 내려다보며 미소지은 선혜가 태준에게 말했다.

“우리도 가 볼게요. 조심히 들어가요.”

“네.”

선혜에게 대답을 마친 태준이 수호에게 시선을 두었다.

“수호야, 잘 가.”

수호는 눈만 들어 그런 태준을 힐끔 쳐다보다가 짧게 대답했다.

“네.”

곧 선혜와 수호가 차에 올라타고 태준은 차가 주차장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자리에 서 있다가 돌아섰다.

돌아선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힘주어 옮기는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태준의 손이 근처에 있던 카트 하나를 가져간다. 그의 행보가 향하는 곳은 장난감 코너.

코너 입구에 서 있던 태준은 아까 수호가 지나간 동선 하나하나를 떠올리다 걸음을 옮겼다.

망설임 없는 손길이 수호의 발이 닿았던 곳, 잠깐이라도 눈이 닿았던 곳, 또 손이 닿았던 곳에 있던 장난감들을 전부 다 카트에 쓸어 담았다.

카트에는 장난감이 산처럼 쌓여가고 있었고 지나가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건 계산대에 있던 점원도 마찬가지. 가격을 읊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살며시 떨려왔지만, 태준은 망설임 없이 카드를 내밀어 계산을 마쳤다.

.

.

.

집으로 돌아온 태준은 양손에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장난감을 서재 한구석에 정리하고 있었다. 정리가 끝나갈 무렵. 태준은 잠시 손에 들린 장난감 하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까 태준이 추억에 젖어서 골라잡았던 로봇. 심드렁하게 로봇을 구경하던 수호가 유일하게 눈을 오래 두었던 물건이었다. 사 줄까 말까 고민했었지만 망설임은 잠시뿐이었다.

태준은 장난감이 쌓인 곳 맨 위에 로봇을 올려놓고는 장난감들을 하나하나 바라보기 시작했다.

장난감을 산 건 수호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네가 조금이라도 아이 같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달까.

어른들을 배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조르고, 투정 부리고, 심술도 부려도 괜찮으니까.

이 아빠가 다 받아줄 수 있으니까.

네가 이제 좀 덜 컸으면 좋겠다.

아이처럼, 아이답게 있어 줬으면 좋겠어.

아직은 일곱 살. 어른이 되기에는 한참 이른 나이니.

그리고 언젠가는.

너와 이 장난감들을 가지고 놀 수 있었으면 좋겠다.

태준은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장난감들을 바라보았다.

수호에게 전할 수 없는 말들을 마음속에 담아둔 채로 말이다.

**

날이 밝았다.

선혜는 아침부터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 장을 봐 온 물건들로 아침밥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의 맛을 본 선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는 때였다.

삐 비비빅. 삐 비비빅.

수호의 방에서 알람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곧 머리가 까치집이 된 수호가 나오겠지. 수호를 배불리 먹일 생각에 벌써부터 흐뭇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선혜가 된장찌개를 식탁에 올려놓고 밥을 퍼서 올려놓을 때까지도 수호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안 일어났나.”

선혜는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앞치마를 벗어 의자에 걸어 놓고 수호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노크를 두 번 했지만, 대답이 없다. 선혜는 천천히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삐 비비빅. 삐 비비빅.

문이 열리자 경고음처럼 울리는 알람 소리가 귀를 때렸다.

비가 와서 어두운 하늘 탓에 불이 꺼져 있는 수호의 방은 어두웠다. 그리고 이유 모를 열기가 습기와 함께 공기 중에 산재해 있었고.

수호는 문 쪽을 등진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선혜는 묘한 기시감에 미간을 좁히고는 침대로 다가갔다.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손으로 끄고 수호에게 손을 뻗었다.

“수호야, 수영장 가야…….”

선혜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어깨를 잡아당기자 무너지듯 눕혀지는 몸은 축 처져 있었고 드러난 아이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열기에 발갛게 익어버린 볼. 마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쌕쌕거리는 숨소리. 감긴 채로 떠지지 않는 눈.

“수호야!”

선혜가 황급히 수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지만, 수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선혜는 서둘러 수호의 이마를 짚었다. 불덩이였다.

열이 대체 몇 도길래.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선혜는 서둘러 체온계를 가져와 수호의 체온을 쟀다.

37.0

다시 재도 결과는 마찬가지.

37.0

설마 고장 났나. 그 사실을 깨닫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선혜의 손에서 떨어진 체온계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당장 병원에 가야 해.

선혜는 생각을 마치기가 무섭게 수호를 안아 들었다.

“엄마…….”

차 키와 지갑, 그리고 핸드폰을 부랴부랴 챙기는데 쌕쌕거리는 숨결 사이로 수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던 걸 멈추고 수호를 내려다보는데 아이가 눈을 감은 채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나 괜찮아…….”

이렇게 열이 나고 아프면서도 엄마를 달래려 하는 아이라니.

선혜의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선혜는 수호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죄책감에 떨어지는 고개는 무겁기만 했다.

“수호야, 엄마가, 엄마가 미안해…….”

미어지는 가슴을 안고 연신 속삭이던 선혜는 곧 빠르게 집을 나섰다.

*

태준은 수영장 갈 준비를 하며 엄마인 시연과 통화 중이었다.

마뜩잖은 듯 그의 미간이 가만히 찌푸려졌다.

“지금요?”

- 그래.

“나 수영장 가야 하는데.”

볼멘소리로 말하자 시연이 빽 소리쳤다.

- 너는 가족보다 수영이 더 중요하니? 빨리 오라면 빨리 올 것이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아 왜 빨리 오라는 건데요.”

- 우리 막내, 엄마가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런다, 왜!

“나 참. 하여간 우리 엄마 막내 사랑 알아줘야 한다니까.”

태준이 피식 웃으며 손목에 시계를 찼다.

“알았어요. 지금 갈게.”

- 그래. 빨리 와, 우리 아들?

“네네.”

장난스럽게 대답한 태준은 통화를 마치고 준비를 마무리 지었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골똘한 표정을 짓는 태준.

“오늘 말해야 하나.”

가족들한테 숨길 생각은 당연히 없다. 연애하는 것도, 그리고 수호의 존재도.

하지만 시기가 적절한가 싶어 의문이 드는 것이다.

아직 수호가 자신에게 마음을 연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말하면 가족들 사이에서 혼란이 야기될 것은 당연지사. 아버지랑 어머니, 그리고 누나와 형이 너나 할 것 없이 수호를 보려 달려들 게 뻔한데. 그것은 수호에게도 선혜에게도 부담이 될 게 자명했다.

그렇다고 계속 숨기기도 그렇고.

“흠.”

선혜랑 상의를 해 볼까.

안 그래도 전화를 한 번 하려던 참이었다. 수호도 선혜도 아침부터 연락 두절이어서 걱정이 되기도 했고.

태준은 거실 소파에 걸터앉아 선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다가 곧 전화 받는소리가 났다.

- 네. 여보세요.

잔뜩 지친 목소리에 태준이 눈을 깜박였다.

“선혜 씨. 목소리가 왜 그래요?”

- 아, 그게…….

선혜답지 않게 흐려지는 말끝.

“선혜 씨, 무슨 일 있어요?”

불안함에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 지금 병원이에요.

병원이라는 말에 태준은 벌떡 일어났다.

“병원? 병원은 왜요.”

- 수호가 열이 너무 많이 나서…….

흔들리는 선혜의 목소리에 태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태준은 곧장 현관으로 가면서 물었다.

“어디 병원이에요?”

- C 대학병원 응급실이요.

장소를 듣자마자 신발을 대충 구겨 신은 태준은 현관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

태준과 통화를 마친 선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옆을 돌아보면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수호가 있다.

병원에 오자마자 잰 열은 무려 40도. 의료진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수호의 팔에 주사를 놓고 피를 뽑고, 수액을 주고, 해열제를 주었다.

해열제가 들어가 열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해 잠든 수호의 얼굴은 전보다 편해 보였으나 기운 없는 그 모습이 선혜의 가슴을 후벼 팠다.

진작 아팠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애가 이 지경일 때까지 놔두지 않았을 텐데.

왜 바보같이 눈치를 못 채서는.

수호가 두 살이었을 무렵. 지금처럼 큰 열감기를 앓았었다.

첫 아이였던 데다가 그때 당시 아직 어려 지식이 부족했던 선혜는 아이가 우는 이유를 도통 알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병원을 찾았고 측정된 체온을 보고는 깜짝 놀랐었다.

40도가 넘는 고열. 뇌 손상이나 다른 신경 손상이 올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었다.

결과적으로 잘 치료되어 별문제 없이 건강해졌지만, 수호가 조금이라도 아프다고 하면 그때가 생각나 가슴이 내려앉곤 했다.

선혜의 손끝이 수호의 젖은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열이 떨어지며 흥건히 흐른 땀을 손으로 닦아내며 다행이라 생각하는 때였다.

발걸음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더니 커튼이 홱 젖혀졌다. 놀라 돌아본 곳에는 태준이 있었다.

태준은 굳은 듯이 서서 침대에 늘어진 수호를 보고 있다가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열감기래요. 해열제 맞아서 지금 열 많이 떨어졌고, 자고 있는 중이에요.”

태준의 다갈색 눈동자가 살며시 떨려왔다. 주사가 꽂힌 아이의 팔을 바라보는 태준의 눈이 눈물에 젖어 드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태준을 보며 선혜는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태준 씨, 왜 울고 그래요.”

“아니, 그냥, 갑자기…….”

태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수호야, 아빠가 미안…… 바보같이 아픈 것도 모르고…… 미안해, 수호야…….”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은 태준은 수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움켜잡고 아이처럼 흐느꼈다.

선혜는 옆에서 묘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아픈 아이의 옆에서 애처럼 우는 저 남자가 왜 든든하게 느껴지는 건지.

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하게 뛰던 가슴이 가라앉는 건지.

태준에게 다가간 선혜가 무심한 손길로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수호 괜찮다니까.”

“그래도, 애가 축 늘어져 있는 걸 보니까 마음이…… 막…….”

말로 표현이 되지 않는지 태준이 제 가슴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짓고 말았다. 그녀의 손이 태준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태준은 선혜의 손길을 받으며, 수호의 손을 꼭 움켜잡은 채로 계속해서 속삭였다.

아빠가 미안하다고. 못 알아채서 정말 미안하다고.

.

.

.

한편 수호는 눈을 감은 채 태준의 속삭임을 다 듣고 있었다.

아이의 눈이 가느다랗게 떠져 태준을 바라보았다.

제 손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 눈물짓는 태준을.

‘아빠……?’

아빠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은데.

아픈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지친 눈꺼풀은 다시금 감겨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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