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46화 (46/109)
  • #46. 폭풍전야

    십 분 전.

    태연은 콧노래를 부르며 벤을 타고 세빈의 유치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잔뜩 들뜬 얼굴로 팩트를 들어 화장을 고치는 태연을 보며 운전석에 앉은 매니저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딸내미 데리러 가는데 웬 화장이에요?”

    “잘 보일 사람이 있으니까 그러지.”

    “잘 보일 사람이요? 그게 누군데요?”

    태연이 탁 소리가 나게 팩트를 닫고는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우리 세빈이가 유치원에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나 보더라고. 오늘 가서 얼굴 좀 보려고 하거든.”

    매니저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었다.

    “요새 애들 참 빨라. 하긴. 우리 조카도 여덟 살인데 벌써 남자친구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귀여운 것들 같으니라고.”

    태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콧소리를 섞어 말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세빈이가 좋아한다는 남자애 이름이 수호라고 했었나.

    어떤 애인지 몹시도 궁금했다. 그동안 바쁜 스케줄 탓에 만날 기회가 없어서 아쉽기만 했는데 오늘 드디어 그 수호라는 아이를 볼 기회를 잡게 되었다. 기대에 부푼 얼굴로 태연은 다시금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창밖으로는 유치원 건물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차가 유치원에 도착하고 태연은 멋스럽게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유치원 안으로 들어가자 선생님들이 인사를 했다. 태연은 우아하게 고갯짓하며 인사를 받고는 물었다.

    “우리 세빈이는요?”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선생님이 안내한 곳에는 세빈의 가방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선생님이 난감한 얼굴로 얼굴을 긁적였다.

    “어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그래요? 어디 갔나?”

    태연이 세빈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때였다.

    타박타박. 작은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세빈인가 싶어 돌아본 태연은 복도를 따라 걸어오는 한 아이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결 좋은 까만 머릿결. 쌍꺼풀은 없지만 시원스럽게 벌어진 눈매. 그 속의 다갈색 눈동자. 고집스레 다물린 도톰한 입술.

    ‘태준이?’

    어렸을 적 태준이 재현된 것 같은 아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태연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이는 낯선 태연의 얼굴을 무심한 눈으로 흘끔 볼 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선생님이 아이에게 물었다.

    “수호야. 혹시 세빈이 못 봤어?”

    수호?

    이름을 들은 태연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얘, 얘가 수호라고요?”

    태연이 버벅거리며 묻자 선생님이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선생님이 수호를 손으로 가리켰다.

    “네. 수호라고, 세빈이랑 같은 반 친구예요.”

    간단히 소개를 마친 선생님이 수호에게 말했다.

    “인사드려, 수호야. 세빈이 어머니셔.”

    “안녕하세요.”

    수호의 인사를 받는 태연의 얼굴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혼란도 함께였다.

    태준과 똑 닮은 아이가 세빈의 첫사랑 상대라니.

    ‘이게 대체…….’

    태연의 눈치를 보던 선생님이 수호에게 물었다.

    “수호야. 혹시 세빈이 못 봤어?”

    수호는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태연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힐끔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장세빈 화장실 갔어요.”

    수호의 말에 ‘그랬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선생님이 태연을 쳐다보았다.

    “앉아서 기다리시죠, 어머님.”

    태연은 선생님의 목소리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선생님은 태연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수호를 보고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몹시도 궁금했지만 묻지 못하고 선생님은 돌아섰다.

    그렇게 수호와 태연은 둘만이 남게 되었다.

    수호는 태연이 몹시도 불편했다. 빤히 내리꽂히는 시선이 불쾌할 정도로 노골적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쳐다보냐, 라는 질문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쩐지 깨갱 하게 되는 눈빛이었다.

    ‘엄마는 언제 오지…….’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거리며 선혜가 오기를 오매불망 바라던 그때.

    “너…….”

    태연이 입술을 달싹임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선혜가 들어왔다. 선혜를 본 수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호는 냉큼 선혜에게 다가가 선혜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

    “어, 수호야.”

    차분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와 태연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태연은 놀라 벌어지는 여자의 눈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그사이에 어렴풋이 비치는 동요를 읽어냈다.

    찔리는 게 있는 표정이었다.

    .

    .

    .

    선혜는 애써 긴장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건 상대방의 기에 눌리지 않으려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뒷모습부터 예사롭지 않았는데 앞에서 마주 보자 사람을 절로 찍어 누르는 기백이 느껴졌다.

    거리낄 것 없이 직선으로 다가와 꽂히는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 괜히 입이 말랐다.

    태연이 수호를 턱으로 가리키더니 선혜에게 물었다.

    “그쪽이 얘 엄마예요?”

    “네. 안녕하세요, 세빈이 어머님.”

    선혜가 예의 바르게 반쯤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넸다. 태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세빈이 엄마인 건 어떻게 알아요?”

    “들은 적 있어요. 세빈이 어머니께서 배우 신태연 씨라고.”

    “아아. 그래서.”

    납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눈에는 의심이 서려 있었다.

    설마. 눈치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수호만 보고 거기까지 짐작했을 리가.

    그런데도 왜 이렇게 가슴이 쿵쿵 뛰는지. 얼마 전 태석에게 호출되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살 뻔한 기억 때문인가.

    아니면 시누이를 불편하게 여기는 본능적인 마음 탓인가.

    태연이 연예인이라서기 보다는 태준의 누나라는 데 더욱 신경이 쏠리는 건 사실이었다.

    선혜는 태연이 계속해서 예사롭지 않게 수호와 저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자 물었다.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태연은 선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비스듬히 미소지었다.

    “아뇨. 없어요.”

    선혜는 태연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인사를 하라는 듯 수호의 손을 잡아 조금 흔들었다. 선혜의 다리 뒤에 숨어 있던 수호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는 살짝 고개를 숙였고 곧 두 사람은 현관을 나섰다.

    그 뒤로는 여전히 태연의 시선이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

    .

    .

    “저 아줌마, 이상해.”

    차에 올라타자마자 수호가 불평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아까 꾹꾹 눌렀던 반항기가 한순간에 터지는 것 같았다.

    “뭐가 이상해?”

    “막 이상하게 빤히 쳐다보잖아. 얼굴 뚫어지는 줄 알았어.”

    그 이상한 아줌마가, 네 고모란다.

    말 대신 한숨이 입 밖으로 샜다.

    의심 가득했던 태연의 눈빛이 다시 생각이 나자,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엄마, 안 가?”

    목덜미를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수호가 물었다.

    “어, 어어. 가야지.”

    선혜는 벨트를 매고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그 뒤로는 그쳤던 비가 다시금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한편. 태연은 둘이 나간 문을 쳐다보다가 생각에 잠겼다.

    세빈이 친구면 올해 일곱 살.

    그렇다면 태준이 스무 살, 혹은 늦어도 스물한 살에 사고를 쳤다는 얘긴데.

    ‘내가 너무 앞서가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고, 또 찍어서 그런 건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다잡으면서도 남인데 어떻게 저렇게 닮을 수 있나 싶어 다시 제자리를 맴돈다.

    미심쩍은 느낌이 쉬이 떨쳐지지 않았다. 저를 보고 동요하던 아이 엄마의 얼굴은 한 몫을 더했다.

    연예인이라면 질리게 본 태연도 인정할 법한 화려한 미인.

    ‘예쁘냐?’

    ‘엄청요.’

    얼마 전 가족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와 태준이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유난히 세빈의 등·하원에 신경 썼던 태준의 모습도 머리에 스친다.

    이 모든 의심을 확신으로 귀결시킬 방법은 단 하나.

    태준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는 것.

    태연이 핸드폰을 들어 태준의 연락처 아래에 있는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때였다.

    “엄마!”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돌아보니 세빈이 반가운 얼굴로 뛰어오고 있었다.

    세빈의 얼굴을 본 태연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아이의 얼굴이 오늘따라 너무 순진하고 무구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방실방실 웃던 세빈이 빈 의자를 힐끔거리고는 구시렁거렸다.

    “갔나 보네.”

    말도 없이.

    아쉬움 가득한 중얼거림. 누구를 찾는지는 뻔했다.

    전 같았으면 ‘우리 딸 수호라는 애 찾는구나?’라며 놀렸을지도 모르나 태연은 심란한 얼굴로 세빈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태연은 핸드폰 화면에 뜬 태준의 연락처를 지그시 응시했다. 통화 버튼으로 향하던 손가락이 도로 물려진다.

    한숨과 함께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은 뒤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이자 세빈이 동그래진 눈으로 태연을 보았다.

    “엄마, 왜 그래?”

    태연이 느리게 숨을 내쉬며 세빈을 보았다. 아이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하다가 손으로 세빈의 머리칼을 다정히 쓸어 귀 뒤로 넘겨주는 태연의 얼굴에 쓴 미소가 감돌았다.

    “아냐. 아무것도.”

    진실로 아무것도 아니기를.

    만약, 아주 만약에 이 말도 안 되는 예상이 맞아떨어진다면.

    그래서 우리 딸의 풋풋한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면…….

    ‘신태준 넌 죽었어.’

    허공을 잠시 응시하는 태연의 눈빛이 잡아먹을 듯 형형했다.

    속사정을 모르는 세빈은 그런 엄마를 보며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에취!”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태준은 느닷없이 터지는 재채기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감기 기운은 없는데.

    “누가 내 욕이라도 하나.”

    심드렁한 얼굴로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후비고는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퇴근하고 노곤한 몸을 누일 때만큼 집이 좋은 때가 없었다.

    더구나 오늘은 금요일. 회식도 없고, 다음날은 주말이니 이대로 잠이 푹 들어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잠이 오지 않았다.

    태준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팔로 베개를 만들어 베고는 천장을 응시했다.

    피식, 문득 웃음이 샜다. 손끝이 도톰한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그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원래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반쯤 장난으로 시작된 입맞춤. 기분이 좋아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 거였는데.

    그게 그렇게 깊어질 줄이야.

    입술이 닿는 순간 빨려가듯 사라지던 이성. 더 깊이 탐하고 싶어 들끓던 욕망을 겨우 누르고 물었었다.

    ‘키스…… 해도 돼요?’

    회사고, 일해야 하고,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까지 모조리 사라지기 직전에 물은 거였다.

    거기서 안 돼요, 라고 선혜가 말한다면, 아쉽지만 기꺼이 물러날 생각 또한 없지 않았다.

    그랬는데, 거기서 그렇게 박력 있게 다가오면 어째.

    태준은 옆으로 몸을 누이며 배시시 웃었다. 이제 막 첫사랑을 시작한 사춘기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보고픈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선혜 씨, 내일은 뭐 해요?]

    답장은 금방 왔다.

    [장 보러 마트 가려고요.]

    [언제요?]

    [수호 수영 끝나면요.]

    태준은 몸을 돌려 엎드린 채 생각에 잠겼다. 수영 끝나고 장보기라.

    그러고 보니 이번 주말은 선혜를 만날 시간이 없었다. 토요일인 내일은 수호의 수영 과외를 오랜만에 해줄 생각이었고, 일요일은 가족 모임이 있었다.

    [장 보는 데 따라가도 돼요?]

    조금 사이를 두고 답장이 왔다.

    [우리 엄마도 계실 건데 괜찮겠어요?]

    [당연하죠.]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이참에 뵙고 인사드리면 좋지, 뭘.

    [그래요. 그럼 내일 봐요.]

    이대로 끝내기엔 아쉬운데.

    태준은 팔을 베고 한참을 핸드폰을 응시하다가 문득 든 생각을 그대로 실어 보냈다.

    [보고 싶어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선혜는 태준이 보낸 다섯 글자짜리 메시지를 보고 눈을 깜박였다.

    불과 몇 시간 전에도 봤는데 보고 싶다니.

    근데…… 뭐라고 답을 해주지.

    나도, 라고 하기엔 부끄럽고. 말을 돌리기엔 미안하고.

    핸드폰을 붙들고 한참을 고민하는데 태준이 메시지를 보냈다.

    [선혜 씨도 나 보고 싶죠?]

    선혜는 못내 웃어버리고 말았다. 꼭 태준이 옆에 있는 것처럼 목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듯하였다.

    간질거리는 가슴을 안고 선혜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네.]

    겨우 한 글자였음에도 부끄러워서, 하마터면 핸드폰을 집어 던질 뻔했다. 차마 그럴 순 없어 핸드폰을 옆에 덮어놓는 것으로 대신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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