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해도 돼요?
고은은 태준을 보자마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착각이 일었다.
그저 쳐다볼 뿐인데 설렘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이 다른 의미로 철렁 내려앉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선혜에게 한 말을 되새겨보았다.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럴 만한 틈새가 보이지 않았다.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
고은은 입술을 지그시 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순간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은행에서 돌아온 매니저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고은 씨! 무슨 일이야?”
매니저의 불안과 호기심 어린 시선이 대치한 세 사람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선혜는 뒤늦게 카페에 집중된 시선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들끼리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는 선혜의 눈이 가늘게 떨리다가 태준을 향했다.
그 순간 고은을 보고 있던 태준의 시선이 선혜에게 옮겨졌다.
선혜는 허공에서 잠시 얽혀 있던 태준의 시선을 피하고는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카페에서 멀리 떨어져 서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분간 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생겼다는 사실에 선혜는 속으로 질색하며 힘주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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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은 멀어지는 선혜의 뒷모습을 몸을 반쯤 틀어 응시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고은의 대화를 반쯤 들은 사람들이 저들끼리 숙덕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자기까지 튀는 행동을 하면 선혜에게 오히려 해가 될 것은 당연지사였다. 남들의 호기심 많은 시선이 거슬려 노려보는 때였다.
“고은 씨. 손님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사람들 말로는 막 소리 지르고 싸웠다고 하던데.”
매니저가 작아진 선혜의 뒷모습을 흘끔거리며 물었다.
“저 여자 손님이 진상 짓이나 갑질이라도 했어?”
그 질문이 선혜에게 향하던 태준의 시선을 멈추게 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태준의 말에 매니저가 흠칫 놀라며 돌아보았다.
“진상 짓이나 갑질 같은 거 안 했습니다. 저 알바 혼자 소리 지르고 난리 친 거지.”
건성으로 고은을 턱짓하던 태준이 지그시 고은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필요할 때 팔아먹고 이용하는 게 무슨 가족입니까.”
태준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장사꾼이지.”
그러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멀어졌다.
고은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악물어보지만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막을 길이 없었다.
“아니, 이게 다 무슨 말이야? 가족이라니? 가족이 갑자기 왜 나와, 고은 씨?”
매니저는 놀라면서도 궁금한 얼굴로 고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고은 씨! 아니, 울지 말고 말을 좀 해 봐!”
답답한 매니저가 성화를 부렸지만, 고은은 울기만 했다.
*
태준은 선혜가 간 방향을 따라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돌자 선혜가 탄 엘리베이터가 문이 막 닫히는 게 보였다. 곧장 달려갔지만, 엘리베이터는 태준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태준은 올라가는 숫자판을 원망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도망쳤어요.’
니스에서 선혜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왜 여자 혼자서 위험하게 이 먼 데까지 왔느냐는 태준의 물음에 선혜가 했던 대답이었다.
‘도망쳐 온 거예요, 나.’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의연했는데 그래서 더욱 처연해 보였다.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었고.
그래서 무엇으로부터 도망쳤는지는 차마 묻지 못했었다.
그랬었는데, 그 이유를 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은은 너무나 당연하게 선혜에게 희생을 요구했다. 그리고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 희생이라 하는 것은 망나니 같았던 그 남자와의 결혼.
나락으로 떨어진 삶을 살았다 주장하는 고은에게 선혜는 다른 가족을 언급하며 자업자득이라고 차갑게 일갈했다.
꽤 속 시원하게 되받아친 듯 보였지만 돌아서서 자신을 마주했을 때 선혜의 얼굴은 통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태준은 보았다.
그래서 걱정이 되었다.
“빨리 좀 와라, 빨리.”
태준이 조급한 목소리로 엘리베이터를 보며 중얼댔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마자 태준은 빠르게 올라타 닫힘 버튼을 눌렀다.
*
선혜는 팀원들에게 커피와 케이크를 건네주고는 곧장 화장실을 핑계로 사무실에서 나왔다. 사람들이 없을 만한 곳을 생각하다 비상구가 떠올라 그곳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안심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던 선혜는 창가에 있는 계단에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 아파.’
머리가 자꾸만 지끈거린다.
고은이 내질렀던 말들이 가시가 되어 하나하나 꽂히는 기분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아버지가 술에만 매달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혼을 했다고.
자기가 집을 나가고 나서 분위기가 흉흉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이 정도로 몰락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제 와 죄책감을 느끼는 게 우습다 여기면서도 자꾸만 속이 갑갑해지는 것은 별수 없었다.
주말에 보았던 석주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선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정장을 차려입고 머리를 넘긴 깔끔한 모습이었다. 애까지 딸린 미혼부임을 알면서도 여자들이 관심을 보이고 다가올 정도로 훤칠했었던.
그랬던 사람이었는데. 낡은 옷차림과 초라한 행색이라니.
예전과 백팔십도 달라진 모습이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만 눈에 밟혔다.
선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문득 핸드폰이 울렸다.
[어디예요?]
태준이 보낸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선혜는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까 다 들은 얼굴이었지. 고은이 내지른 대화는 자신의 숨겨진 속사정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내용이었다.
수치심이나 비참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엄마인 경애에게조차 말한 적 없는 사실이 까발려진 데에 대한 무안함 탓에 태준의 얼굴을 보는 게 달갑지 않았다.
선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비상구 문 너머로 사람들이 오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문을 여는 그때였다.
동시에 문밖에서 누군가가 성큼 들어왔다. 그 기세에 밀려 뒷걸음질을 치는데 비상구 문이 도로 쿵 닫혔다.
선혜는 코앞에 드리워진 태준을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반면 태준은 안심한 얼굴로 미소짓고 있었다.
“여기 있었어요?”
“여긴 어떻…….”
선혜는 말을 잇지 못했다.
태준이 팔을 뻗어 선혜의 어깨를 감싸 안더니 품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에.
그의 품에 안겨 어깨너머를 바라보는 선혜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왜 그런 일 겪고 혼자 있어요, 섭섭하게.”
“…….”
“걱정돼서 한참 찾았네.”
따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선혜의 눈동자가 살며시 떨렸다.
“괜찮아요?”
괜찮냐는 말에 반사적으로 그렇다 대답하려던 선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선혜가 작게 말했다.
“아뇨.”
괜찮지 않았다.
태준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작은 어깨를 내려다보던 그가 팔에 힘을 주었다.
“어떻게 하면 괜찮아지려나.”
태준이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귀에 속삭였다.
“그 알바생 확 잘라버릴까요?”
“아뇨.”
“맛있는 거 사다 줄까요? 기분 좋아지게.”
선혜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흠.”
태준이 고심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눈을 빛냈다.
선혜를 품에서 떼어낸 그가 씩 웃어 보였다. 장난기 섞인 환한 웃음에 선혜가 눈을 깜빡이는데 그가 눈을 반쯤 내리깔고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왔다.
쪽.
입술이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빗물에 바람이 스치듯 순식간의 일이었다.
선혜는 눈을 깜박이며 태준을 보았다.
“이러면 좀 나아요?”
얼떨떨한 선혜의 얼굴을 보고 있던 태준이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다가왔다.
전과 달리 조금 오랜 머무름.
두 사람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물렸다가 떨어졌다.
“……이러면?”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있던 선혜가 천천히 눈을 뜨고 태준을 보았다.
반쯤 풀린 선혜의 눈빛을 본 태준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선혜의 뺨을 어루만졌다.
창밖으로는 비가 내리고 비상구에는 단둘뿐.
차분한 공기 속 서로를 바라보는 눈은 묘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작, 입맞춤 두어 번에.
“키스…… 해도 돼요?”
조심스러운 그 질문에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신기한 일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울고 싶을 만큼 기분이 바닥을 쳤었는데 금세 이렇게 웃을 수 있다니.
이 남자 덕분이겠지.
또 도망쳐 버린 자신을 찾아내고, 다가와서 달래주려 애쓰는 이 남자 덕분이다.
가까이 다가온 태준의 얼굴을 눈으로 더듬어가던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다가갔다.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부끄러운 듯 맞붙었다가 떨어졌지만, 태준이 성큼 다가오자 금세 깊어졌다.
숨이 가빠진 선혜가 태준을 살짝 밀어냈다. 어깨를 밀어낸 손 위로 태준의 손이 덮어지고 입술이 떨어졌다. 느리게 올라간 눈꺼풀 사이, 다갈색 눈동자가 유난히 붉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이제 괜찮아진 것 같은데.”
태준의 눈에 장난기가 옅게 스며들었다.
“다행인데.”
아쉽다.
태준이 덧붙여 속삭인 말에 선혜는 또다시 웃고 말았다.
“한 번만 더 하면 안 돼요?”
이마를 붙이고 코를 비비며 조르는 그에게 선혜가 짐짓 엄한 투로 말했다.
“일해야죠.”
“네. 일해야죠. 일.”
태준이 그 말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혜는 그 모습을 보고 또 웃고 말았다. 태준도 그런 선혜를 보고 웃었고.
비 내리는 풍경이 쪽창 너머 그림처럼 걸려 있는 다소 어둑한 비상구.
두 남녀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작게 메아리처럼 울렸다.
*
한편 그 시각 카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매니저와 고은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고은은 울어서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매니저는 팔짱을 끼고 앉아 그런 고은을 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 됐으면 말 해 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은이 말은 않고 손만 꼼지락거리자 매니저가 재촉했다.
“고은 씨.”
“죄송해요. 드릴 말씀이 많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를 몰라서…….”
고개를 기울인 매니저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힐끔 눈을 들어 그 사실을 확인한 고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윤선혜 그 사람. 저희 언니예요.”
“언니?”
매니저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번에는 아는 언니라며.”
“그게, 관계가 좀 복잡해서. 친언니는 아니거든요.”
“친언니가 아니라고?”
“네. 의붓언니예요.”
매니저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의붓?”
“네. 저희 어머니랑 언니네 아버지랑 재혼하면서 자매가 되었었거든요.”
고은은 씁쓸한 얼굴로 덧붙였다.
“지금은 이혼해서 언니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그래서 아는 언니라고 했었던 거야?”
고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 언니라는 사람이 뭘 어쨌길래 소리를 질렀어?”
“그게…….”
고은은 울며 시간을 벌어 생각해 놓았던 말들을 천천히 쏟아냈다.
“사실 언니가 올 때마다 은근히 괴롭혔었거든요. 그게 이번에 터져버린 것 같아요.”
“괴롭히다니?”
“매니저님 눈 피해서 눈치 줄 때도 많았고, 매니저님 안 계실 때는 종종 갑질도 하고 그랬어요.”
가게를 운영하다 보면 갑질하는 손님이 제일 싫은 법이다. 매니저의 미간이 불쾌함에 찌푸려지는 때였다.
“게다가 저번에는, 제가 하지도 않은 짓을 제가 한 것처럼 꾸미기도 했고요.”
“뭐?”
“그때 그 화상 사고요.”
매니저는 태준의 손이 뎄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사실…… 언니가…….”
고은의 눈매가 일그러지고 다시 눈물이 담겼다. 매니저는 급히 휴지 몇 장을 뽑아 고은에게 건넸다. 감사하다며 휴지를 받아든 고은은 조심스레 눈물을 닦아냈다.
“제가 그 남자랑 잘 되는 것 같으니까 그런 식으로 훼방 놨어요. 아까 보시다시피 그 남자는 완전히 언니한테 넘어간 것 같더라고요.”
“아니,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말을 하지 그랬어? 왜 그땐 말을 안 하고.”
“증거가 없으면 아무도 안 믿어주더라고요.”
전에도 이런 일이 많이 있었다는 듯이 말하는 뉘앙스였다.
고은이 자신의 이야기에 몰입한 매니저를 힐끔 보고 멋쩍게 웃었다.
“죄송해요. 매니저님 부담스럽게 제가 너무 무거운 얘기를 꺼내서…….”
“괜찮아. 하여간 얼굴 믿고 그렇게 여우처럼 구는 애들이 꼭 있다니까?”
고은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됐다. 넘어왔어.
“고은 씨가 그동안 마음고생 심했겠네. 나는 그것도 몰라주고.”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까도 괜히 고은 씨 건드린 거 아니야? 뒤에 그 남자 있으니까?”
고은은 그저 웃기만 했다.
이미 머릿속에 막장다운 상상을 마친 매니저가 씨근덕거렸다.
“다음에는 당하지만 말고, 당당하게 얘기해. 알았지. 어?”
“네. 감사합니다.”
“어휴. 진짜 별.”
매니저가 선혜가 멀어진 방향을 노려보며 씨근덕거렸다. 고은은 그런 매니저의 반응을 지켜보다 속으로 몰래 웃었다.
안 믿어 줄까 봐 전전긍긍했었는데.
뭐, 하긴. 사람들은 원래 막장을 좋아하는 법이니까.
‘예나 지금이나.’
친구의 남자친구를 꾄 나쁜 년. 선생님을 유혹한 앙큼한 계집애. 또는 유부남인 대학교수에게 학점을 위해 접근한 불순한 여대생.
그리고 이번에는 여동생에게 갑질하는 영악한 의붓언니로 자리매김한 선혜였다.
*
선혜는 퇴근 후 수호를 데리러 유치원으로 가고 있었다.
와이퍼가 비를 닦아내는 걸 보고 있는데 비상구에서 있던 일이 떠올랐다.
포근했던 품. 다정했던 목소리.
그리고 뜨거웠던 입맞춤.
자기도 모르게 제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던 선혜가 퍼뜩 놀라며 손을 떼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주위를 둘러보고는 헛기침을 한다.
수호 데리러 가는 길인데 건전한 생각만 하자, 건전한 생각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기를 여러 번.
그러는 동안 어느덧 차가 유치원 앞에 도착하였다.
유치원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린 선혜는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길에 낯익은 하얀 벤이 있었지만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막 들어선 선혜는 수호가 늘 앉아 기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발견했다. 수호와 수호의 앞에 서 있는 낯선 여자를.
하얀 투피스를 차려입은 여자는 뒷모습뿐인데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잘 관리된 까만 머릿결은 결 좋게 찰랑거렸고 드러난 피부는 관리받은 태가 났다. 그저 서 있을 뿐인데 예사롭지 않았다.
‘누구지?’
자기도 모르게 서서 여자를 훑어내리고 있는 때였다.
제 앞에 선 여자를 올려다보고 있던 수호가 선혜를 발견하고는 의자에서 폴짝 내려와 다가왔다.
“엄마.”
“어, 수호야.”
다가온 수호가 선혜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그러면서 제 앞에 서 있던 여자를 쳐다보는데, 맑은 눈 속에는 경계와 작은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뭐 때문에 수호 반응이 이런가 싶어 여자를 응시하는데 여자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여자를 본 선혜의 눈이 커졌다.
‘이 사람은.’
신태연.
세빈의 엄마이자, 태준의 누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