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아킬레스건
태준은 선혜와 수호랑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태준은 달력 앞에 섰다.
백 일이라.
날짜를 세며 달력을 넘겼다. 8월, 9월이 지나고 10월로 넘어가서 손으로 날짜를 짚다가 멈칫했다.
“내 생일이네.”
우연치고 기가 막힐 따름이다. 약속의 만기 날이 다름 아닌 자신의 생일이라니.
헛웃음을 옅게 흘리던 태준은 달력을 내려놓았다.
수호의 허락이 생일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태준의 손끝이 애틋하게 달력 위를 어루만지는 때였다.
쏴아아. 창문 너머로 빗소리가 들렸다. 태준은 창가로 다가가 비 내리는 풍경을 응시했다.
“비 오네.”
운전 조심해야 할 텐데.
걱정하는 눈빛이 먼 도로 끝을 향하였다.
*
선혜는 수호와 함께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 있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어둑한 하늘을 선혜가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비가 오려는 것 같은데. 태준은 집에 도착했으려나.
걸어가던 그가 비에 맞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오늘부터 수도권을 중심으로 장마가 시작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장마라. 여름도 이젠 끝나가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선혜는 정지선에 맞추어 차를 세우고 옆을 돌아보았다.
수호는 창밖을 물끄러미 응시 중이었다.
태준과 이야기는 잘했으려나.
사실 자신이 나서서 수호를 달래볼까 고민했지만, 괜히 태준에게 편중하는 거로 비칠까 염려되어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둘이 얘기하라고 자리를 만들어주긴 했는데 잘 얘기했는지 걱정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뒤에 본 두 사람의 분위기는 사뭇 나쁘진 않았는데.
생각에 잠겨 있던 선혜가 수호에게 물었다.
“수호야. 오늘 밥 맛있었어?”
수호가 선혜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맛있었어.”
선혜는 대답하는 수호의 얼굴을 살폈다. 걱정한 것보다 표정이 좋아 보여 안심하는 때였다.
“엄마 근데 있잖아.”
“응?”
“오늘부터 백 밤 자면 언제야?”
“백 밤?”
선혜가 수호의 말에 핸드폰으로 달력을 뒤적거렸다. 백일 뒤를 입력하자 석 달 뒤 날짜가 나왔다. 선혜가 수호에게 날짜를 보여주자 수호가 날짜를 중얼거리며 되새겼다.
“10월 13일이네.”
“근데 그건 왜 물어?”
“그냥. 궁금해서.”
질문의 의중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던 선혜는 곧 신호를 확인하기 위해 앞을 바라보았다.
보행 신호의 파란불이 깜박거리고 있었고 사람들 대부분이 횡단보도를 건너가 있었다. 휑한 횡단보도 위에 의미 없이 시선을 두며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때였다.
누군가가 후다닥 횡단보도를 건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모자를 푹 눌러쓴, 남루한 차림새의 남자 하나.
깜박거리는 파란불을 보며 허둥지둥 달려가는 남자의 머리 위 모자가 벗겨진 건, 남자를 보는 선혜의 미간이 가만히 좁아졌을 때였다.
벗겨진 모자가 선혜의 차 앞으로 떨어졌다. 다가온 남자가 선혜의 차 앞에 다가와 허리를 숙여 모자를 주웠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
“……!”
차창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마주한 두 사람의 눈이 강풍 앞 촛불처럼 흔들렸다.
‘아버지?’
남자는 석주였다.
석주는 선혜를 보고 한참을 자리에 서 있었다. 손에는 모자를 꼭 쥔 채 선혜를 뚫어지게 보다가 옆에 있는 수호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수호를 본 석주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려오고 손에 쥔 모자가 볼품없이 구겨졌다.
그사이에 신호가 바뀌었다.
클랙슨 소리가 빵- 하고 들려오자 석주는 서둘러 모자를 눌러썼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좀처럼 출발하지 못하는 선혜의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엄마?”
저를 부르는 수호의 맑은 목소리에 선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
선혜는 서둘러 액셀을 밟아 차를 출발시켰다. 뒤에 있던 차가 옆을 지나가며 뭐라 욕설을 퍼부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앞을 보는 선혜의 시선 가장자리에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는 석주의 모습이 걸렸다. 선혜의 차가 석주의 옆을 지나갔다. 선혜는 그쪽을 향해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애썼다.
석주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다.
투둑. 차창으로 물방울 두어 개가 떨어지는가 싶더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어, 비 온다.”
수호가 창으로 내리는 비를 응시하며 말했다. 선혜는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하는 비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비 온다.”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데 우산 없이 빈손이었던 석주가 떠올랐다.
근 6년 만에 재회한 아버지. 아버지는 못 본 새에 많이 말라 있었다.
보잘것없이, 너무나 초라하게.
익숙하면서 낯선 그 모습이 쉬이 잊히지 않았다.
*
석주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어느 가게의 처마 밑으로 달려갔다. 젖은 옷에 묻은 물기를 툭툭 털다가 모자를 벗고 머리를 털었다. 모자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 날아간 모자.
모자를 주워들고 일어섰을 때 보인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있던 선혜.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어린 남자아이 하나.
“아들인가 보네.”
입가에 맺히는 씁쓸한 웃음.
궁금하긴 했었다. 네 배 속에 있던 아이는 아들일까 딸일까. 아이는 건강하게, 무탈 없이 낳았을까. 너는 그 아이와 잘 지내고 있을까.
무슨 염치로 궁금해하는 거냐. 그럴 염치가 너에게 있어?
알면, 뭘 해 줄 건데.
뭘 해 줄 수 있는데.
반사적으로 들려오는 엄한 꾸짖음에 석주는 생각을 멈추었다.
비를 쏟아내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가 온다. 추적추적.
우산을 들고 와 달라 할 이는 아무도 없다.
우산을 들고 먼저 달려와 줄 이도 없고.
머나먼 추억 속 비가 오던 날, 자신에게 달려와 주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투명한 비닐우산. 그 너머로 다가오던 수줍은 시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가슴이 저리다.
석주는 모자를 다시 눌러 썼다.
행여라도 누가 볼까. 알아보면 어쩌나.
그런 걱정으로 어깨가 좁아지고 고개가 아래로 떨어진다.
석주는 빗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리는 비를 그저 맞았다. 차갑다고, 아프다고 막지 않았다.
피하려고 더 이상 달리지 않았다.
소심하고 처연한 뒷모습이 그렇게 빗속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
본격적으로 장마가 시작되었다.
여름이 끝나가는 게 아쉽기라도 한 듯이 비는 무섭게 퍼부어댔다. 호우 주의보를 알리는 문자가 시끄럽게 핸드폰을 울리고, 비로 인한 도로 정체로 지각을 하는 사원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치솟는 습기에 에어컨은 바삐 돌아가고 사람들의 불쾌지수가 상승하여 저마다 예민해지는 가운데, 태준만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비 오는데 우산 잘 챙기고. 빗길 조심하고.]
[네.]
[유치원 잘 다녀오고.]
[네.]
[다음 주말에는 아저씨랑 꼭 수영 과외 하자.]
[네.]
수호에게서 답변이 오기 시작했다. 대답이라고는 ‘네.’ 한 글자뿐이지만 읽고 무시하던 전에 비하면 감지덕지였다.
“누구랑 연락하길래 그렇게 실실대?”
그런 태준을 미심쩍게 바라보며 형주가 물어왔다.
“그냥. 친구예요.”
“에이. 그냥 친구랑 연락하는 얼굴이 아닌데.”
형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속삭였다.
“신 주임 요새 연애하지.”
태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대답했다.
“네.”
맞은편에 앉아 업무를 보던 성균이 물을 마시다 사레가 걸려 콜록거렸다. 태준의 대답을 들은 다른 직원들이 파티션 너머로 관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너무 티 내는 거 아냐? 보는 사람 질투 나게.”
“알겠습니다. 자중할게요.”
“근데 뭐 하는 여자야? 신 주임 정도면 여자도 장난 아닐 것 같은데.”
태준은 선혜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장난 아니긴 하죠.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거든요.”
형주가 입술을 오므리고 눈을 크게 떴다. 맞은편에 앉은 성균은 사레가 들리지 않았음에도 짐짓 헛기침을 크게 냈다. 태준이 짓궂은 얼굴로 그런 성균을 힐끔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화장실이요.”
더 있다가는 여기저기서 호기심 어린 질문들이 날아올 것 같아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지만 태준은 적당히 둘러대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와 동시에 선혜도 사무실에서 지갑을 챙겨 나오고 있었다. 때마침 복도에는 선혜와 태준뿐이었고. 반가운 우연에 태준이 웃으며 다가갔다.
“어디 가요?”
“커피 사러 카페 가요.”
“또 한 팀장 심부름이에요?”
“아뇨. 지각한 벌로 커피랑 간식 사기로 했어요.”
지각이라니. 철두철미한 선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태준이 눈을 크게 떴다.
“출근길에 별일 있었던 건 아니죠? 사고라던가.”
선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비가 많이 와서 차가 막히는 바람에.”
“커피랑 간식까지 사서 들고 오려면 손 부족할 텐데. 같이 가서 도와줄까요?”
“괜찮아요. 이젠 요령이 제법 생겨서.”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옅게 미소 짓는 선혜의 얼굴 위로 태준의 시선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 시선이 다소 부담이었는지 선혜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혹여라도 누가 볼까, 조심스럽게 주위를 눈으로 훑어보던 그녀가 말했다.
“이만 가 볼게요.”
“아, 네.”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틀어 길을 내어주었다. 멀어지는 선혜의 뒤로 태준의 눈이 길게 머물렀다.
‘요새 좀 지쳐 보이는 것 같은데.’
가끔 마케팅부 사무실을 지나칠 때 창문 너머로 볼 때면 홀로 앉아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홀로 복도를 걸어가다가 태준을 마주칠 때도 마찬가지. 방금처럼 태준을 마주할 때면 웃어 보이기는 하나 지친 기색이 완전히 걷히지는 않았다.
겨우 몸을 돌려 화장실로 몇 걸음 걸어가던 태준은 얼마 안 가 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로 달려갔으나 이미 문은 닫혔고 내려가는 상황.
태준은 다른 엘리베이터의 내림 버튼을 누르고 내려오는 숫자를 응시했다.
도와줄 겸.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지.’
*
매니저가 은행 업무를 잠깐 보러 간 동안 고은은 혼자 카페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카페는 손님이 하나도 없어 한가하기 그지없건만 고은의 얼굴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시간을 확인하는 얼굴에 조바심이 묻어났다.
오늘은 고은이 입사 원서를 넣은 기업의 채용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그리하여 손꼽아 발표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드디어 발표 시간.
떨리는 손으로 접수 번호를 입력하고 조회 버튼을 꾹 눌렀다.
두근두근. 기대에 부푼 가슴을 안고 답을 기다렸다.
짧은 순간 월급으로 비싼 명품을 지르고 흥청망청 노는 자신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상상만 해도 행복함에 입이 해죽 벌어지는 때였다.
곧 문구가 떠올랐다.
[유감스럽게도 귀하는 합격자 명단에 없습…….]
고은의 표정이 단숨에 굳더니만 표독스럽게 변했다.
“아, 진짜!”
고은은 문구를 채 다 읽지도 않고 분에 못 이겨 핸드폰을 소리 나게 엎어버렸다.
또다, 또. 아무리 취업난이라고 하지만 너무한 거 아니야?
벌써 몇 번째 불합격인지 모른다.
대체 왜 합격을 못 하는 거야. 대체 왜!
합격할 만큼의 노력을 쏟아붓지도 않았으면서 결과가 부당하다며 성을 내는 고은이었다. 컷트라인이 낮아 만만하게 보았던 회사라서 더 자존심이 상했다.
씩씩거리는 고은의 얼굴이 벌겠다. 매니저가 없었기에 고은은 혼자 실컷 매장 휴지를 잡아 뜯으며 분풀이를 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씨근덕거리고 있는 때였다. 달갑지 않게도 카페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은은 심호흡을 몇 번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고은의 얼굴이 다가오는 선혜를 보자마자 굳어버렸다.
왜 손님이 와도 하필 쟤야.
선혜는 저를 곱지 않게 바라보는 고은의 시선을 덤덤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그 무심한 얼굴에 화가 더 뻗치는 건 무언지.
“주문, 하시죠?”
고은의 아니꼬운 말투에도 선혜는 동요가 없었다.
선혜는 특유의 차분한 말투로 주문을 시작했고 고은은 선혜가 주문한 메뉴를 포스 위로 꾹꾹 찍어냈다. 그리고 곧 음료를 만들기 위해 몸을 돌렸다.
선혜는 테이크 아웃 카운터에 서서 고은이 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고스란히 내려와 몸에 꽂혔다. 왜 저렇게 쳐다보나 싶어 노려보지만, 선혜는 흔들림 없는 태도를 고수하며 고은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무표정이었다.
고은은 음료를 마저 만들기 위해 선혜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시야의 가장자리에 선혜가 목에 건 사원증이 스쳤다.
새삼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사 시험에 줄줄이 떨어지는 자신과 대기업 계열사에 떡하니 입사한 선혜.
그런 선혜의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다 엎고 뛰쳐나가고 싶은데 고은은 꾸역꾸역 음료를 만들었다.
참자. 참아. 또 성질대로 행동했다가 잘릴 수는 없지.
심호흡으로 겨우 속을 달래고 음료를 완성한 뒤 추가 주문한 케이크까지 포장해서 내밀었다.
더 이상 쳐다도 보기 싫어 몸을 돌리는 때였다.
“아버지는 요즘 뭐 하고 지내셔?”
고은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고은은 천천히 선혜를 돌아보았다.
“뭐?”
“아버지는 요즘 뭐 하고 지내시냐고.”
겨우 평정심을 유지하던 고은의 얼굴에 금이 갔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하냐?”
.
.
.
선혜는 고은의 공격적인 어투에 미간을 좁혔다.
그냥 궁금해서 물었을 뿐이다. 얼마 전에 보았던 석주가 계속 신경이 쓰여서.
기억 속의 깔끔했던 모습과 정반대인 그 모습이 떠올라 안부가 궁금했을 뿐이었고 물을 사람은 고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잘 지낸다는 안부를 전해 듣는다면 그래도 마음이 편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전처럼 다시 묻어둘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물은 거였는데.
성큼성큼 다가온 고은이 으르렁거렸다.
“그 인간 안부를 나한테 왜 물어?”
그 인간. 거슬리는 고은의 언사에 선혜가 얼굴을 찌푸리는데.
“나도 몰라. 이혼한 지 한참 돼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혼. 그 단어에 선혜의 얼굴이 굳었다.
“너 그렇게 집 나가고 나서 우리 집이 어떻게 됐는지 알기나 해? 할머니는 뒷목 잡고 쓰러지신 지 얼마 안 돼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맨날 술만 달고 살고, 일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해서 엄마랑 나랑 돈 버느라고 개고생하고!”
과거를 상기하는 고은의 눈이 벌게졌다.
“그래서 이혼하고 갈라서서 그 아저씨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왜!”
고삐 풀린 고은이 마구 소리쳤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그때 그놈한테 시집만 얌전히 갔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 가족을 위해 너 하나 희생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장녀면 장녀답게 행동을 했어야지!”
“가족?”
고은의 울분에 찬 목소리와는 상반된 서늘한 목소리였다.
선혜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가족은 무슨 가족.”
“뭐?”
“필요할 때 팔아먹고 이용하는 게 무슨 가족이야. 피 섞이고, 호적상으로 묶였다고 가족이니?”
“너, 너…….”
“자업자득이야.”
선혜가 말했다.
“할머니도, 너도, 새어머니도, 그리고…… 아버지도.”
씹어뱉듯 내뱉는 목소리는 칼날 같았다.
“자업자득이라고.”
말을 마친 선혜는 커피와 케이크 포장을 손에 쥐고 돌아섰다.
하지만 눈앞에 드리워진 누군가의 모습에 얼마 가지 못하고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윤선혜, 너……!”
선혜를 향해 윽박지르며 카운터를 뛰쳐나오던 고은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을 잇지 못했다. 고은은 자기도 모르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선혜는 애써 동요하지 않는 얼굴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응시했다.
“…….”
선혜의 앞에는 태준이 서 있었다.
주머니에 느슨하게 한 손을 찔러 넣은 채, 전에 없이 차가운 눈을 한 태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