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42화 (42/109)

#42. 수호 아빠

별일 없었다는 수호의 얼굴을 선혜는 빤히 들여다보았다. 별일이 없었다기엔 뭔가 애매하다 싶어 고개를 갸웃하는 때였다.

수호가 선혜의 손을 잡고 칭얼거렸다.

“엄마. 나 배고파.”

“어, 그래.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을까?”

“응.”

“그래.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게.”

선혜가 수호의 손을 꼭 맞잡아주며 우산을 펼쳤다.

우산은 선혜와 수호 둘 다 빗방울 하나 맞지 않게 할 정도로 컸다.

우산을 올려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짓던 선혜는 알지 못했다. 수호가 다소 불안한 얼굴로 그런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수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다는 사실도.

*

집으로 돌아온 선혜는 수호를 배불리 먹인 뒤 서재로 들어왔다.

태준의 서재 만큼은 아니지만, 꽤 많은 책이 책장에 꽂혀 있다.

대부분이 디자인과 관련된 전문 서적과 수호를 위해 마련된 동화책들이었다. 육아와 관련된 책은 세 권이 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태교와 이유식 요리책이었다.

‘책을 좀 사 와야겠네.’

태준의 노력에 자극을 받았는지 그런 결심이 섰다.

내년이면 수호도 벌써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된다. 그러면 사춘기도 금방일 테고. 책을 통해 미리 이것저것 공부하고 알아두어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

선혜는 수호를 수영장에 데려다준 뒤 근처 서점으로 향했다.

한 대형 서점에 도착한 선혜가 천천히 발을 들이며 두리번거리자 직원 하나가 친절한 미소를 띠고 다가와 물었다.

“특별히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으신가요?”

“네. 육아 관련 서적 찾으러 왔는데요.”

“이쪽으로 오세요.”

직원의 안내를 따라가자 ‘육아 관련 서적’이라고 적힌 하얀 팻말이 보였다. 책장과 선반 위에 빼곡하게 쌓인 책을 흥미롭게 쳐다보는데 직원이 물었다.

“애기 엄마예요?”

의외라는 투였다.

“네.”

“어머, 그렇구나. 애기가 몇 살이에요?”

“일곱 살이에요.”

직원은 선혜의 대답에 아까보다 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애기는 좋겠어요. 엄마가 이렇게 미인이라서.”

“감사합니다.”

선혜는 직원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직원은 수호의 나이대에 맞춘 육아 서적이 분류된 곳을 한 번 더 안내해 주고 멀어졌다. 직원의 뒷모습을 고마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선혜는 이내 책들을 눈으로 훑었다.

육아 관련 책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뭐부터 봐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잠시 난감했다. 손가락으로 책 위를 툭툭 두드리며 훑어보던 선혜는 우선 제목이 마음에 드는 것부터 골라 죽 훑어보았다.

그렇게 두어 권을 들었다 놨다 했을 무렵.

제목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띄는 책이 하나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부모여도, 괜찮습니다.]

선혜의 시선이 제목 위로 길게 머물렀다. 속으로 책의 제목을 천천히 되뇌던 선혜가 책 앞으로 다가가 책을 펼쳤다.

두껍지 않아 마음의 부담도 적었고 목차들 또한 전문 서적이라기보다는 에세이에 가까웠다.

저자는 아동 심리학 전문가였다. 하지만 작가 소개에서는 집필자를 아동 심리학 전문가에 초점을 두어 소개하기보다는 한 아이의 엄마로 소개하고 있었다.

한 어머니가 한 아이를 키우면서 겪은 우여곡절들. 그 우여곡절을 겪으며 깨달은 것들을 에세이로 엮어낸 책이었다.

물론 아동 심리학 전문가답게 전문 지식도 들어 있었지만, 일반인이 받아들이기에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였다.

책이 마음에 든 선혜는 근처에 놓인 의자 앞에 앉아 책을 펼쳤다.

훑어보았던 아까와는 달리 작가의 말부터 차근차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책은 아동 심리학 전문가인 저의 실습 일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제가 아동 심리학 전문가라는 데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육아라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라고 오만하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완벽한 부모가 될 것이고, 또 그렇게 키운 아이는 완벽한 아이가 될 것이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흑역사라고나 할까요. 쓰고 있는 지금도 이불을 덮고 있다면 이불킥을 시전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작가의 유머러스한 서두에 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선혜는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다가 작가의 말을 마저 읽어내려갔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죠. 그 말은 완벽한 부모 또한 없음을 뜻합니다.]

책장을 넘기는 선혜의 눈이 따스하게 물들었다.

[그러니까 여러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서툴러도 괜찮아요.]

다음 글귀에 선혜의 시선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니까.]

*

태준은 기분 좋은 얼굴로 집을 나서고 있었다.

발걸음이 가볍기 그지없다. 그 어느 때보다도 위풍당당한 걸음걸이. 한껏 고양된 얼굴 위에는 준비된 자신감이 만연했다.

드디어, 수호를 만나러 수영장에 간다.

어제는 시간이 엇갈렸지만, 오늘은 수호의 수영 강습 시간에 맞춰 나가는 길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열심히 공부했다.

아이들의 심리에 대해서 아주 빠삭하게 익혀 놨다 이거다.

배웠으니 써먹어 주리라. 그래서 닫힌 아이의 마음을 회까닥 열어젖히리.

“음음음-음-.”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비 온 뒤 무덥고 습한 날씨의 불쾌지수는 현재 태준의 기분에 전혀 악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수영장에 도착한 태준은 샤워실에서 간단히 샤워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영모를 쓴 그가 벌컥 탈의실 문을 열어젖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수호가 듣는 수영 강습이 막 시작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아이 중에서도 수호가 한 눈에 들어왔다.

수호를 바라보는 태준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는 수호.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태준은 수호를 향해 손 인사를 건넸고 수호는 비딱한 표정을 짓다가 그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수호의 매정한 반응에도 태준은 그저 웃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가 수호에게 물을 끼얹었다. 태준의 시선이 자연히 그쪽을 향했다.

낯익은 얼굴. 바로 어제 수호를 놀리던 아이들 무리였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눈을 피해 수호에게 물을 튀기며 자기네들끼리 키득거리고 있었다.

‘저것들이.’

분에 찬 태준의 발이 움찔거리는 때였다.

“선생님. 얘네들 자꾸 장난쳐요.”

야무진 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수호의 말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무어라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호는 보란 듯이 자리를 옮겨 괴롭힘에서 스스로 벗어났다.

아이들은 입을 비죽거리며 수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자기네들끼리 귓속말을 소곤거렸다. 짓궂은 표정들을 보아하니 아주 깜찍한 짓거리를 공모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을 괘씸하게 쳐다보던 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것들을 어쩐다.’

턱을 천천히 쓸던 그의 눈에 어느 순간 반짝 이채가 서렸다.

아이들은 영웅을 좋아하는 법이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자신을 구해주는 히어로에게 약해지는 법.

‘어디 우리 꼬맹이들 인생 교육 좀 빠삭하게 해줘 볼까.’

목 스트레칭을 하는 태준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

수영 강습을 마치고 수호는 탈의실로 들어왔다. 사물함을 열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엄마인 선혜에게 끝났다고 메시지를 하나 보내놓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윤곰팡 수영복 불쌍해서 어떡해? 쟤도 곰팡이 피는 거 아냐?”

윤곰팡? 애들이 제멋대로 갖다 붙인 별명에 빠직 이마에 힘줄이 솟았지만, 수호는 무시하려 애썼다.

사람 놀려먹기 좋아하는 애들한테 반응을 보이는 건 더 놀릴 여지를 던져 주는 꼴이었다. 반응하면 할수록 더 재미있어하고 괴롭히기 마련이었다.

수호가 이렇듯 괴롭히는 아이들 심리를 잘 아는 이유는 놀림 받은 경험이 많기 때문이었다.

어린이집에 다니던 시절부터 ‘아빠 없는 애’라고 놀리는 친구들이 반에 한 명씩은 꼭 있었다.

처음에야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그거야 다섯 살 때 얘기고. 일곱 살인 지금은 달랐다.

무시하면 흥미를 잃고 금방 시들해져 버리곤 했다. 저 아이들도 분명 그럴 것이다. 곰팡이라는 별명은 ‘아빠 없는 애’라는 별명보다는 훨씬 그 강도가 약해서 수호도 동요가 적었다. 그저 귀찮을 뿐이다.

배고픈데 엄마한테 맛있는 거 먹자고나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짐을 챙기는 때였다.

휙. 누군가가 젖은 수영복을 날쌔게 채갔다. 놀라 눈을 깜박거리는 사이 수영복이 쓰레기통에 날아가 처박혔다.

“오예, 골인!”

수호가 굳은 얼굴로 수영복을 던진 친구를 쳐다보았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수영복에 곰팡이 폈길래 버렸다. 어쩔래?”

혀를 쏙 내밀며 하는 말에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수영복도 아니고 할머니가 처음으로 사 준 수영복이었다. 그 소중한 수영복을 쓰레기통에 저따위로 처박다니.

수호가 씨근덕거리며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이제 더는 못 참겠다 싶어 달려들기라도 할 심산으로 주먹을 꽉 쥐는 때였다.

“윤수호. 동작 그만.”

귀에 익은 목소리에 수호가 움찔하며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태준이 서 있었다. 태준의 등장에 키득거리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한순간에 뚝 그쳤다.

태준은 대치한 아이들을 응시하다가 쓰레기통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 깊숙한 곳에 손을 넣어 수호의 수영복을 꺼냈다. 그새 쓰레기가 달라붙은 수영복을 무심한 손길로 툭툭 털어낸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수영복을 집어 던진 아이와 그 무리를 무표정하게 응시하던 태준이 입을 열었다.

“야. 너희들.”

손을 느리게 까딱까딱.

“일로 와 봐.”

아이들의 낯빛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

악동 무리는 저들끼리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야, 네가 먼저 가.

아냐. 너부터.

네가 수영복 던졌잖아. 네가 가!

이런 말들이 주고받는 시선 속에 오고 가는 것 같았다.

결국, 아이들이 쭈뼛거릴 뿐 오지 않아서 태준이 다가가 섰다.

커다란 태준의 그림자가 아이들을 덮었다.

“곰팡이가 피기는 뭘 펴. 멀쩡하구만.”

젖은 수영복을 들이밀며 하는 말에 아이들은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리고 너네. 아무리 애들이라지만 유치하게 그러는 거 아니다. 사내자식들이 비겁하게 여러 명이서 한 명 괴롭히고 말이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괴, 괴롭힌 거 아니에요!”

태준의 말에 한 명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럼 뭔데?”

“그냥 논 거예요!”

“마, 맞아요. 논 거예요!”

소리를 빽 지르는 아이들을 보며 태준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쳤다.

“친구가 싫어하는 별명 부르고 친구 물건 함부로 내다 버리는 게 노는 거라고?”

“아, 친구들끼리 서로 놀리고 장난칠 수도 있는 거죠!”

“아, 그러셔?”

태준이 대드는 아이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하며 반문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척 들어올려 한 명을 가리켰다. 눈이 유독 작은 아이였다.

“그러는 너는 콩 눈.”

태준의 손가락이 그 옆으로 옮겨갔다. 이번에는 뒷머리가 유난히 솟아올라 영화 이티를 연상시키는 아이였다.

“너는 이티.”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운데에 있는 아이를 척하니 가리켰다.

“너는 뚱돼지.”

저마다의 약점을 별명으로 불린 아이들이 단체로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수호가 너네 이렇게 불러도 너희는 상관없겠다? 노는 거니까.”

태준이 손가락을 들어 세 아이를 조목조목 짚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곤 남아 있지 않았다.

“너희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수호 괴롭혀봐. 그럼 내가 늬들 별명 쫓아다니면서 질리도록 불러줄 테니까. 알았어?”

이 정도까지 했으면 기가 죽어 알겠다고 할 줄 알았건만.

뚱돼지라고 불린 아이가 빽 소리쳤다.

“아저씨가 뭔데 참견이에요?”

태준의 눈이 아이에게 향했다.

“아저씨가 뭔데 참견이냐고요!”

“나?”

내가 뭐냐고?

태준은 잠시 뒤에 서 있는 수호를 바라보았다. 수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태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태준은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수호 아빠다, 어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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