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40화 (40/109)

#40. 데이트 장소

아침부터 태준은 나갈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런 태준의 오른손은 오랜만에 맨손이었다.

금요일인 어제, 퇴근 후 들른 병원에서 소독이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소견을 들었다.

붕대를 풀었을 뿐인데 손이 가뿐했다. 태준은 흉터 없이 깔끔하게 나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싱긋 웃었다.

고개 들어 거울을 보았다.

카라와 소매에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포인트가 들어간 흰 카라티. 베이지색 면바지에 단정함을 더하는 벨트. 너무 어려 보이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꾸며 상대를 부담스럽게 하지 않는, 일명 ‘꾸안꾸’ 데이트 룩.

선혜를 만날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왁스로 흐트러진 머리를 가볍게 고정하고 혹시라도 수염이 덜 밀린 데가 없나 허리 숙여 거울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 이리저리 살피길 여러 번.

거울 모퉁이에 비치는 벽걸이 시계로 슬슬 나가야 할 때임을 인지한 태준이 허리를 들었다.

양말을 신기 위해 침대에 앉아 다리를 구부리는 때였다. 돌연 무릎에 시큰거리는 통증이 느껴져 태준의 미간이 가만히 좁아졌다. 커다란 손이 무릎을 매만졌다.

오래전에 교통사고로 다친 무릎이 새삼 아파졌다.

비가 오려나?

태준은 베란다 밖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짐작과는 다른 날씨 상태였다.

눈부실 정도로 해가 쨍했다. 하얀 솜사탕 같은 구름만이 듬성듬성 있을 뿐, 비를 부르는 먹구름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시큰거리는 무릎 통증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

“자다가 부딪혔나.”

태준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며 흰 덧신에 발을 넣었다.

더운 날씨 탓에 마음 같아서는 샌들을 신고 싶었지만, 단화를 신었다. 신발장 옆에 놓인 거울 앞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한 번 검토하고는 태준은 현관을 나섰다.

태준은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늦지 말아야 할 텐데.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데이트 시간으로 잡은 시각은 열 한시부터 열두 시까지, 한 시간 남짓.

수호가 수영 강습을 받는 시간대였다.

현재 시각은 열 시 오십 분.

걸어가면 오 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재촉하는 태준의 발걸음에 서두름이 묻어났다.

그러면서도 메시지를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수영장 잘 다녀와, 수호야. 깊은 물 조심하고, 뛰다가 넘어지지 말고.]

수호의 답장은 여전히 없었으나 선혜를 만난다는 사실로 마음을 달래는 태준이었다.

*

선혜는 수호를 데리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영장에 다 왔을 때쯤, 수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무심결에 돌아보았다가 화면에 뜬 태준의 이름과 메시지 내용을 보게 되었다.

[수영장 잘 다녀와, 수호야. 깊은 물 조심하고, 뛰다가 넘어지지 말고.]

상투적이지만 수호를 향한 태준의 마음이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보고 수호가 하는 행동은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다.

곁눈질로 흘끔 보고 말 뿐. 답장은커녕 제대로 메시지를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무생물인 핸드폰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친구한테 문자 온 거 아니야?”

선혜는 태준의 메시지를 못 본 척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가히 기가 막혔다.

“스팸이야.”

스팸이라니. 선혜는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수호를 보다가 물었다.

“너 스팸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알아?”

“엄마가 저번에 알려줬잖아.”

퍼뜩 스치는 기억 속, 핸드폰을 사 주며 스팸 문자를 조심하라고 하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그때 알려준 단어를 이런 식으로 사용할 줄이야.

예전 같았으면 가르쳐 준 말을 잘 써먹는다고 뿌듯해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착잡하기만 할 뿐.

오늘 만나면 잘 해줘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차는 어느덧 수영장에 도착해 있었다.

그늘진 곳에 차를 주차하고 선혜는 수호와 손을 잡고 수영장 앞으로 갔다.

“잘 다녀와. 끝나면 전화하고.”

“응. 다녀올게.”

건물 입구에서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수호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선혜는 몸을 돌렸다. 차로 향했지만 올라타진 않았다.

다만 차 옆에 서서 사이드미러를 연 뒤 작은 크로스백에서 립스틱을 하나 꺼냈다.

혹시나, 눈치 빠른 수호가, ‘엄마 오늘 왜 그렇게 꾸몄어?’라고 물을까 싶어 립스틱만큼은 바르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가 없는 지금 주인 몰래 빵을 훔치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하게 립스틱을 발라보았다.

코랄 색 립스틱이 연한 핑크빛 입술 위로 그려졌다.

겨우 립스틱을 발랐을 뿐인데, 단번에 생기가 돌았다. 입술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머리칼을 손으로 빗질하며 쓸어내리는 때였다.

문득, 태준이 한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냥 풀면 안 되나.’

‘묶은 게 더 예쁜 것 같은데.’

선혜는 머뭇거리다 손목에 감긴 밴드로 머리를 묶었다.

괜스레 손가락으로 머리끝을 말다가 몸을 돌렸다.

드러난 목덜미로 스치는 여름 바람의 습기가 간지럽다 느껴지는 찰나, 태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 어디쯤이에요?

“가고 있어요.”

- 얼마나 걸려요?

십분, 이라는 대답을 애써 속으로 갈무리하고 선혜가 대답했다.

“오 분 정도.”

대답을 마친 선혜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

수호는 탈의실에 도착하여 사물함을 열었다. 혼자 야무지게 옷을 갈아입은 뒤 사물함을 닫기 전. 무언가가 생각난 얼굴로 수호는 가방에 손을 밀어 넣었다.

핸드폰을 꺼낸 수호가 뒤늦게 태준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물끄러미 꽤 한참을 들여다본다.

‘아저씨 안 오나 보네.’

수영장에 올 거였다면 이따가 수영장에서 보자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잘 다녀오라는 내용이 아니라.

수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가방에 넣었다.

사물함을 닫고 열쇠를 손목에 칭칭 감았다. 제 손을 보다가 문득, 붕대가 감겨 있던 태준의 손이 생각이 났다. 그래, 손을 다쳐서 안 오는 거겠지, 하다가 손을 다쳤음에도 수영장을 찾았던 태준의 모습이 생각났다.

‘나 때문인가.’

생각을 곱씹던 수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만 생각해. 마주치면 불편한 아저씨, 안 오면 좋지, 뭘.

만나면 분명 귀찮게 굴 게 뻔할 텐데.

수호는 마음을 다잡고 수영장으로 갔다. 수영장 특유의 냄새가 훅 끼쳐온다. 타일에 부딪히는 물소리, 메아리쳐 흩어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를 윙윙 울렸다.

태준이 애용하던 가운데 레인을 응시하던 수호의 시선이 겨우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진 시선이 향한 곳은 지난번에 넘어져 크게 다칠 뻔했던 은색 사다리 옆.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안아주었던 태준이 생각났다.

단단하고 따듯했던 품도.

수호는 괜히 고개를 숙여 발끝으로 타일 바닥을 툭툭 치다 걸음을 옮겼다.

풀장 턱에 걸터앉아 다리를 물에 담갔다. 물 위를 동동 떠다니는 킥패드에 의미 없는 시선을 두다가 힘차게 발을 굴러 물을 찼다.

첨벙첨벙.

한참 물을 차던 수호가 돌연 하던 걸 그치고 중얼거렸다.

“……재미없어.”

*

태준은 약속 장소인 브런치 카페 건물 앞에 서서 선혜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선혜가 눈에 들어왔다. 태준은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고 선혜는 태준이 기다리고 있음에 발걸음을 더욱 재촉하여 다가와 섰다.

“더운데 들어가 있지 그랬어요.”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어요.”

태준이 손사래를 치면서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선혜가 멀쩡한 그의 오른손을 보고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손 다 나은 거예요?”

“네.”

태준이 보란 듯이 손바닥을 허공에 뒤집어 보였다. 다행이라는 듯 미미하게 웃어 보이는 선혜의 모습에 태준의 얼굴 위로 드리워진 웃음기가 더욱 진해졌다.

“들어갈까요?”

태준의 말에 선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코트하듯이 태준이 문을 열었다. 묵직한 목재 문이 열리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불어왔다.

아. 시원해.

밀어오는 찬 바람 속에서 가쁜 숨을 길게 몰아쉬는 때였다.

“하하하! 대박, 진짜요?”

폭풍처럼, 귀에 익은 목소리 하나가 귀를 때렸다.

순간 숨을 들이켠 선혜는 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

창가에 앉아 있는 지민을.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있는 민영을.

선혜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어어?”

선혜를 따라 들어오려던 태준은 갑자기 선혜가 돌아서서 가슴팍을 밀며 걸어 나오자 엉겁결에 뒷걸음질을 쳤다. 문이 도로 닫히고 태준은 제 앞에 바짝 다가와 선 선혜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왜 그래요?”

“그게.”

선혜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우리 팀 직원들이 있어요. 김지민 주임이랑 임민영 대리님.”

“네? 그 둘이요?”

태준이 반문하자 선혜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다른 회사 직원들도 마찬가지지만 지민과 민영은 피해야 할 대상 1호였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 데다, 입은 또 어찌나 가벼운지. 저 두 사람에게 데이트하는 모습을 들켰다가는 회사에 소문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나와서 다행이지. 선혜는 떨리는 가슴 위로 손을 올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다른 데로 가 볼까요?”

“네.”

둘은 빠르게 카페 근처를 벗어났다.

카페 골목답게 각기 다른 분위기로 꾸며진 카페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카페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빈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 주말의 오후. 사람들이 피서지 삼아 카페에 몰렸는지 모두 만석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카페를 찾다가 얼마 없는 시간을 다 허비하게 생겼다.

흘러가는 시간을 보며 둘 다 조바심을 느끼는 찰나였다.

투둑.

이마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모르는 새에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기가 무섭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태준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비를 피할 만한 곳을 훑었다. 마침 근처에 차양이 넓게 드리운 가게 하나가 있었다.

“선혜 씨, 이쪽으로!”

가방으로 황급히 머리를 가리던 선혜는 태준을 따라 비를 피해 뛰었다.

*

쏴아-.

쏟아지는 비를 보며 태준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대체 뭐람.

나름 첫 데이트라기에 설레면서 나왔건만. 기껏 알아본 카페에는 회사 사람들이 있지 않나, 카페는 죄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만석이지 않나. 거기에 비까지 맞고.

비도 그냥 비가 아니라 장대비가 쏟아졌다.

소나기라고 하기에는 하늘은 너무 어두웠고 빗줄기는 가늘어질 줄을 몰랐다. 태준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선혜는 입을 꾹 다물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운지 손으로 젖은 팔뚝을 감싼다. 비에 젖은 안색이 파리한 것 같기도 했다.

“추워요?”

“조금요.”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라 할지라도 온몸이 쫄딱 젖으니 한기가 몰려왔다.

“우산 가져올걸.”

무릎이 보내는 신호를 믿었어야 했는데. 태준은 아픈 다리 쪽 발 앞부분을 바닥에 툭 내리치며 중얼거렸다. 웃옷이라도 있으면 벗어 줄 텐데 여름이라 입은 거라고는 반팔 셔츠가 다였다.

비를 피할 만한 카페가 없을까. 어디 들어가서 담요라도 한 장 빌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와중이었다.

우뚝 솟은 오피스텔 건물이 눈에 들어온 것은.

다른 카페를 찾아 골목을 헤매다가 어느덧 집 앞까지 온 모양이었다.

태준의 시선이 오피스텔 건물에 길게 머무르는 때였다.

“하아.”

옆에서 선혜의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난감한 눈으로 빗속을 헤매다 하늘로 향하는 시선도. 비에 젖은 연약한 몸도, 추운지 팔뚝을 계속해서 감싸고 비비는 손동작도.

태준의 눈동자가 다시금 오피스텔 건물로 향했다.

문득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남아 있는 시간은 30분 남짓.

첫 데이트를 이렇게 망친 채로 선혜를 집에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추위에 떠는 그녀가 감기에 걸리게 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조금 오버하는 감이 있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혜 씨.”

선혜가 돌아보고 눈이 마주치자 태준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부르고 좀처럼 말을 하지 않자 선혜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태준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요?”

역시나 선혜가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태준이 멋쩍은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우리 집에…… 건조기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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