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39화 (39/109)

#39. 유난히 더운, 여름의 어느 날

출근하는 태석에게 직원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사님.”

“좋은 아침.”

김 비서의 인사에 젠틀한 미소로 화답한 뒤 이사실로 들어온 태석은 책상 앞 의자에 앉다가 무언가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액자가 하나 있었다. 파쇄하기 아까워 남겨두었던 수호의 사진이 크기에 맞는 액자에 끼워져 있었다. 태석이 피식 웃으며 액자를 손에 들고 김 비서에게 물었다.

“김 비서 작품이야?”

“네. 책상 정리하다가 발견해서요.”

“잘했네.”

태석이 액자를 제자리에 두었다. 수호의 사진을 보는 그의 얼굴에 따듯한 미소가 서렸다.

김 비서가 태석과 수호의 사진을 번갈아 보다가 농담을 섞어 던졌다.

“두 분도 닮았네요. 누가 보면 이사님 아들인 줄 알겠습니다.”

“태준이가 날 닮았으니 얘가 날 닮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태준이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 태석은 대학생이었다. 때문에 같이 다니면 아들이 아니냐는 소리를 종종 듣기도 했다.

그럼 태준은 ‘아빠 아니에요! 형이라고요!’ 소리를 빽빽 질러대곤 했었지.

그리고 자기 잘했냐며 태석을 향해 빙긋이 웃곤 했다. 태석은 그런 태준의 머리를 기특하다며 쓰다듬어 주었었고. 물론 그 반대로 행동해서 곤란하게 만든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오래전 과거를 회상하는 태석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걸렸다.

수호는 그 시절 태준을 쏙 빼닮아 있었다. 귀엽고 천진해서 가끔은 그리워지는 그 시절의 태준을.

그랬던 태준이 애 아빠라니. 아직도 잘 믿기지 않는다.

“얘기는 잘했나 모르겠네.”

얘기했는지도 궁금했지만 얘기를 한 뒤 태준의 반응도 궁금했다.

그 녀석, 지금쯤 어쩌고 있으려나?

*

축 처진 태준의 입 밖으로 한숨이 길게 새어나갔다.

수호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안 지 어느덧 닷새째.

수호한테 읽씹을 당한 지도 닷새째였다.

[수호야, 오늘도 파이팅. 유치원 잘 다녀와.]

[점심 맛있게 먹고. 너무 많이 먹어서 배탈 나지 말고.]

[잘 자. 좋은 꿈 꾸렴.]

이모티콘을 쏟아부어 가면서 정성 들여 메시지를 보내기를 여러 번. 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메시지가 읽혔다는 표시가 나고 차단당하지 않았다는 데에 희망을 품은 것도 잠시뿐.

읽고도 답장이 없는 그 무심함에 기가 쏙 빨려버렸다.

“어휴.”

아들의 질투가 이렇게나 무섭다니.

육아 책의 내용에 따르면, 남자아이의 아버지에 대한 질투는 성장기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때문에 그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예민하게 굴지 말아야 한다고. 아이와 놀아주거나 같이 시간을 보내면 마음이 풀릴 거라고 책에서는 말했다.

같이 살지 않으니 놀아주거나 시간을 보내기는 어려워 메시지로 대화라도 시도를 해 봤는데.

이렇듯 연달아 무시를 당하니 당연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가끔은 괘씸하기도 했지만, 그 뒤를 따라오는 자괴감에 태준은 괴로워했다.

누굴 탓하랴.

‘진작 못 알아본 내 탓이지, 뭐.’

첫눈에 알아보고, 그래서 아이가 마음을 연 그 시점에 ‘내가 네 아빠야.’라고 밝혔다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후회는 자꾸만 가슴을 갑갑하게 만들었다.

에휴.

오늘도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이 입 밖으로 새어나갔다. 한숨 소리가 들렸는지 파티션 너머로 형주가 고개를 쏙 내밀며 물었다.

“요새 무슨 일 있어, 신 주임? 무슨 한숨을 하루에 백번은 쉬는 것 같네.”

“그냥 피곤해서요.”

“얼굴도 퀭하고 푸석한데.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네. 마음이 아픕니다. 마음이. 아들한테 외면당한 마음이 너무 휑하고 시리네요.

하지만 태준은 속내와는 다르게 싱긋 웃어 보일 뿐이다.

“아닙니다. 그냥 진짜 피곤해서 그래요. 카페인 충전하면 금방 나아질걸요.”

말 나온 김에 태준은 빈 텀블러를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깐 커피 타러 휴게실 좀 다녀올게요.”

“어, 그래. 다녀와.”

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그런데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익숙한 뒷모습. 선혜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선혜는 평소와 다름없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넸다. 태준도 눈인사를 건넨 다음 선혜가 서 있는 정수기 옆에 섰다.

“선혜 씨도 커피 마시러 온 거예요?”

“아뇨. 그냥 물 좀 마시려고요.”

태준이 눈을 들어 선혜를 향해 싱긋이 웃어 보이고는 커피 스틱을 뜯기 시작했다.

선혜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태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요즘 들어 상당히 피곤해 보인다. 눈 밑도 퀭하고 푸석하고. 가끔은 울적해 보이기도 하고.

때마침 휴게실에는 둘 뿐이라 선혜가 물었다.

“요새 무슨 일 있어요?”

커피 스틱을 뜯어 텀블러에 붓던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피곤해 보이길래.”

태준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매만졌다.

“제가 그래요?”

“네. 좀.”

아니. 사실은 많이. 그래서 요 며칠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그냥 잠도 못 자고 그래요.”

“요새 기획부도 한가하지 않아요?”

대형 플랫폼의 공모전 기간이라 출판사에 투고되는 소설의 양이 현저히 줄어 한가한 시즌이라고 들은 바 있었다. 덕분에 회사가 전체적으로 긴장이 풀린 분위기였다.

“수호 때문에 그래요?”

선혜가 불쑥 던진 질문에 물을 따르려던 태준의 손이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그래 보여서요.”

태준이 쓰게 웃었다.

“사실, 요새 수호한테 계속 메시지 보내고 있거든요.”

“메시지요?”

“네. 별건 아니고. 그냥 유치원 잘 다녀와라. 밥 맛있게 먹어라. 잘 자라. 이런 인사 정도?”

태준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데 애가 읽고 답장을 안 하더라고요.”

“수호가요?”

“네.”

선혜는 할 말을 잃은 얼굴로 태준을 보다가 무안한 얼굴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제가 수호한테 말을 좀 해 볼까요?”

태준이 살래살래 손을 흔들었다.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까진. 제가 알아서 할게요.”

태준의 말에 선혜가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물을 다 따른 뒤에도 선혜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텀블러에 물을 담는 태준을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다. 그 시선을 뒤늦게 느낀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수호 의외로 단순해서 금방 풀어질 거예요.”

태준이 말없이 바라보기만 해서 선혜는 덧붙여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괜찮아질 테니까.”

뱉어놓고 나서야 격려 치고 건조하기 짝이 없다 싶었다. 아이를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고마워서 그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는데.

빤히 와닿는 태준의 시선은 민망함을 배로 불러일으켰다.

이럴 때는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

“저 먼저 갈게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고 몸을 돌리는 때였다.

“선혜 씨.”

태준이 선혜를 불렀다. 멈춰 선 선혜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 해줘서.”

태준이 웃었다. 애써 짓던 웃음과는 달리 한층 환하고 편안한 얼굴로.

연한 갈색 눈동자를 품은 눈매가 휘어지고 보조개가 패며 음영이 더욱 선명해졌다.

어쩐지 오래 바라보고 있기가 힘든 광경이었다. 왠지 모르게 심장 한쪽이 꽉 조여드는 것 같아서.

선혜는 태준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빠르게 문을 열고 휴게실을 나갔다.

한편 태준은 마케팅부 사무실을 지나가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선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러운 걸음 끝에 시선을 떼어내고 기획부 사무실로 들어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피식. 커피 한 잔을 마시는데 문득 웃음이 샜다.

서툰 격려를 건네고 붉어졌던 선혜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하긴 했지만 붉어진 얼굴 색마저 숨길 수는 없더라.

그저 자신과 대화를 하다 얼굴을 붉혔을 뿐인데.

그 모습이 가히 사랑스러워 자꾸만 곱씹으며 웃게 된다.

은근히, 표정 관리 안 된다니까.

“뭐 좋은 일 있었어?”

태준이 자꾸 피식피식 웃자 옆에 있는 형주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아뇨. 커피가 유난히 맛있어서.”

“그거 부장님은 더럽게 쓰다고 욕하시던데.”

태준은 그 말에 그저 웃었다.

커피도 커피지만, 무더운 여름, 소란스럽게 우는 매미 소리조차 소음으로 들리지 않았다.

쾌청한 하늘을 창문 너머로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내일은 토요일.

당신과 점심 약속을 잡은 날이라는 것을.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처음 하는 데이트였다.

*

자리로 돌아온 선혜에게 민영이 물었다.

“휴게실 에어컨 안 나와?”

“아뇨? 왜요?”

선혜가 묻자 민영이 선혜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자기 얼굴이 엄청 빨개서.”

“네?”

선혜는 한 손으로 뺨을 감싸다가 서둘러 탁상 거울을 쳐다보았다.

손바닥만 한 거울에 양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어이가 없어 입이 반쯤 벌어지는 표정이 제법 우스꽝스러웠다. 선혜는 손으로 거울을 밀치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민영을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좀 움직였다고 더운가 봐요.”

민영은 미심쩍은 듯싶었지만 별말 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올해 여름 더위가 유난스럽긴 해.”

선혜는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러게요.”

유난스럽네요. 진짜.

날씨에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한마디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선혜였다.

*

춘희는 손에 들린 경품용 부채를 파닥거리며 후후 심호흡을 했다.

날씨가 덥다 못해 푹푹 쪘다.

곧 장마라던데 절절 끓다가 한번에 확 쏟아질 모양이었다.

“더워 죽겠는데 뭔 국밥들을 그렇게 찾는지.”

이 더운 날씨에도 국밥집을 찾는 손님들이 대단하기만 하다. 점심에 손님이 어찌나 많았으면 재료가 똑 떨어져 중간에 장을 보러 다 나왔겠는가.

여름날의 오후. 쨍한 햇빛이 사정없이 내리쬈다. 춘희가 껌을 짝짝 씹으며 태양을 노려보았다.

“날씨가 아주 그냥 죽여주네! 죽여 줘.”

혼잣말을 중얼대던 춘희는 가게 건너편 신호등에 자리를 잡고 섰다.

큰 도로변에 위풍 당당히 자리 잡은 경애의 국밥집이 보인다.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 경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사장님은 너-무 성실하다니까.”

그러니까 저렇게 성공했지.

꼭 자기 엄마가 성공한 것처럼 자랑스럽게 웃던 춘희가 누군가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가게에서 멀지 않은 모퉁이를 보는 그녀의 목이 자라처럼 앞으로 쑥 늘어나고 눈이 가늘어졌다. 고개를 뒤로 뺀 춘희가 혼잣말을 중얼댔다.

“뭐야. 저 아저씨 또 왔네?”

모퉁이를 짚고 선 남루한 차림새의 남자. 며칠 전부터 가게 근처를 배회하던 그 남자였다.

춘희가 관찰한바, 몇 시간을 저렇게 서서 보다가 어느 순간 보면 사라졌던 그였다. 수상쩍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잡으려고 몇 번 시도했는데 늘 허탕이었었다. 그런데 이런 횡재가 다 있나. 먹잇감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춘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껄렁거리는 발걸음이 신호를 건너 살금살금 남자를 향해 간다.

어찌나 집중해서 쳐다보는지 남자는 춘희가 자기 바로 뒤에 서도 눈치채지 못했다.

춘희가 손을 뻗어 남자의 어깨를 두 번 툭툭 치자 그제야 기척을 느끼고 화들짝 놀라 돌아보는 남자다.

“아저씨. 또 우리 가게 훔쳐보고 계시네요?”

남자는 도둑이 제 발 저린 표정이었다. 춘희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는 눈치였다.

“왜요. 뭐, 기회 봐서 뭐라도 훔쳐 갈라고?”

“무슨 소리 하는 겁니까, 지금?”

춘희의 말에 꽤 억울했는지 남자가 항변했다. 소심하게 목소리는 죽인 채였다. 누가 볼까 신경 쓰는 모양새가 심히 수상했다.

“그게 아니면 뭔데요?”

남자는 대답을 하는 대신 자리를 피하려는지 몸을 틀었다. 그마저도 춘희가 뒷덜미를 덥석 잡아서 무용지물이 되긴 했지만.

“지금 대체……!”

“그게 아니면. 우리 사장님 훔쳐보셨나?”

예리한 질문에 정곡이라도 찔렸는지 남자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옳거니. 빙고.

감 잡은 춘희의 눈이 반짝였다.

“우리 사장님 짝사랑이라도 하는가 봐요?”

“이것 좀 놓고……!”

“어머 맞나보다. 아저씨 얼굴이 빨가네?”

춘희가 대놓고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 놀렸다. 남자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춘희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근데 아저씨 되게 훈남이다.”

차림새가 남루하고 꾀죄죄하긴 했지만, 얼굴이 꽤 봐줄 만했다. 키도 훤칠하니 컸고 호리호리하니, 젊었을 때 여자깨나 울렸을 법한 외모였다.

그런데 그 얼굴이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이상하다. 얼굴 제대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인데? 왜 익숙한 느낌이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빤히 쳐다보는 때였다.

남자가 거칠게 팔을 휘두르며 제 목덜미를 잡은 춘희의 손을 쳐냈다. 방심하고 있던 춘희는 그 서슬에 손을 뗐다.

제법 매섭게 춘희를 노려본 남자가 이내 성큼성큼 멀어졌다.

춘희는 붉어진 제 손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뭐야, 저 아저씨.”

이제 들켰으니 안 오려나 싶었지만, 춘희의 육감이 말하고 있었다.

분명 또 올 것이라고.

그땐 놓치지 말고 잡아다가 추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사장님한테 갖다 바치든지.

술래잡기는 오랜만이네? 재밌겠다.

키득거리는 춘희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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