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35화 (35/109)

#35. 내 아들

수호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손에는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태준에게 보낸 메시지의 답장을 기다리는 중인데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없었다.

수호는 시무룩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옆으로 고개를 돌린 수호의 눈에 쇼핑백이 들어왔다.

유명 수영복 브랜드 마크가 선명한 쇼핑백 안에는 오늘 할머니가 사 준 수영복이 들어 있었다. 검은색 바탕에 마크만 간결하게 새겨진 수영복. 어린아이치고 취향이 어른스럽다며 직원은 껄껄 웃었었다.

수호가 그런 디자인의 수영복을 고른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태준이 입은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보자마자 태준이 생각났고 그래서 골랐었다.

처음에는 그저 엄마를 좋아하여 저에게 귀찮게 구는 아저씨였다.

그런데 그가 좋냐는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가며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고, 또 아빠면 어떻겠냐는 할머니의 말에도 부정 아닌 긍정의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 정도로 좋아졌다, 그 아저씨가.

그래서 연락 없이 모습을 내비치지 않은 그에게 꽤 많이 서운했다.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걱정되기도 했고.

하지만 먼저 연락하기가 어쩐지 멋쩍어 머뭇거리기를 여러 번. 그러다 용기 내어 겨우 연락했건만.

“…….”

수호는 턱을 무릎 사이에 기댄 채 조그마한 발 앞에 있는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여린 한숨이 입술 새로 샌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수호가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드는 때였다.

띠링-. 드디어 답장이 왔다. 수호는 얼굴 앞으로 핸드폰을 바짝 들이밀어 태준의 답장을 확인했다.

[미안.]

기다린 게 허무할 정도로 짧은 답변에 어쩐지 맥이 빠지는데 메시지가 더 왔다.

[아저씨가 좀 다쳐서.]

다쳤다고? 수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수호는 핸드폰 타자 위로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제껏 이렇게 급한 마음으로 메시지를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오타가 남발하였고 때문에 그걸 지우고 다시 쓰느라 답장이 조금 늦어졌다.

[어디가 아픈데요?]

[뜨거운 물에 손을 데어서.]

이번 답장은 곧바로 왔다.

뜨거운 물에 손이 데다니. 수호는 그 말에 제가 아픈 표정을 지었다.

지금보다 더 어릴 적, 뜨거운 냄비에 살짝 손끝이 닿았을 때 느꼈던 고통이 떠올랐다. 데인 상처에는 물이 닿으면 안 된다고 하여 수영장 출입을 얼마간 하지 못했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수호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럼 수영장 못 오겠네요?]

태준은 그 메시지를 보며 응, 이라고 적어 보내려다가 멈칫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메시지를 지우고 다시 썼다.

[아니. 내일 갈 거야.]

선혜의 말을 못 믿는 것은 아니나 제 두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어떻게 확인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만나면 답이 나올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정말이냐고 되묻는 수호에게 그렇다고 답장한 뒤 내일 보자 인사하며 메시지를 마무리 지었다.

태준은 협탁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았다 뜨는 그의 다갈색 눈동자 안에는 깊은 혼란과 번민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

다음 날.

수영장에 도착한 태준은 한 편에 마련되어 있는 선베드에 앉아 수호가 수영 강습을 받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전과 다른 디자인의 수영복을 입고 있음에도 그의 눈은 아이들 사이에 있는 수호를 금방 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손을 살짝 흔들어 보이고 수업에 집중하는 수호를, 태준은 멀리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저와 닮은 면모를 찾기 위하여.

하지만 수모를 쓰고 수경을 써서 그런지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준은 더욱 집요하게 수호의 외모를 살피며 턱을 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아픈 손이라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손을 바꾸려고 막 턱 괸 손을 풀려는 찰나였다. 비어 있던 옆 선베드에 누가 앉더니만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손이 왜 이래요?”

처음 보는 여자의 서슴없는 접촉에 태준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태준을 올려다보는 여자가 수줍은 듯 웃어 보였다.

태준은 처음 보았을지 몰라도 여자는 이 수영장의 회원이었다. 자신의 외모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는 사람인지라, 얼마 전부터 태준에게 말 걸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차였다.

태준이 얼굴을 찡그리든 말든 여자는 못 본 척 태준의 손을 이리저리 살폈다.

“많이 다쳤나 보네요? 붕대를 이렇게 둘둘 말…….”

말을 쏟아내던 여자는 태준이 다른 손으로 저를 밀어내자 말을 멈췄다. 슬쩍 태준의 표정을 살핀 여자는 헛기침하다가 은근한 눈으로 물었다.

“근데 그 손을 하고 수영을 하러 나오신 거예요?”

태준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데 혼자 열심히 말을 건다.

“수영 엄청 좋아하시나 보다.”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곤 했다.

한 번 말을 걸어보고 반응이 없으면 꺾인 자존심에 얼굴을 붉히며 몸을 돌리는 여자와, 자존심이건 뭐건 상관없이 끝까지 달라붙고 보는 여자.

“화상 입으신 건가?”

이 여자는 아무래도 후자 같았다. 그런 부류를 대하는 방법은 딱 하나.

태준은 말없이 일어났다. 여자가 출입할 수 없는 탈의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여자가 대범하게 앞을 막아섰다.

“돌아가시는 거면 저랑 밥 한 끼 하지 않을래요? 제가 살게요.”

“아뇨. 선약이 있어서.”

다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지만 그것도 역시 막혔다.

“그럼 다음에라도…….”

이리저리 발걸음을 돌리지만 마찬가지.

끈질기게 들러붙는 여자에게 태준은 제 속내를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귀찮음과 짜증이 다분히 서린 얼굴을 본 여자는 움츠리기는커녕 도리어 그 얼굴에 매력을 느꼈는지 황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태준은 잠시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여자를 보다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조금 더 요령 있게 피해야 할 성싶었다. 태준은 오른쪽으로 발을 슬쩍 옮기다가 여자가 오른쪽으로 몸을 트는 것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순발력을 발휘하여 왼쪽으로 몸을 홱 틀었다.

이 정도면 당연히 못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운동을 괜히 한 게 아닌지 다시금 앞을 가로막는 여자였다. 그것도 난감한데 몸을 틀자마자 걸음을 옮기던 태준과 여자의 몸이 부딪혔다.

타일 바닥이 물에 젖어 미끄러운 탓에 여자의 몸이 휘청했다. 태준은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여자의 어깨를 붙들어 부축해주었다.

아차 싶어 얼른 손을 떼어내려는 때였다. 여자의 손이 제 어깨를 감싼 태준의 손을 감쌌다.

“지금 저 구해주신 거예요? 감사해라.”

“아니, 이것 좀 놓고…….”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였다. 멀리 있던 수호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친 것은.

“……!”

태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굳어지고 이쪽을 보고 있던 수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간다는 생각이 드는데 수호가 화난 얼굴로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탈의실을 향해 성큼성큼 멀어진다. 태준은 눈을 크게 뜨고 손에 힘을 주었다.

“엄마야!”

여자의 손을 홱 뿌리친 태준은 수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수호야!”

태준이 부르지만, 수호는 빠르게 멀어질 뿐이다.

“윤수호!”

태준이 재차 수호를 부르는 그때였다.

수호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배신감 가득한 그 얼굴에 망연해져 빨라지던 발걸음이 우뚝 멈추는데, 다시 몸을 돌린 수호가 이번에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수영장에서 뛰는 것은 금물.

아니나 다를까. 멀리서 안전 요원이 호루라기를 휙휙 불며 소리쳤다.

“거기 어린이! 그러다 넘어져요!”

하지만 안전 요원의 호통에도 수호는 뛰었다. 태준의 눈에도 물기 가득한 곳을 뛰어가는 수호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다.

저렇게 뛰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태준은 더욱 박차를 가해 뛰다시피 걸어갔다.

어린아이가 뛰어 봤자 태준의 긴 다리로 빠르게 걷는 것을 따돌리지는 못했다.

어느새 바짝 쫓아온 태준의 기척을 느끼고 돌아본 수호가 다리에 더욱 힘을 주어 바닥을 박차는 그때였다.

“……!”

수호의 발이 물웅덩이를 밟아 미끄러지더니 작은 몸이 휘청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몸이 기울어지는 쪽이 사다리가 있는 방향이었다.

머리가 부딪칠 만한 위치였다.

“수호야!”

태준은 눈을 부릅뜨며 달려가 손을 뻗었다. 어깨를 잡으려 했으나 간발의 차로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하겠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건 넘어지는 수호도 마찬가지였다. 코앞으로 다가오는 사다리의 손잡이를 보며 수호 또한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태준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호의 수영복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울려 퍼지며 짤막한 메아리가 동반되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수호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머리가 부딪치고도 남을 시간인데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호는 눈을 슬그머니 떴다.

그러다 코앞에 드리워진 사다리 기둥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조금만 더 기울어졌어도 머리를 심하게 다쳤을 판이었다.

살았다. 안도한 얼굴로 떨리는 숨결을 내뱉던 수호는 뒤늦게 배가 당기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수영복 밴드가 배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엉덩이가 휑했다.

몽고반점이 있는 그곳이.

수호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홱 돌렸다.

“……!”

아니나 다를까. 수영복 고무줄이 늘어나며 엉덩이가 휑하니 드러나 있었다.

수호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지 않기를 바랐건만, 그 바람이 무색하게 모두의 시선이 이쪽에 쏠려 있었다. 수호는 창피함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원망스레 제 수영복 춤을 붙들고 있는 태준을 쳐다보았다.

“…….”

태준은 멍한 얼굴로 수영복 너머 드러난 수호의 엉덩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몽고반점이 있는 곳이었다.

“놔요!”

수호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에 태준이 서서히 시선을 들어 수호를 보았다.

“이거 놓으라고요!”

버둥거리는 수호가 넘어질까 싶었는지 태준이 손을 뻗어 수호의 어깨를 잡아 바로 세웠다.

잔뜩 화가 난 수호가 씨근덕거리며 손을 뿌리치려고 손을 휘두르려다가 붕대 감긴 손을 보고 멈칫했다.

그러는 사이 태준이 한쪽 무릎을 꿇어앉아 수호와 눈을 맞추더니만, 손을 뻗어 수모와 수경을 동시에 벗겨냈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수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수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다 물었다.

“……뭐 하세요?”

태준의 시선이 위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까만 머리칼, 하얀 피부. 독특하게 꺾인 눈썹과 유난히 색이 옅은 갈색 눈동자.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 그리고 이전에 본 적 있는 왼뺨의 보조개.

그리고. 무엇보다 방금 보았던 왼쪽 엉덩이의 몽고반점.

이소성 몽고반점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집안 내력이었다. 엉덩이에 난 이소성 몽고반점은 자연 치유되는 경우가 많은데, 희한하게 태준의 집안 내력인 이 몽고반점은 엉덩이에 있음에도 사라지지를 않았다.

아버지인 현철도, 형인 태석도, 누나인 태연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있는 그 몽고반점이, 수호에게도 있었다.

다갈색 눈동자가 한차례 크게 흔들리고 그의 입가에 허탈하다는 미소가 걸렸다.

계속 이어지는 태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쭈뼛거리고 있던 수호는 그의 손에 들린 자신의 물건들을 보았다. 그걸 가져가려고 손을 뻗는 때였다.

태준이 손을 뻗는가 싶더니 수호를 품에 와락 끌어안은 것은.

“……!”

갑작스러운 태준의 행동에 수호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놀라 버둥거리는데 제 작은 어깨를 감싸 안은 손의 떨림이 느껴졌다.

태준의 커다란 손이 수호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한 번, 두 번. 그러다 힘주어 당기는 바람에 그의 품에 더욱 바싹 안겼다.

수호는 커다랗게 뜨여진 눈을 깜박이며 태준의 뒤통수만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아이의 맑은 눈동자가 살며시 떨려왔다.

늘 엄마의 부드러운 품에 안겼기에 단단한 아저씨의 품은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싫진 않았다.

오히려 아저씨의 품이 너무 따듯해서, 머릿속이 그저 멍해진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태준이 수호를 천천히 품에서 떼어냈다. 마주한 아저씨의 얼굴이 어쩐지 울 것 같은 얼굴이라고, 수호는 생각했다.

“오늘은 엄마가 데리러 오시는 거, 맞지.”

별말이 없었으니 그럴 것이었다. 수호가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태준은 수호의 손에 수모와 수경을 들려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탈의실을 향해 걸어갔다.

아니, 뛰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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