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33화 (33/109)
  • #33. 고백

    대치한 두 남자 사이로 숨도 못 쉴 만큼 긴장 서린 침묵이 맴돌았다.

    “……이 새끼?”

    침묵을 깬 건 태준의 서늘한 중얼거림이었다.

    느닷없는 태준의 등장에 재민은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가다듬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뭐야, 당신?”

    “그러는 그쪽은 뭔데 이 사람 손을 덥석덥석 잡고 난립니까? 그리고 이 새끼? 나 알아요?”

    태준이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에 재민은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나,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어른이 새끼라고 할 수도 있지!”

    그래도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지지 않으려 목소리만 높여댔다.

    제 잘못은 인정 않고 나이를 앞세우며 소리치는 모습이 영락없는 꼰대다.

    태준이 우습다는 듯 짧게 실소했다.

    이건 뭐. 대꾸하고 싶어도 똑같이 수준 떨어지는 느낌에 대꾸할 가치도 못 느끼겠다.

    처음엔 뭔가 싶었지만 이젠 궁금하지도 않았다.

    쓸데없이 예뻐서 주목받는 이 여자한테 꼬이는 날파리에 불과하겠거니. 태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큼큼 헛기침을 하던 재민의 시선이 문득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선혜에게 닿자 태준은 선혜를 더욱 바짝 자신의 등 뒤로 붙였다. 선혜는 얌전히 그의 손에 딸려와 주었다.

    갑자기 손을 잡은 건 미안하지만 나중에 변명하자. 일단 눈앞의 이 남자부터 치워야 할 때였다.

    아니다. 치울 수고까지 할 필요가 있나.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가죠.”

    태준의 말에 선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혜도 이 자리를 빨리 피하고 싶은 건 매한가지였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있나. 하필이면 여기서 만날 게 뭔지. 태준의 단단한 어깨너머로 힐끔 보이는 재민의 머리 꼭지를 흘긋거린 선혜는 태준을 따라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재민이 기막히다는 듯이 헛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시하고 조금씩 발걸음을 옮겨가는 때였다.

    씨근덕거리던 재민이 빽 소리친 것은.

    “내가 누구냐고? 그 여자 전 약혼자다!”

    재민이 소리친 말에 두 사람 다 동시에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선혜의 얼굴은 굳었고 뜻밖의 소리에 태준이 미간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렸다.

    그가 천천히 재민을 돌아보았다.

    “약혼자?”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재민이 태준의 얼굴을 보며 승리자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태준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자 재민이 픽 조소를 짧게 머금더니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이 여자 약혼했었던 것도 몰랐나 봐? 아, 애 엄마인 건 아나?”

    태준은 재민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남자랑 약혼을 했었다고?

    설마, 수호 아빠……는 아닌 것 같고. 잠깐 든 생각은 재민의 생김새를 확인하자 물 녹듯 사라졌다.

    아는 사이긴 한 건가?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은 선혜를 보며 태준이 미간을 좁히는 때였다.

    재민이 거만한 얼굴로 태준을 짧게 훑어보았다. 생긴 거로 보아하니 새파란 애송이다. 애 아빠는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선혜가 새로 사귄 애인인 모양이라고, 재민은 생각했다.

    “이봐. 아직 어려서 사람 보는 눈이 좀 많이 부족한 것 같은데 내가 충고 하나 해 줄게.”

    재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허리를 숙이며 잘난 척 으스댔다.

    “여자 얼굴 반반한 거에 홀려서 인생 망치지 마, 응? 저 여자 때문에 인생 망친 내가 선배로서 해 주는 얘기니까 새겨들어.”

    그리고는 선심 쓰듯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태준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그가 재민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재민은 허공에 들린 제 손을 잠시 망연히 보았지만 곧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고개를 숙인 선혜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조롱했다.

    “하여간 능력 좋아? 애 엄마가 주말에 애나 볼 것이지. 무책임하게 애인이나 옆에 끼고 놀러나 다니…….”

    피식. 불현듯 새어 나온 웃음소리에 재민의 말허리가 잘렸다.

    선혜가 느리게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상황에 맞지 않게 재민이 얼이 나가 있는 때였다.

    “애인.”

    짧게 중얼거린 선혜가 고개를 들어 재민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애인 아닌데.”

    그 말에 태준이 선혜를 휙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선혜가 손을 움직이더니 태준의 손을 꽉 맞잡은 것은.

    손바닥이 맞닿고 손가락이 틈 없이 얽힌다.

    태준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깍지 껴 잡은 손을 내려다보는데 선혜가 재민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누구냐고 했죠.”

    선혜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우리 애 아빠야.”

    이번에 얼굴에 경악이 서리는 건 재민이다.

    반면 그 모습을 눈에 똑바로 담는 선혜의 얼굴에는 통쾌함이 번져갔다.

    “우리 애, 아빠라고.”

    그 말에 태준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우리 애, 아빠라고.”

    선혜의 말에 태준과 재민 둘 다 멍해졌다.

    선혜는 그 사이에서 너무나 예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재민의 얼굴 근육이 경련하며 파르르 떨렸다. 선혜는 여유로운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말이 안 되긴 뭐가 말이 안 돼요.”

    말을 마친 선혜가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바보 같은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저를 보는 태준에게 생긋 웃으며 말하기를.

    “그쵸, 여보?”

    여보라니.

    머릿속에서 교회의 종이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비둘기도 날아다니는 것 같고.

    그런데 그 순간 손을 꽉 쥐는 선혜의 힘이 느껴졌다. 웃음기가 살짝 사라진 선혜의 눈동자도.

    퍼뜩 정신을 차린 태준은 뒤늦게 선혜의 눈짓에 응하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재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조롱과 비아냥을 일삼던 여유가 완전히 사라진 처참한 얼굴이었다.

    재민이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사이,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온 선혜가 재민을 보았다.

    태준을 바라볼 때 웃던 얼굴과는 차원이 다른 차가운 모습에 재민의 속에서 자존심이 쩍 하니 갈라졌다.

    “가요.”

    선혜는 그렇게 말하고는 태준을 끌었다. 태준은 선혜의 손에 붙들려 그녀의 뒤를 얌전히 따랐다.

    태준의 눈이 앞을 바라보는 선혜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선혜가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자 황급히 시선을 트는 태준의 귓가가 발긋했다. 선혜가 저를 빤히 쳐다보자 태준이 더듬더듬 물었다.

    “저기, 우리 이거, 손…….”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이 미친년이!”

    느닷없이 달려온 재민이 선혜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선혜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걸 본 태준의 눈에 섬광이 번뜩이고 재민이 손찌검을 위해 손을 들어 올린 그 찰나.

    퍽!

    태준의 주먹이 재민의 얼굴을 제대로 강타했다. 평소에 운동으로 다져진 태준의 주먹은 꽤나 단단했고 재민은 그대로 나가떨어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터진 입술을 매만지던 재민이 화를 참지 못하고 씨근덕거렸다.

    “너 이 새끼……!”

    하지만 재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멱살을 틀어 쥐고 끌어 올리는 태준으로 인하여.

    태준이 재민을 향해 주먹을 한 번 더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복도 끝 모퉁이에서 다수의 인기척이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돌잔치가 끝났는지 돌잔치 손님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모퉁이를 돌아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눈앞의 광경을 보고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런 자신의 친구들을 본 재민의 눈이 번뜩였다.

    재민이 아이 아빠를 향해 소리쳤다.

    “야! 나 소송 좀 걸게 도와줘! 이 미친 새끼가 사람 팼다고!”

    재민의 친구들이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다 애 아빠 눈치를 보았다.

    변호사인 아이 아빠는 건조한 눈으로 상황을 훑었다. 그러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는 선혜를 보았다.

    재민의 손에 한데 뭉쳐 있는 선혜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카락 뭉치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만했다.

    애 아빠는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재민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재민의 옆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예상치 못한 친구의 행동에 당황해하던 재민이 친구의 뒷모습을 휙 돌아보며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너 어디가!”

    애 아빠는 비스듬히 돌았다. 그리고 품에 안긴 자신의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 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

    알았지?

    아이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인 재민의 친구는 성큼성큼 멀어졌다. 잠시나마 재민에게 닿았던 시선은 냉소적이기 짝이 없었다.

    다른 친구들의 반응도 같았다. 다들 재민을 도와주기는커녕 스쳐 지나간다. 대놓고 혀를 차는 이도 있었다.

    재민이 기가 막힌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야, 이 나쁜 새끼들아! 야!”

    소리 소리를 지르는 재민이 시끄러운지 눈살을 찌푸리던 태준은 질렸다는 얼굴로 재민을 놓아주었다.

    친구들의 외면에 씩씩거리던 재민이 태준을 노려보자 속상한 얼굴로 선혜의 모습을 보던 태준이 재민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정당방위에 소송은 무슨.”

    태준의 다정한 손길이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내린다.

    괜찮냐고 묻는 태준과 선선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선혜의 모습을 담는 재민의 눈이 공허했다.

    곧 나란히 멀어지는 두 사람.

    재민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헛웃음을 쳤다.

    복도에 홀로 남은 그에게 손을 뻗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몇백 년을 족히 묵은 느티나무가 드리우는 그늘은 넓고 시원했다. 나무를 둘러싸고 원형으로 만든 나무 벤치. 그 곳에 태준과 선혜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선혜의 옆에 새 붕대와 거즈, 소독약과 화상용 연고가 어지러이 널려있다. 태준은 선혜에게 자신의 손을 맡기고 있었다.

    아까 재민을 때리다가 붕대의 매듭이 풀어지는 바람에 근처 약국을 수소문하게 되었다.

    휴일에도 문을 여는 작은 약국 하나를 찾았으나. 약국 안에 앉을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그래서 약국 앞 공원에 있는 이곳에 오게 되었다.

    선혜는 조심스럽게 태준의 손에 감긴 붕대를 풀어냈다. 그러자 진물에 젖은 거즈가 눈에 들어온다. 선혜는 미간을 찌푸리고 혀를 짧게 찼다.

    소독을 마치고 붕대를 다시 감는 손길이 정성스러웠다. 선혜에게 손을 맡기고 있던 태준이 선혜를 바라보았다.

    붕대 감기에 여념이 없는 그 얼굴을 보는데 문득 웃음이 샜다. 웃음소리에 선혜가 하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갑자기 왜 웃어요?”

    “그냥…….”

    태준이 솔직하게 말했다.

    “좋아서요.”

    선혜는 그런 태준을 보다가 슬쩍 시선을 내리고 귀 뒤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주먹질을 해서 이 지경이 되어 놓고 좋긴 뭐가 좋아요.”

    그 말에 태준이 소년처럼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귓가가 발긋하다. 예나 지금이나 쑥스럽거나 부끄러우면 귀부터 빨개지는 그다. 그 모습을 보던 선혜가 조용히 미소 짓는데 태준이 문득 물었다.

    “근데 아까 그 남자 대체 뭡니까?”

    “아까 들었잖아요. 전 약혼자라고.”

    알면서 뭘 묻냐는 듯 선혜가 심상하게 대꾸하자 태준이 입을 다물었다.

    선혜를 빤히 쳐다보는 다갈색 눈동자가 정말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 표정을 눈에 담던 선혜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약혼했었다는 말에 실망이라도 했어요?”

    “……왜 그런 자식이랑 약혼한 거예요?”

    태준이 화가 난 얼굴로 물었다. 잠깐 마주했었지만 재민이 어떤 사람인지 알만했으므로.

    선혜는 붕대를 감아주며 말했다.

    “아버지 병원이 부도가 났는데 다시 일으켜 세우는 조건으로 그 사람이 나랑 결혼을 요구했었거든요.”

    “뭐라고요?”

    울컥한 태준이 얼굴을 굳혔다.

    “아니, 왜 그딴 조건에 응했어요? 안 한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버지가 무릎 꿇고 빌더라고요. 울면서.”

    과거를 회상하던 선혜의 눈이 낮게 깔렸다. 곧 쓰디쓴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거기에 못 이긴 거죠, 뭐.”

    태준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덤덤한 선혜의 얼굴을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파혼해서 다행이에요.”

    그런 놈한테 시집 갔으면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을 것이다. 태준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선혜가 살짝 웃었다.

    “네.”

    “근데 파혼은 어떻게 한 거예요? 저 남자 쉽게 안 놔줬을 것 같은데.”

    그 질문에 선혜가 붕대 감던 손을 멈칫했다.

    그러다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수호 덕분에요.”

    “네?”

    그 대답에 태준이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 순간 붕대가 모두 감겼다. 붕대가 꼼꼼하게 감긴 태준의 손을 여전히 잡은 채 선혜가 피식 웃었다.

    “아니다. 태준 씨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선혜의 말에 태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혼란이 서린 그 얼굴을 보며 선혜는 잠시 고민하다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인생이란 참 알 수가 없다.

    적절한 순간은 왜 이리도 갑작스럽고 무계획적으로 찾아오는가.

    카페에서 말하려고 했건만.

    타이밍은 지금이 더 적절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문득 바람이 불어왔다. 무더위를 식혀주는 바람에 나뭇잎이 부대기며 쏴아아 하는 소리가 났다.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나부끼는 긴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올린 뒤. 선혜가 태준의 눈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 수호…….”

    연습했던 게 무색하게 여전히 긴장이 되었지만.

    선혜는 말했다.

    “태준 씨 당신 아들이거든요.”

    멍한 태준의 얼굴을 보며 선혜가 다시금 말했다.

    “당신 아들.”

    그 순간 바람이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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