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악연
밥을 먹는 내내 선혜는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거렸다. 식사를 시작한 지 어느새 이십 분 남짓 흘러 있었다. 그동안 자잘한 대화를 나누긴 하였으나 수호 이야기를 할 타이밍을 좀처럼 잡지 못했다.
난감한 얼굴로 거의 다 먹어가는 뚝배기 안을 수저로 뒤적거리던 선혜는 앞을 쳐다보았다. 순간 추가 주문한 두 번째 공깃밥을 비워낸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선혜와 마찬가지로 시계를 흘끔거린 태준이 물었다.
“수영장에 수호 데리러 가야 하죠?”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는 그에게 선혜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안 그래도 돼요. 엄마한테 부탁해 놔서.”
그 말에 태준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기쁜 기색이 다갈색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일렁이며 새어 나왔다. 곧 그의 입가가 매력적으로 휘어졌다.
“그럼 시간이 더 있다는 소리네요?”
선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태준은 서슴없이 제안했다.
“밥 먹고 어디 갈까요? 카페라던가.”
“네.”
순순히 수긍하는 선혜의 모습이 다소 낯설어 눈을 깜박이는데 선혜가 쐐기 박듯 말했다.
“가요, 카페.”
말을 마친 선혜는 고개를 숙이곤 밥을 이어서 먹기 시작했다.
태준은 의외라는 얼굴로 선혜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선혜가 눈을 들어 태준을 보았다.
회사에서 보통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하거나 슬쩍 피하곤 하던 선혜였는데. 오늘따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시선이 제법 오래 머물렀다.
곧 눈을 피하며 딴짓을 하긴 했지만, 계속 보이는 그 모습이 꼭…….
“혹시 나한테 할 말 있어요?”
“콜록!”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물을 마시던 선혜는 사레가 들려버리고 말았다.
얼굴이 시뻘게져서 기침을 해대는 선혜에게 태준이 물을 따라주었다. 냉큼 받아들인 선혜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괜찮아요?”
“네.”
선혜는 물을 마시며 나오려는 잔기침을 거두어들였다.
후. 길게 숨을 내쉰 선혜가 눈을 들어 태준을 보았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간다.
지금이 기회인가.
근데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야 하지.
고민을 거듭하지만 해결책은 나오지 않아서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여갔다.
웬만해서는 할 말 다 하는 성격인데. 왜 이리 중요한 순간에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지 모르겠다.
“선혜 씨?”
도대체 무슨 할말을 하려고 저렇게 비장한 표정을 짓나 싶은데 입술을 달싹이던 선혜가 결국 눈을 내리며 시선을 피했다. 자괴감 짙은 표정이 얼굴 위로 한차례 스치고 눈꺼풀을 미약하게 떨던 선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따가 카페에서 이야기해 줄게요.”
태준은 그런 선혜를 보며 무어라 말을 하려다 고개를 끄덕이고 밥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선혜는 얼마 남지 않은 뚝배기 안을 비워내며 꼬인 머릿속을 찬찬히 풀어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런 스스로를 바보 같다 질책하면서도 선혜는 흔들리려는 마음을 수호를 생각하며 다잡았다.
선혜가 그러는 동안 호기심과 의아함 그리고 걱정이 수반된 태준의 시선이 선혜의 얼굴에 간간이 닿고 있었다.
카페에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러나.
기대와 조바심이 일어 수저 놀림이 빨라지는 태준이었다.
**
아이가 돈을 잡자 환호성과 박수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야. 돈이라니. 부모님 따라서 부자 되겠네!”
“애가 뭘 좀 안다. 그치?”
“그래. 돈이 최고다, 최고! 잘했다!”
다들 덕담 아닌 덕담을 한마디씩 던지며 제 일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재민은 후식으로 나온 과일을 비딱한 얼굴로 씹으며 돈을 쥐고 까르륵 웃는 아이와 자신의 친구인 부모를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박수를 치기는 커녕 코웃음을 치는 그의 옆구리를 친구 하나가 팔꿈치로 쿡 찌르자 마지못해 박수를 설렁설렁 치는 모습이 참 밉상이다.
모두 그런 그에게 아니꼬운 시선을 한 번씩 던졌으나 축하하는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고 있었다.
사회자가 준비한 자잘한 퀴즈와 이벤트가 모두 끝난 뒤.
손님들은 넓은 홀에 흩어진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때 이른 술잔을 한 잔씩 기울이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로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지인들이 정신없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대화 주제가 자신들이 돌 때 뭘 잡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돈, 실, 연필 등등. 물건과 연관이 있는 자신의 삶을 논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는데 다들 어느 순간 웃다 말고 재민의 눈치를 보았다.
재민은 대화에 섞일 생각이라곤 없는 건성인 얼굴로 핸드폰 게임만 해대고 있었다.
사람 좋은 얼굴을 가진 친구 하나가 재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 바람에 게임 속 캐릭터가 죽은 재민이 친구를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아, 이 새끼가 아까부터.”
“재민이 너는 돌 때 뭐 잡았냐?”
재민이 살벌한 얼굴로 욕을 하든 말든 친구가 물었다.
재민은 그런 친구의 얼굴을 쏘아보다가 짧게 대꾸했다.
“돈.”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빠르게 눈치를 주고받는 친구들의 표정 속에 난감함이 가득하다.
재민은 그런 친구들의 반응을 지켜보다 모르는 척 핸드폰 게임에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길지 않았다.
곧 그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테이블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자 테이블 위로 싸늘한 침묵이 휘돌았다.
예전에는 돌 때 돈 잡은 것다운 삶을 살았던 그였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그의 몰락은 6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선혜와 파혼한 그 순간부터.
파혼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났다. 자랑삼곤 했던 강남의 건물들을 팔아넘겨 빚은 겨우 갚았지만 예전의 부유했던 시절로 돌아갈 순 없었다.
부모님은 재민이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시 예전과 같은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기는커녕 한 방을 노린답시고 주식에 매진하다가 그나마 있던 재산까지 모두 잃게 만들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힘들게 대출로 마련한 돈으로 사업이라도 다시 해 보자고 하였으나 헛수고였다. 말도 안 되는 곳에 투자했다가 몽땅 잃고 말았으니.
분에 찬 재민은 모든 탓을 남들에게 돌리기 바빴다.
부도 낸 아버지 탓.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을 넘치게 도와주지 않은 지인들 탓.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 책망의 끝은 아이러니하게도 선혜였다.
윤선혜. 그 이름 세 글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속에서 천불이 났다.
아버지의 부도도 부도지만 더 비참한 건 그가 아직도 미혼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유인즉, 선혜를 만난 이후 괜히 눈이 높아져서는 웬만큼 예쁜 여자들은 눈에 차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점차 좁아지던 혼삿길은 집안의 몰락과 동시에 결국엔 막혀버리고 말았다. 나이 많고 능력은 없는 데다 돈까지 없는 그에게 더 이상 혼사가 들어올 리 만무했으니까.
그러다 때를 놓쳐버렸고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는 총각 신세를 면치 못했다.
재민은 자신의 불행이 다 선혜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에 대한 분노는 오늘 같은 가족 행사가 있을 때면 극에 다다르곤 했다.
자신과는 달리 또래 친구들은 결혼을 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거나, 혼자여도 버젓한 직장이나 탄탄한 재력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열등감에서 비롯된 처량함이 극에 달했을 무렵, 재민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행사 분위기에 찬물을 제대로 끼얹는 행동에 못마땅한 시선들이 우르르 다가와 꽂혔지만 재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홀을 나섰다.
모두 그런 재민을 잡지 않았다. 돌을 맞이한 애 아빠도 아이를 고쳐 안으며 고개를 돌릴 뿐.
탁. 재민이 미닫이문을 소리 나게 닫고 나가자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중얼댔다.
“한심한 새끼.”
쯧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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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민은 팔자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주머니에 있는 보풀을 지나가는 직원이 보란 듯이 복도에다 흩뿌린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당당한 모양새로 걸어갔다.
잇새로 욕설이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터트리지 못한 분노가 까만 눈 안에 들끓고 있었다.
한 번 떠오른 선혜에 대한 생각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 이후로 수소문해도 찾을 수가 없었는데. 그 길로 집을 나갔다고 했었나.
그 사실을 떠올린 그가 피식 조소를 흘려보냈다. 돈도, 갈 곳도 없는 미혼모의 말로는 뻔했다. 적어도 자기보다는 비참하게 살고 있겠지.
나중에 만나게 되면 보란 듯이 짓밟아 줘야지.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잔인하게 키득거리는 때였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이 화장실에서 막 나오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춘 것은.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윤선혜?”
부르는 목소리에 그의 앞에 서 있는 이가 발걸음을 내딛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재민은 경악이 번져가는 선혜의 얼굴을 보며 씩 미소지었다.
“윤선혜, 맞지?”
**
식사를 마친 뒤 선혜와 태준은 나란히 자리에서 일어나 룸을 나왔다.
룸을 나서자마자 선혜가 태준에게 말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들렀다 올게요.”
태준은 그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카운터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네. 계산하지 말고 기다려요.”
태준은 알았다는 뜻으로 빙긋이 웃어 보이고는 카운터로 몸을 돌려 멀어졌다.
잠시 멀어지는 태준의 뒷모습을 보던 선혜도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
일회용으로 포장된 가글로 입을 한 번 헹구고 화장을 고친 그녀는 거울을 마주 본 상태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거울 속 자신의 눈동자를 한참 보던 선혜가 입을 열었다.
“전에 니스에서…….”
말을 하다 말고 눈을 질끈 감은 선혜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눈을 뜨더니 아까보다는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태준 씨, 있잖아요, 나…….”
아냐. 이것도 아냐.
얼굴을 살포시 찡그린 그녀가 손으로 머리를 살며시 짚었다.
그저 서두만 꺼냈을 뿐인데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이래. 정신 차려.
속으로 스스로를 한 번 더 다잡은 선혜가 다시 고개를 들어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똑바로, 그리고 당당하게.
“사실.”
가늘게 떨림을 머금는 입술을 다문 선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수호.”
다시, 용기 내서 한 번 더.
“태준 씨, 당신 아들이에요.”
그 한 마디가 마음에 드는지 선혜의 얼굴이 편해졌다.
“당신 아들.”
거울 속에 비치는 선혜의 까만 눈동자가 살며시 떨려왔다.
“그러니까…….”
선혜는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기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며 나온 말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차마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선혜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녀의 귓가가 발긋하다.
마음 같아서는 세수라도 해서 얼굴로 오르는 열기를 떨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대신 손을 씻었다.
찬물로 오래도록 손을 씻은 선혜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짧게 한 번 점검하고는 화장실을 나섰다.
화장실을 나서자 입구까지 쭉 뻗은 복도가 보였다.
잠시 서서 복도 끝을 응시하던 선혜가 한 걸음을 힘주어 떼어내는 그 순간이었다.
“윤선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한 걸음도 채 내딛지 못한 채로 선혜가 굳었다.
소름 끼치게 익숙한 목소리 뒤로, 삐거덕하는 나무 널판의 소리가 고막을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고개를 든 선혜는 설마 하는 얼굴로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윤선혜, 맞지?”
순간 선혜의 얼굴에 번진 것은 경악.
그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재민이 씩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눈빛만은 흉흉했다.
“이야,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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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혜의 당부와는 다르게 태준은 카운터에 가자마자 계산을 마쳤다. 그런 그의 표정이 의기양양하기만 하다.
애초부터 얻어먹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첫 데이트인데 그래도 계산은 남자가 해야지. 카페도 자신이 계산할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할 얘기라는 게 대체 뭐지.
뭐길래 애까지 맡겨놓고 시간을 비워놨을까.
태준은 진지하게 빛나던 선혜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도통 감이 오지 않아 고개를 살짝 기울여 이리저리 짐작해 보기를 한참.
선혜가 아직도 오지 않음에 손목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화장실이 있는 복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때였다.
시력 1.5를 자랑하는 그의 눈에 복도 끝 광경이 빨리듯 들어온 것은.
낯선 남자와 마주 보고 있는 선혜.
멀리서도 선혜의 표정이 가히 좋지 않다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태준이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남자가 선혜를 향해 한걸음 성큼 다가갔다. 선혜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손목이 틀어 잡혔다.
그 모습을 본 태준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상황을 판단하기에 앞서 발걸음이 그곳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단숨에 달려간 태준이 재민의 손에 붙들려 있던 선혜의 손목을 낚아챘다. 떨리는 손을 다정하게 감싸고 선혜를 자신의 뒤로 뺀 태준이 씹어먹을 듯 재민을 노려보았다.
“뭐야, 당신?”
“뭐야, 이 새끼는?”
서로를 마주한 두 남자가 동시에 으르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