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31화 (31/109)
  • #31. 불청객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예진은 요란하게 닫히는 현관문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현관문을 거칠게 닫은 고은이 신을 벗고 쿵쾅거리며 좁은 거실을 가로질러 자신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예진이 신경질적으로 빽 소리쳤다.

    “너! 조용히 안 다닐래? 안 그래도 아파트 낡아서 소리 다 울린다고!”

    “엄마나 잘해!”

    고은이 되레 큰소리를 내며 쏘아보자 예진이 기가 막힌 얼굴로 쳐다보았다.

    고은은 예진을 흘기던 눈을 거두고는 보란 듯이 쿵쾅거리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문 또한 큰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야!”

    분에 찬 예진의 고함이 문 너머로 들려왔지만, 고은은 못 들은 척 침대 위로 엎어졌다. 이불을 꾹 움켜쥐고 씨근덕거리던 고은의 눈이 살쾡이처럼 번뜩였다.

    조금 전 마주 보았던 선혜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오래도록 겪어온 열등감 탓에 고은은 늘 선혜가 자기를 내려다본다고 생각했다.

    건방지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계집애.

    가진 거라곤 좀 예쁘장한 얼굴밖에 없는 게, 감히 사람을 그따위로 내려다봐? 지가 뭔데.

    분한 나머지 이가 빠드득 갈렸다.

    “두고 봐.”

    고은이 눈을 부라리며 이불을 뜯을 것처럼 꽉 움켜쥐었다.

    “두고 봐, 윤선혜.”

    오늘 수모는 꼭 갚아 줄 테니까.

    비열함을 담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

    다음날. 선혜는 여느 때와 같이 수호를 데려다주고 회사로 향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놓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뒤에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어제 일이 생각 나 멈칫 서서 뒤를 돌아보는데 예상과는 다른 인물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임성균 대리가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왔다. 선혜는 안도와 실망이 반반 섞인 얼굴로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임성균 대리는 자연스럽게 선혜의 곁에 다가와 동행했다.

    “날씨가 갈수록 더워지네요.”

    그는 늘 그렇듯 심상한 일상을 주제로 꺼내며 대화를 시작했다.

    자신한테 호감을 내보이기는 하나 귀찮게 구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선혜는 적당히 대꾸해 주었다.

    “그러게요.”

    어느덧 칠월에 접어들며 날씨가 여름의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아침에 차에서 들은 라디오에서는 곧 장마가 시작될 거라고도 했다.

    “저기…….”

    엘리베이터 앞에 당도하였을 무렵. 눈치를 보던 임성균이 의미심장하게 운을 틔워냈다.

    낌새를 알아차린 선혜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데 등 뒤에서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 태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더워진 날씨 탓에 반팔 와이셔츠에 노타이 차림새인 그는 다분히 자유분방해 보였다. 근육이 적당히 잡힌 팔이 짧은 소매 아래 가감 없이 드러나 있었고 피부가 하얀 만큼 푸른 핏줄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어제 일도 있고 해서 선혜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시하기에는 보는 눈도 있고 해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자 태준도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성균은 태준이 나타나자마자 입을 도로 다물었고 선혜를 향해 멋쩍게 웃어 보인 뒤 엘리베이터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어색한 침묵은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면서 금방 끝이 났다. 1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하던 직원들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 가장자리로 자연히 밀려나게 되었다. 왼쪽 모퉁이에는 선혜가, 가운데에는 임성균이, 그리고 오른쪽 모퉁이에는 태준이 있었다.

    앞에 밀착하는 사람이 여자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때였다.

    지잉. 가방 속에 있는 핸드폰이 진동한 것은.

    무심결에 꺼내든 선혜는 화면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안녕]

    발신자를 한 번 더 확인해야 했다.

    발신자는 태준.

    뭐야, 이게.

    한참을 쳐다보고 있는데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하세요.]

    뭐 하자는 거지.

    어이가 없는 얼굴로 옆을 천천히 돌아보면 뻔뻔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 태준이 있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답장을 하려다가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핸드폰을 도로 가방 안에 집어넣는데, 또 얼마 안 가 지잉- 진동이 울렸다.

    무시해도 계속되는 진동에 선혜가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날씨가 덥네]

    [요.]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요.]

    왜 아침부터 이딴 장난질이란 말인가.

    비딱한 얼굴로 옆을 돌아보자 짓궂게 웃고 있는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선혜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슬쩍 내린 태준이 다시 핸드폰을 타닥타닥 두드렸다. 이어서 선혜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오늘도 예쁘네]

    [요.]

    칭찬하는 말 뒤로 또다시 뒤늦게 덧붙여지는 존대어.

    선혜는 마지막으로 전송된 메시지를 보다가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태준이 멀리서 보이지도 않는 작은 화면을 힐끔거리는 새에 태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차단하기 전에 그만하죠?]

    선혜의 경고 서린 메시지에도 태준은 숨죽여 웃을 뿐이다.

    곧 답장이 왔다.

    [네.]

    짤막한 존댓말에 더는 할 말이 없다. 선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를 본 태준도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고.

    가운데에 있는 임성균 대리가 눈만 굴려 그런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알아챈 얼굴은 뾰로통하면서도 시무룩했다.

    *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갔다.

    시답잖은 장난을 치는 태준 때문에 어이없음도 잠시. 몰아닥치는 업무에 시달려 두 사람 다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회의에, 일에, 거기에다 업무의 연장선이라 불리는 회식까지.

    지난밤 기획부 회식에 참여한 태준은 술에 떡이 된 상태로 엎드려 자다가 알람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부스스한 얼굴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린 태준은 협탁을 더듬어 핸드폰을 가져가 시간과 날짜를 확인했다.

    토요일.

    요일을 확인한 태준의 입가에 미소 한 자락이 느른하게 걸렸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켜자 헐벗은 상체의 근육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엎드려 자느라 뻐근한 목을 한 바퀴 돌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약속 시각까지 한참이지만 그는 이른 시간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찬물로 샤워를 하며 가볍게 숙취를 몰아내고 그 어느 때보다도 외출 준비를 꼼꼼하게 했다. 옷장을 들여다보는 얼굴이 신중하기 짝이 없다.

    뭘 입나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옷장 문에 박힌 거울 속에 잘생긴 얼굴이 비친다. 태준은 새삼스레 턱을 쓸며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쓸데없이 사람들 이목을 끄는 외모라 피곤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는데, 오늘은 이 외모가 감사하기만 하다. 뭘 입어도 나쁘지 않을 테니.

    그래도 신경 써서 옷을 골랐다. 반팔 셔츠와 면바지로 가볍게 코디를 마친 태준은 침대에 걸터앉아 손에 감긴 붕대를 새 걸로 갈았다.

    젊은 나이를 증명하듯 회복은 빨랐으나 아직은 물이 닿으면 안 되는 상태였다.

    그래도 회복 속도로 미루어 볼 때 이르면 다음 주, 혹은 다다음주에는 수영장에 갈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바심이 나자 아침부터 자연히 담배가 생각났다.

    금연을 하는 데다 수영까지 못하는 상태라 금단 현상이 지독한 요즘이었다. 게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태준의 금연을 그저 씁쓸해하던 형주가 자꾸만 흡연을 권하더랬다. 어제 회식이 고비긴 했으나 거뜬히 이겨냈다.

    겨우 잡은 단둘만의 자리. 그녀가 싫어한다는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태준은 향수를 뿌려 혹시 남아 있을 담배 냄새의 잔재를 몰아냈다.

    전신 거울 앞에 선 그가 빙긋 웃었다.

    완벽해.

    오늘 데이트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집을 나섰다.

    *

    비슷한 시각.

    선혜는 수호를 데리고 수영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수호가 연신 그런 선혜를 힐끔거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 쓰지 않은 구석이 없어 보이는 모습. 평일도 아니고 주말에 이렇게 꾸민 건 처음 봐 의아하기만 하다.

    “엄마 오늘 어디 가?”

    빨간불에 차를 정차시킨 선혜가 옆을 돌아보았다.

    잠깐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선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디 가는데?”

    “맛있는 거 먹으러.”

    “맛있는 거? 나만 빼고?”

    선혜가 뾰로통한 얼굴을 한 수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 수호는 수영 끝나고 외할머니랑 더 맛있는 거 먹으러 가.”

    태준과의 이야기가 길어질까 싶어 혹시 몰라 경애에게 부탁해 두었다.

    “할머니? 할머니가 나 데리러 와?”

    “응.”

    수호는 심통이 난 얼굴로 볼을 부풀리긴 했지만 이내 씩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호를 수영장에 데려다준 뒤 선혜는 차에 올랐다. 그리고 태준이 보낸 메시지 창을 켜서 가게 이름을 내비게이션에 쳤다.

    ―경로 안내가 시작됩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음성을 들은 선혜는 기어를 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태준과의 약속 장소를 향해 선혜의 차가 빠르게 멀어졌다.

    *

    이게 무슨 삼계탕 전문점이야.

    널따란 가게 주차장에 차를 세운 선혜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커다란 규모의 가옥을 보며 기가 찬 얼굴을 해 보였다.

    태준과 만나기로 한 삼계탕 전문점은 커다란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곳이었다. 삼계탕 전문점이라고 하더니만 알고 보니 한식당 전문점이었다.

    복잡한 도심 속에서도 고즈넉한 곳. 풍기는 분위기가 범상치 않은 것이 보통 사람들은 쉬이 오가지 않는 곳인 것 같았다.

    이런 곳의 단골이라니. 선혜도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수준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생활 한복을 입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선혜는 대문을 넘어 널찍한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주요한 인물들이 오가는 곳인 만큼 가게는 홀이 아닌 여러 개의 방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전체적으로 조용한 분위기였다. 멀리서 돌잔치를 한다는 넓은 홀을 제외하면 다들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여 연신 주위를 둘러보는데 갑자기 발끝이 무언가에 걸려 몸이 휘청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긴 했으나 탁하는 소리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리는 바람에 가던 직원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괜찮으세요?”

    “네.”

    멋쩍게 웃은 선혜는 아픈 발끝을 살짝 바닥에 두드리다가 다시 직원의 뒤를 따라갔다.

    나무 널판으로 이루어진 복도를 따라 얼마나 걸어갔을까. 곧 가게의 가장 안쪽에 있는 방에 도착했다.

    창호지가 덧발린 곳의 문을 열자 고즈넉하게 꾸며진 방의 내부가 드러났다.

    고급 난초가 자라는 화병과 매끄럽게 깎인 커다란 장식용 돌이 장식의 전부였지만 허전하기는커녕 여백의 미를 뽐내며 고풍스러운 느낌을 더했다.

    태준은 그곳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턱을 괸 채로 격자 창문 너머 풍경을 응시하던 그가 선혜를 보고 빙긋이 웃고는 허리를 세웠다.

    안내를 마친 직원이 물러나고 미닫이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자리에 서 있기만 하는 선혜를 보고 태준이 말했다.

    “앉아요.”

    선혜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혹시나 마주칠 수 있는 회사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방이 있는 곳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나치게 조용한 공간에 단둘이 마주 보고 있자니 괜히 긴장되었다.

    아니, 긴장되는 이유는 오늘 하려는 말 때문일지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다짜고짜 이야기하면 많이 놀랄 텐데.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데 태준이 물었다.

    “삼계탕 먹을 거죠?”

    선혜는 그 말에 하던 고민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단 먹고 생각하자.

    생각을 마친 선혜는 자꾸만 마르는 입안을 축이기 위해 물을 머금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냉수는 섬뜩하리만치 차가웠다.

    머리가 찌르르 아플 정도로 말이다.

    *

    한편 그 무렵.

    한식당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택시 뒷좌석에는 사십 대를 넘긴 듯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택시비를 현금으로 지불하고 잔돈을 거슬러 받은 남자는 지갑을 바지 뒷주머니에 주섬주섬 넣으며 가게 앞에 섰다. 가게를 응시하는 눈동자에는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남자가 혼잣말로 중얼댔다.

    “무슨 애 돌잔치를 이런 데서 해?”

    하여간 잘난 척하기는.

    속으로 투덜대던 남자는 가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대문을 넘으려는 그를 문을 지키고 서 있던 직원이 제지했다. 남자가 불쾌감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직원을 보았다.

    직원이 남자를 향해 정중하게 물었다.

    “예약하셨나요?”

    “초대 손님입니다만.”

    미심쩍은 티를 숨기고 직원이 기계적으로 물었다.

    “혹시 돌잔치 초대손님이십니까?”

    “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양재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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