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숨길 수 없는
선혜는 손에 쿠키를 든 채로 서서 고은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눈빛만은 서늘했다. 뿜어내는 분위기 또한 흉흉했고.
그에 압도된 고은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가늘게 떨었다.
뒤늦게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고은이 입을 열었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러는 너야말로 지금 뭐 하는 거니.”
고저 없는 차분한 목소리엔 냉기가 가득했다.
고은은 애써 차분한 척 웃어 보였다.
“뭐 하는 거긴. 나 때문에 다치신 분이라 내가 보상 겸…….”
“보상?”
선혜가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허리를 끊었다. 하지만 웃는 것도 잠시뿐. 삽시간에 웃음기를 지운 선혜가 눈에 힘을 주어 고은을 쳐다보았다.
“그럼 이거 내가 먹어도 되는 거지?”
“뭐? 너 도대체 무슨 말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그 말에 고은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입술 끝이 파리하게 떨린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은이 눈을 굴려 태준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고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태준은 선혜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선혜를 담은 다갈색 눈동자가 이채를 띠고 있었다.
이윽고 가만히 입술 끝을 당겨 웃는 그의 얼굴을 망연하게 바라보던 고은은 입술을 꾹 깨물고 선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쿠키를 탁 채가더니만 몸을 돌려 씩씩거리며 멀어졌다.
고은의 손에 들린 쿠키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고은이 채가기도 전 선혜의 손아귀에서 이미 부서져 있던 터다.
선혜는 고은이 비상구 입구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그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숨을 크게 한번 몰아쉬어 보았지만 끓어오른 화는 쉽게 삭여지지 않았다. 선혜는 시선을 비스듬히 내린 채 홀로 내면의 폭풍을 갈무리 짓고 있었다.
어느 정도 들끓던 속이 가라앉았을 무렵.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선혜는 옆에서 줄곧 쳐다보고 있던 태준과 눈이 정통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선혜의 눈동자가 당황의 빛을 머금고 흔들렸다. 곧바로 태준의 시선을 피해 눈을 돌린 선혜는 이내 몸을 홱 돌리고 또각또각 멀어졌다.
뒤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리자 선혜는 채찍이라도 맞은 것처럼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그런 선혜의 뒤로는 태준의 느긋한 발걸음이 따르고 있었다.
태준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눈치챈 선혜가 뒤를 힐끔 보더니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뛰듯이 멀어지는 그녀의 뒤를 웃으며 쳐다보고 있던 태준이 이내 느긋함을 던지고 넓고 빠른 보폭으로 쫓아오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벌어진 추격전.
저를 향해 달려오는 태준을 한번 돌아보더니만 이젠 거의 뛰다시피 걸어가는 선혜다.
운전석 문 앞에 당도하여 손잡이를 잡아 뒤로 당기는데 열리던 차 문이 도로 닫혀버리고 말았다. 옆에는 태준이 서 있었고 앞에 보이는 창문에는 문을 밀어 닫은 그의 크고 하얀 손이 닿아 있었다.
잡혔다.
잡혔어.
선혜는 난감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천천히 옆을 돌아보면 태준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띤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선혜가 목소리의 떨림을 감추고 물었다. 태준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입꼬리를 더욱 말아 올렸다.
선혜는 목소리의 떨림은 감췄을망정 눈동자의 떨림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은 고스란히 태준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갔다.
“방금 뭡니까?”
“뭐가요?”
“방금 그거.”
애매하게 언급하는 그의 말에 선혜가 반박조차 하지 못하는 사이, 태준이 느른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고은과 자신, 그리고 선혜가 서 있던 곳을 흘끗 쳐다본 그가 다시 선혜를 보며 말했다.
“선혜 씨 차에서 저렇게나 먼데.”
선혜 차뿐만이 아니었다. 셋이 서 있던 곳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에서부터도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저기까지 와서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뭔지 되게 궁금하네요?”
놀리듯 말끝을 슬쩍 올리며 묻는 태준이다.
선혜는 대답하지 않고 빠르게 눈을 좌우로 굴렸다. 그런데 태준이 그런 선혜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비켜요. 회사 사람들이 보기라도 하면……!”
순간 선혜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태준이 허리 숙여 눈을 맞췄다.
너무 가까워.
투명한 갈색 눈동자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태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질투한 거 맞죠?”
그 말에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질투. 질투라니.
반박해야 하는데 도저히 저 맑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 할 자신이 없었다.
선혜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선을 피하곤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피식 웃으며 하는 말에 선혜가 인상을 쓰고 태준을 보았다.
태준은 가까이에서 선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재차 물었다.
“나는 나만 선혜 씨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누가 누굴……!”
자기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져 선혜는 입을 다물었다. 괜히 주위에 누가 있을까 싶어 주위를 빠르게 살핀다.
평소에는 무표정하고 차갑고 도도한 여자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달싹거리며 버벅거리는 그 모습이,
무엇보다 귀여웠다.
태준이 못내 웃음을 터트리자 선혜가 그를 노려보았다.
하나도 안 무서웠다.
“비켜요. 빨리 가게. 수호가 기다린다고요.”
그 말에 태준은 기꺼이 물러나 주었다. 선혜는 태준이 차 문에서 손을 떼자마자 거칠게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시동을 거는가 싶더니 곧 빠르게 멀어졌다.
바라보는 태준의 얼굴에는 연신 웃음기가 가득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아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 마음 들었다 놨다 하는 여자라니까.
*
선혜는 도로 위를 한참 달리다 도로 위 편의점 하나를 발견하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빠른 걸음으로 편의점에 들어간 선혜는 생수 한 병을 사서 나와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벌컥벌컥 마셔댔다. 시원한 냉수로 들끓던 속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그녀는 시트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쩐지 기운이 쏙 빠지는 느낌에 곧바로 차를 출발시키지 못하고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머릿속에 조금 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화장실을 들르고 나오느라 조금 지연된 퇴근길. 자신의 차로 다가가던 차에 인적 드문 주차장에서 들리는 대화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섰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마주 보고 선 태준과 고은을 보고 말았다.
태준의 앞에서 부끄러운 듯 쭈뼛거리는 고은을 보자마자 예전에 자주 봤던 장면들이 그 위에 겹쳐졌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탐내던 고은에게는 남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때문에 자신의 남자친구, 혹은 자신에게 작업을 거는 남자에게 온갖 구실로 접근하여 직접 만든 쿠키나 초콜릿을 건네며 수작을 부리는 모습은 질리도록 봐 온 풍경이었다.
선혜는 그때마다 무관심하게 몸을 돌리곤 했었다. 그때 당시 만났던 남자친구도 그다지 호감이 있어 만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미련이 없었고, 자신을 쫓아다니던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선혜의 그런 무심함에 질린 남자들은 고은에게 홀랑홀랑 넘어가 고은과 연인이 되곤 했다.
배신감 같은 건 느끼지 못했었다. 그저 저에게 보란 듯이 빼앗은 남자를 옆에 끼고 승리자처럼 웃는 고은을 보며 어이가 없었을 뿐이었는데.
그땐, 분명 그랬는데.
방금 자신이 보인 격한 반응을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태준에게 전과 똑같이 구는 고은을 보자마자 속이 뒤틀렸다. 자기도 모르게 그곳을 향해 발걸음이 거칠게 향하고 태준이 받을 뻔한 쿠키를 낚아채기까지.
‘질투한 거 맞죠?’
질투. 태준이 언급한 그 낯선 단어가 머릿속에 맴맴 돌아 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선혜는 잠시 핸들에 두 팔을 포개고 그 위에 이마를 기대고 엎드렸다.
손등이 이마의 열기로 뜨끈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지잉. 가방에 있는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에 선혜는 고개를 들었다.
핸드폰을 꺼내자 화면에 ‘엄마’라는 단어가 떠올라 있다. 선혜는 뒤늦게 아차 싶은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나 지금 가고 있어.”
- 그래? 알겠어. 운전 조심히 하고.
“응.”
짤막하게 통화를 마친 선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기어를 넣어 차를 출발시켰다.
엄마랑 한 약속도 잠시 잊을 만큼 방금 일에 신경 쓰고 있던 자신을 되새김질한 선혜는 짤막한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집에서는 경애가 밥상을 차려놓고 수호와 함께 선혜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호와 함께 저녁을 먹은 뒤, 놀아주고, 씻기고 재운 뒤에야 경애와 선혜는 단둘이서만 마주 보고 앉을 수 있었다.
경애의 시선이 닫힌 수호의 방문에 닿아 있다가 앞에 앉은 선혜를 향했다.
경애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지 생각은 해 봤어?”
선혜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말하려고.”
“애 아빠한테?”
“응.”
선혜의 대답을 들은 경애는 잠시 안도한 얼굴을 하다가 물었다.
“언제쯤 말할 건데?”
“그 사람이랑 토요일에 같이 밥 먹기로 했어. 그때 얘기하려고.”
“그래. 잘 생각했어.”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경애가 고개를 들어 선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넌 괜찮을 거야.”
넌. 그 말에 줄곧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고 있던 선혜가 고개를 들어 경애를 보았다.
“그 남자, 너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더라.”
“……그래?”
“응. 취한 너 데리고 오는 것만 봐도 알겠더라. 어찌나 정성이던지.”
그때 일을 회상하던 경애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기억나지 않지만, 선혜는 어쩐지 알 만하여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웃고 있는 선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경애가 조금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너는 어떻니?”
그 질문에 선혜가 웃던 걸 그치고 경애를 쳐다보았다. 순간 스치는 당황의 빛을 유심히 보던 경애가 쉬운 어조로 물었다.
“너도 그 남자 좋아해?”
“……몰라.”
고개를 돌리며 그렇게 대답하는 선혜를 본 경애의 눈이 가늘어졌다.
“얘, 속일 사람을 속여라. 모르긴 뭘 몰라.”
선혜가 고개를 돌려 경애를 쳐다보았다.
“그런 거…….”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그렇게 말 하고 싶은데.
“…….”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하는 선혜를 보며 경애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지지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중얼거린 경애가 문득 시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려고?”
“그래. 늦었잖아.”
“자고 가지.”
“아니야. 됐어.”
경애는 곧 짐을 챙겨 현관으로 멀어졌다.
“얘기 잘하고. 나중에 신 서방 엄마한테 소개도 좀 해 주고.”
“신 서방은 무슨.”
경애가 신발을 신다가 그런 선혜를 힐끔 쳐다보고는 소리 없이 웃었다.
경애가 나간 뒤. 선혜는 닫힌 현관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안방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수호의 방으로 향했다.
깊게 잠든 수호가 차버린 이불을 덮어주고 선혜는 그 옆에 누웠다.
본능적으로 품에 파고드는 수호를 품에 안은 채 가만히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자연히 태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나만 선혜 씨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장난스럽게 놀리듯 말하던 태준.
거기에 한껏 동요하던 자신.
나도 참…… 이상해.
그 남자한테는 뭔가 자제가 잘되지 않는 느낌이다.
감정도 행동도, 충동도.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난…….
‘너도 그 남자 좋아해?’
엄마 경애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러면 좋아?’
물어오던 수호의 목소리도.
‘질투한 거 맞죠?’
태준의 목소리도 한 몫 거들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모른다 외면하고.
부정하고.
아닐 것이라고 여겼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본심이 점차 부스러기를 털어내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선혜는 이제 더는 감추지 않고, 묻으려 하지 않고.
그저 내버려 두었다.
조금씩 바스러지는 마음의 벽을. 그리고 그 뒤로 드러나기 시작한 진심을.
여전히 웅크리고 있는 그 마음 위에, 이제 더는 흙을 덮지 않았다.
대신 마주하기는 부끄러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끙끙거렸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이불을 내린 선혜의 눈이 협탁 위 달력으로 향했다.
토요일까지 남은 날짜가 이틀.
기다리는 마음이 두근대며 뛰었다.
더는 부정 하고 숨길 수만은 없는 그녀의 마음을 대신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