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29화 (29/109)
  • #29. 용기

    태석은 멀어지는 모자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사실로 들어왔다.

    태석은 다소 지친 얼굴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고개를 등받이에 젖히고 있는 그를 다과를 치우던 김 비서가 힐끔거렸다.

    “얘기는 잘하신 겁니까?”

    “응.”

    “윤선혜 씨 자료는 어떻게 할까요. 파쇄할까요?”

    태석은 김 비서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대답했다.

    “애 사진은 빼고 파쇄해.”

    “네. 알겠습니다.”

    김 비서는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챙겨 이사실을 나갔다.

    김 비서가 나간 뒤 태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김 비서가 남겨둔 수호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그가 탄식처럼 중얼댔다.

    “빼다 박았네. 빼다 박았어.”

    유치원. 그리고 수영장.

    조카인 세빈의 보모 노릇을 잠시나마 한 태준이라면 유치원에서 수호를 마주쳤을 법했다. 수영장에서도 마찬가지고.

    그런데도 제 자식인지 못 알아본다 이거지.

    제 가슴이 다 답답해져 오는 것만 같다.

    탁한 숨을 길게 흘렀다. 인상을 찌푸린 태석이 문득 핸드폰을 들어 올려 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형. 나 운전 중인데. 급한 일이야?

    “야. 너 시력이 몇이냐?”

    — 시력?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해하는 태준의 목소리에 어쩐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빨리 말해 봐. 몇이야, 너.”

    — 양쪽 다 1.5일걸?

    하. 기가 찬 헛웃음이 절로 터졌다.

    “1.5는 무슨. 너 시력 검사 다시 해.”

    짧게 일갈한 태석은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툭 올려놓았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내며 창밖을 응시했다.

    서서히 저녁노을에 물들어가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가 중얼댔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둔한 건지 원.”

    쯧. 혀를 짧게 찬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한편. 태준은 황망한 얼굴로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갑자기 시력을 왜 묻는 건지. 참 생뚱맞다 싶었다.

    다시 전화해서 이유를 물어볼까 했지만 신호가 바뀌었다. 태준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큰 규모의 한식 전문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태준의 가족이 단골인, 선혜와 토요일에 가게 될 그곳이.

    태준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단둘이 밥이라.

    오랜만이네.

    니스에서 선혜와 밥을 먹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때마침 사랑스러운 음색을 지닌 여자 가수의 노랫소리가 차 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준은 손을 뻗어 음량을 살짝 높였다. 그리고 행복한 얼굴로 그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유난히 분홍빛을 띠는 저녁노을이 서서히 내려앉는 도로 위.

    도로를 따라 멀어지는 태준의 차에는 설렘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

    선혜는 오랜만에 수호와 함께 욕조에 앉아 같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수호와 물장구를 주고받기도 하고 샴푸 거품을 묻힌 머리를 이런저런 모양으로 만들며 즐겁게 웃기도 했다.

    수호의 머리를 헹궈준 선혜가 손으로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었다. 수호가 물에 젖은 얼굴을 살짝 쓸어내리더니 쌩긋 웃었다. 웃을 때면 가늘어지는 눈매와 왼뺨에 움푹 패는 보조개 탓에 태준과 더 닮아 보였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수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선혜가 문득 입을 열었다.

    “수호야.”

    “응?”

    “태준이 아저씨, 많이 좋아?”

    수호는 그 질문에 부끄러운 듯이 눈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작게 한번 끄덕거렸다.

    “그 아저씨가 왜 좋은데?”

    손으로 물을 찰박거리던 수호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수영 엄청 잘하고.”

    길게 얘기 안 할 줄 알았는데 수호가 줄줄이 이야기했다.

    “가르쳐 달라는 거 다 알려주고, 나한테도 잘해 줘. 엄청 멋있고, 엄청 착해.”

    부끄럽게 입을 열 땐 언제고 눈을 반짝이며 수호가 선혜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나중에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

    선혜가 그 말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 그렇게 될 거야.”

    “정말?”

    “응.”

    확신에 찬 엄마의 말에 신났는지 수호가 싱글싱글 웃었다.

    그 위로 태준이 겹쳐 보였다. 자기만 보면 자꾸만 웃는 그 바보 같은 남자가.

    태석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마 수호가 자기 아들인 걸 알면, 아주 좋다고 난리 치고도 남을 앱니다, 태준이 걔는.’

    정말 그럴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수호를 외면하는 태준의 모습이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수호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가 떠올랐다.

    ‘우리 태준이도 알 권리라는 게 있습니다.’

    알 권리.

    ‘애 아빠로서.’

    애 아빠.

    그 단어 두 개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맴 돌았다.

    “수호야.”

    “응?”

    선혜는 수호의 다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물었다.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인지 선혜는 알고 있다.

    수호의 대답은 뻔했으니까.

    “왜 엄마?”

    “아냐. 아무것도.”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선혜는 토요일 약속을 떠올렸다. 용기를 내어 결심했다. 태준에게 수호가 아들이라고 이야기하기로.

    진실을 알았을 때,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릴 적 기억 속에 아른거리는 아버지 석주의 표정을 애써 지워내며 선혜는 태준의 웃는 얼굴만 떠올렸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말이다.

    *

    토요일은 참 느리게도 오고 있었다.

    체감상 일주일은 지난 것 같은데 겨우 하루가 지나 있었다. 태준은 달력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달력에는 선혜와 약속을 잡은 토요일이 커다랗게 표시되어 있었다.

    동그라미를 그린 것도 모자라 자잘한 별표까지 그려져 있는 게 엄청 중요해 보였는지, 지나가는 사원들이 무슨 날이냐고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태준은 그저 ‘중요한 날’이라고 말하며 웃을 뿐이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중요한 날이긴 했으니.

    고작 밥 한 끼지만 데이트나 다름없었다.

    뭘 입고 가야 하지. 꽃이라도 한 송이 사갈까. 아. 이건 너무 오반가.

    마치 첫 데이트하러 가는 소년처럼 행복한 고민에 휩싸여 있는 때였다.

    형주가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태준의 자리로 다가왔다.

    “신 주임. 옥상 가지 않을래?”

    은근한 눈짓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태준이 말했다.

    “과장님 저 금연 했습니다.”

    형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어? 금연?”

    “네.”

    “손 상처 때문에 그래? 에이. 하루에 한 개비 피운다고 상처가 덧나기라도 하겠어?”

    “아니에요. 다치기 전부터 마음먹은 거라.”

    더 꼬드기려고 했지만, 태준의 눈빛이 워낙 완고해서 형주는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형주가 아쉬운 얼굴로 말하고는 성균에게 눈짓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성균이 자리에서 일어나 형주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둘은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를 하나씩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금연이라. 우리 내기할래? 신 주임 얼마나 오래 금연하나.”

    “전 한 달 걸겠습니다.”

    “난 일주일.”

    두 남자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키득거렸다. 김형주 과장이 난간에 기대어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고 연기를 내뱉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성균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런데요, 김 과장님.”

    형주가 눈만 돌려 그런 성균을 보았다.

    “신 주임이랑 디자인 팀 윤선혜 씨 사이에 뭐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둘이?”

    형주는 놀란 얼굴로 반문하긴 했으나 이내 이해가 간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긴. 그때 회식에서 신 주임 반응도 그렇고. 전에 아는 사이였다는 것도 그렇고.”

    “그쵸? 뭔가 있죠?”

    “둘 다 좀 잘났냐. 끌려도 벌써 끌렸겠지.”

    성균이 그 말에 입을 비죽이 내밀었다.

    “야, 너도 그냥 포기해. 경쟁 상대가 신 주임이면 승산 없다? 너도 잘 알지?”

    “그래도 뭐, 윤선혜 씨 취향이라는 게 있는 건데. 연하는 안 좋아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연상이든 연하든 뭐가 중요하냐. 얼굴 잘생겼지, 키 커, 몸도 좋아, 성격 시원시원해, 게다가 현성 출판사 막내아들이야. 설사 윤선혜 씨가 나이 따진다고 해도 다른 조건들이 다 카바 치는데, 뭘.”

    더는 반박할 말이 없는지 성균이 입을 댓 발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런 성균을 보고 피식 웃던 김 과장이 문득 물었다.

    “야. 근데 너 내기에 얼마 걸 거냐?”

    “이만 원이요.”

    “애걔? 겨우? 야, 더 걸어. 오만 원 걸자, 오만 원.”

    형주가 조르자 마지못해 성균은 오만 원을 걸었다.

    누가 이길지 모르는 내기가 그렇게 성사되었다. 성균의 입 밖으로 탁한 숨이 나와 흩어졌다. 형주는 그런 성균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다가 투박한 손길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

    고은은 온종일 울적해 보였다. 음울한 기운이 어찌나 짙은지 주위 사람들이 다 눈치를 볼 정도였다. 매니저는 그런 고은을 처음에는 아니꼽게 생각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안쓰러운지 표정이 풀어졌다.

    매니저가 사람 좋은 얼굴로 옹송그린 고은의 어깨를 툭 쳤다.

    “기운 좀 차려. 실수 하나에 언제까지 처져 있을 거야?”

    “죄송합니다.”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고은은 입을 꾹 다물고 다시금 고개를 숙여 보였고 그 비굴한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쉰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얼른 마감하고 집에 가자. 시간 다 됐네.”

    “네.”

    두 사람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마감을 하기 시작했다.

    마감한 고은은 본사 건물을 나서며 매니저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매니저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등을 돌렸다. 매니저가 옆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는 걸 보자마자 고은은 다시 본사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발걸음을 재촉한 고은이 도착한 곳은 지하 주차장. 전날과 다를 바 없는 행보였다.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의 얼굴이 순간 환해졌다. 멀지 않은 곳에 태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다. 오늘은 늦지 않았구나. 고은은 안도의 숨을 짤막하게 내쉬고는 차를 향해 다가가 섰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태준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기다림은 다행히도 짧았다. 멀리서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태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오는 그의 손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아픈지 손등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좁힌 그는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의 차 근처에 서 있는 고은을 발견하고는 순간적으로 멈춰 섰다.

    당혹감과 의아함이 차례로 스치고, 곧 그가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돌아서고 싶은데 자신의 차 앞에 버젓이 서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태준은 별수 없이 고은에게로 다가갔다. 태준이 차 앞에 도착할 때쯤 고은이 그를 향해 한걸음 다가왔고 태준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저기, 안녕하세요.”

    고은은 소심한 얼굴을 지어내며 인사를 건넸고 태준은 다짜고짜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 그게…… 저번 일에 대해 사과를 좀 드리고 싶어서요.”

    “사과요?”

    “네. 제가 실수한 것 때문에 많이 다치셨잖아요.”

    고은이 태준의 다친 손을 보고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아픔에 동감하는 표정이었지만 뭔가 진심이 겉도는 듯 밍밍하기만 했다. 주된 목적이 그게 아니라 그럴 만도 했다.

    태준은 그런 고은을 떨떠름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많이 아프세요?”

    “아뇨. 딱히. 사과 다 하셨으면 이만.”

    태준이 그렇게 말하고 막 운전석으로 향하는데 고은이 손을 뻗더니만 태준을 붙들었다. 태준이 자기도 모르게 굳은 얼굴로 쳐다보자 고은이 황급히 손을 놓았다.

    손에 닿는 단단한 팔의 감촉에 황홀해하는 것도 잠시. 그녀가 간절함을 담은 두 눈으로 태준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말로만 사과를 드리긴 그렇고 제가 밥 한 끼 대접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이대로 보내드리면 제 마음이 너무 불편한걸요.”

    “그쪽이 이러시면 제 마음이 더 불편합니다만.”

    순간 고은은 입을 다물었다. 태준은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만하시고 이만 가시죠. 저, 퇴근하고 싶은데.”

    고은은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쉽게 물러나지 않을 기세다.

    ‘미치겠네.’

    태준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헛숨을 짤막하게 내쉬었다.

    더 시간을 지체하기가 싫어 태준이 막 고은을 향해 입술을 떼려는 찰나였다.

    “그럼 이거라도 받아주세요.”

    고은이 부스럭거리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비닐에 포장된 쿠키와 하얀 봉투였다.

    “이건 제가 직접 만든 거고요, 이건 치료비예요.”

    원래는 밥을 먹고 나서 주기로 했지만, 태준이 워낙 완강한 태도를 보여 한발 물러선 고은이었다.

    하지만 태준은 그마저도 받아주지 않았다. 치료비는 그렇다 쳐도 쿠키라니.

    손수 만든 정성 어린 선물을 받아주는 게 상대에게 어떤 의미로 비칠지 경험상 알고 있었기에 받아주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렇게 주눅 든 여자한테 더 매몰차게 굴기도 마음이 좋지 않고.

    고민 끝에 태준이 쿠키와 봉투를 향해 손을 뻗는 때였다.

    또각거리는 날카로운 구두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고은의 손에 있는 물건을 누군가가 탁 채갔다. 성난 기세에 주춤거린 고은과 태준은 가까이 다가온 사람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태준의 옆에 화난 얼굴로 서 있는 이.

    선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