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태석의 호출
고은의 수작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테이크아웃 잔을 향해 손을 뻗을 때부터 이상한 느낌이 들었더랬다. 그러다가 태준이 잔을 잡았을 때 캡이 너무도 쉽게 벗겨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안……!’
실수일까 싶었는데 고은의 반응이 실수가 아니었음을 단번에 알게 해 주었다.
실수가 아닌, 고의.
아니, 악의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아마도 악질적인 장난의 대상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기치 않게 태준이 끼어들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다친 건 자신이 아니라 태준이 되었다.
그 사실에 몹시도, 몹시도 화가 났다.
속상해서 미칠 것 같았다.
“…….”
유난히 하얀 피부를 자랑하던 손은 데이는 바람에 온통 붉었다. 물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화상을 입음과 동시에 피부가 벗겨지기까지 했다.
얼마나 아팠을까.
마치 제가 다친 것처럼 아팠다. 손이 아닌, 가슴이.
“선혜 씨.”
부르는 소리에 선혜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겨우 누르고 고개를 들어 태준을 보았다.
“나 괜찮은데.”
머쓱한 그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알았다. 자기가 지금껏 태준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손을 놓아주자 어색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태준은 손목에 남은 벌건 손자국을 다른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다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꼭.”
어쩐지 목이 메서 목을 가다듬어야 했다.
“병원 갔다 와요.”
때마침 음료가 나왔다는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혜는 음료값을 받지 않겠다는 매니저의 성의를 선선히 받아들인 뒤 캐리어와 음료를 두 손에 들고 돌아서서 멀어졌다.
태준은 한참 동안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선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자국이 남은 제 손목을 보았다.
속상해하던 선혜의 얼굴과 병원에 다녀오라고 당부하던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차례로 떠올랐다.
참 이상한 현상이다.
아픈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자기도 모르게 실실 미소 짓고 있던 태준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카운터 너머 자기를 쳐다보고 있던 고은이 후다닥 시선을 피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태준은 아까 고은을 대하던 선혜의 태도를 생각했다.
‘죄송하다고 할 거면, 죄송할 짓을 하지를 말던가.’
아무리 까칠한 성정을 지녔다고 해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렇다면 둘이 아는 사이고 선혜가 저 여자를 싫어한다는 뜻인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고은이 슬금슬금 눈을 들어 자신과 눈을 맞추었다. 할 말이 있는 얼굴로 천천히 카운터로 다가오는 고은을 지켜보던 태준은 이내 몸을 돌려 카페를 나섰다.
“저기……!”
고은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선혜가 싫어한다면 자기도 굳이 상대해 줄 필요가 없을 거라 여겼기 때문에.
‘꼭. 병원 다녀와요.’
병원이나 가야겠다.
선혜의 말을 상기한 태준은 한 부장에게 연락을 넣은 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선혜는 커피를 하나하나 팀원들에게 나누어주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손에 들린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찬 커피가 속을 달래주었지만 잠시뿐. 고은이 했던 짓을 생각하니 다시금 화가 끓어올랐다.
왜 이러지? 내가 이렇게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었나?
선혜는 숨을 고른 뒤 다시 커피를 들이켰다. 얼음 하나를 입에 넣고 우득우득 씹었다.
얼음의 냉기를 빌어 겨우 속을 가라앉히고 업무에 집중하는 때였다.
지잉. 핸드폰이 울렸다. 태준에게서 온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선혜는 태블릿 펜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사진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웬 피부과 간판 사진이었다.
의아해서 눈을 깜박이는데 메시지 한 줄이 이어서 도착했다.
[나 병원 왔어요.]
병원에 가라고 한 자신의 말을 착실히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특하긴 했으나 이렇게 굳이 보고까지는 안 해도 되는데.
그나저나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뒤늦게 이런 고민을 하는 게 낯설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까지 취해서 이상하게 답장한 거 빼고는 태준의 연락을 무시로 일관했으니까.
선혜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
[잘했어요.]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타이포 디자인에 몰두하는데 얼마 안 가 또 지잉,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태준.
이번에도 사진 한 장이 보내져 있었다. 치료가 끝나 손에 붕대가 감아져 있는 사진이. 태준은 다친 손으로 브이 표시까지 해 보이고 있었다.
[치료 다 했어요. 주기적으로 약 바르고 물 안 닿으면 금방 낫는대요.]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메시지가 더 왔다.
[그러니까.]
다음 말이 궁금하여 쳐다보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요. 괜찮으니까.]
어쩐지 가슴이 저미어 선혜는 한참을 핸드폰을 붙들고 있었다.
걱정하는 자신을 달래려고 괜찮다는 말이 하고 싶었나 보다. 이 남자는 다치면서도 끝까지 자기 걱정이었다.
[그럼 업무 파이팅입니다.]
태준은 그렇게 메시지를 마무리 지었다.
선혜는 태준이 보낸 메시지를 한참 쳐다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태준 씨도요.]
두 사람이 정상적으로 주고받은 첫 메시지였다.
*
병원에 갔다가 회사로 돌아온 태준은 선혜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싱글벙글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내내 보고 있다가 문이 열리자 겨우 핸드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순간 다친 손에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손등을 들여다보았다.
의식하니 화끈거리는 통증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무엇보다 물 닿지 않게 주의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의사의 당부를 떠올리던 태준이 혀를 짧게 차며 중얼거렸다.
“수영장 못 가게 생겼네.”
자연히 머릿속에 수호가 떠올랐다.
서운해할 것 같은데. 당분간은 못 간다고 미리 연락이라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사무실로 향하는데 배를 부여잡고 마케팅부 사무실에서 허겁지겁 나오던 기주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넨 태준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어? 어어.”
기주는 손을 대충 휘두르고 화장실로 서둘러 달려갔다.
태준은 그런 기주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몇 걸음 걸어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기억, 안 나는 눈치지.
태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놓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
한편.
기주는 변기에 주저앉아 요동치는 장과 싸우고 있었다.
그가 문득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짜…….”
이를 악문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 형이랑 똑같이 생겨선.”
말을 마친 그가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날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시긴 했으나 필름은 끊어지지 않아 기억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태준을 태석으로 착각하여 소리소리 지른 건 무엇보다도 생생했다.
선혜를 부축해 멀어지던 태준의 모습도 선명했고.
‘오늘 일은 기억하지 마시고요.’
태준이 했던 경고도 마찬가지.
둘이 뭐야? 사람들 몰래 연애라도 하나?
심상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뿐.
다시금 찾아드는 복통에 그는 몸을 웅크리고 신음을 삼켰다.
술에 전 장기들이 아우성을 치기 바쁘다.
기주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망할 자식…….”
이게 다 신태석 너 때문이야.
괜히 애먼 사람한테 원망을 돌리는 기주였다.
*
“에취!”
느닷없이 터진 우렁찬 재채기 소리에 태석의 비서인 김 비서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거렸다.
“감기라도 걸리신 겁니까?”
“아니. 갑자기 나오네. 희한하게.”
누가 내 욕이라도 하나. 작게 덧붙이며 젖은 코를 살짝 훌쩍거린 그가 김 비서가 가져다준 서류를 보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이게 뭐야?”
“저번에 알아보라고 하신 거 알아봤습니다.”
“알아보라고 한 거?”
뭐였지? 태석은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아, 하며 입을 열었다.
“그 윤선혜라는 여자?”
“네.”
“천천히 알아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김 비서는 다소 원망스러운 눈으로 태석을 보았다.
말이 천천히지 늦게 알아봤으면 분명 질책했을 터다. 그가 말한 ‘천천히’의 기준은 일주일이었다. 그때 태석이 한 말은 김 비서에게 ‘일주일 내로 저 여자에 대해 알아 와라.’라고 하는 거로 들렸다.
태석은 흥미로운 얼굴로 봉투를 가져갔다. 그리고 서류를 꺼내 하나하나 넘겨보았다.
자료를 정리하여 내용을 알고 있는 김 비서는 갈수록 빈번하게 태석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태석의 반응이 걱정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짐작이 맞는지도.
태석이 내용을 훑어내리다가 헛웃음을 쳤다.
“파란만장하게도 사셨네.”
김 비서가 알아 온 내용에는 선혜의 일대기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홀어머니와 일곱 살까지 같이 살다가 그 이후에 아버지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몇 년 뒤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재혼했고 그 후로 선혜는 새어머니와 의붓여동생과 같이 살았다.
그러다 의사인 아버지의 실수로 벌어진 의료사고로 인해 병원이 부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약혼?”
그 직후에 약혼이라. 시기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약혼 상대를 보고 태석은 이해했다.
약혼 상대가 그때 당시 건물주. 그런데 선혜랑 나이 차이가 크게 난다. 무려 열 한 살. 첨부되어있는 사진으로 본 얼굴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나이 많은 남자가 취향인가. 그럼 아이는 약혼자의 아이인 건가? 결혼하고 나서 이혼이라도 했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읽어 내려가는데 곧 눈에 파혼 정보가 들어왔다.
약혼자의 아이까지 배고 파혼을 했다니. 애 때문이라도 같이 살기 마련이건만.
하지만 탐탁지 않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혼한 시기가 마음에 걸린다.
날짜를 곰곰이 들여다보던 태석은 곧 알게 되었다.
파혼을 앞두었을 무렵이 태준이 니스에 다녀온 시기와 겹친다는 사실을.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던 태석이 허리를 세우고 테이블에 바짝 의자를 끌어왔다. 그리고 아까와는 다른 심각한 얼굴로 샅샅이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의아한 부분은 또 있었다.
파혼 후 곧바로 미혼모 센터 입소?
가족들이 버젓이 있는데?
뭔가 이상하다.
그렇게 쭉 훑어내리며 서류를 넘기는데 사진 한 장이 툭 떨어졌다. 김 비서가 서류에 붙여 놓은 것인데 떨어진 것이었다.
태석이 불안한 눈으로 뒤집힌 사진을 쳐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사진을 눈앞에서 뒤집었다.
“……!”
사진 속 인물을 본 그의 동공이 커다랗게 벌어져 흔들렸다. 숨도 못 쉬고 굳은 채로 태석은 사진 속 인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김 비서가 예상한 반응이었다.
“윤선혜 씨 아들, 윤수호 군입니다.”
순간 태석이 눈을 번쩍 들어 김 비서를 쳐다보았다.
“뭐? 누구라고?”
“윤선혜 씨 아들, 윤수호 군이요.”
태석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수호의 사진을 다시금 쳐다보았다.
순간 태준의 어렸을 때 사진인 줄 알았다. 그만큼 흡사했으니까.
가슴이 쿵쿵 뛰었다.
태석은 태준이 니스에 갔던 시기를 다시금 떠올렸다.
6년 전 2월 말. 아내 지현이 아이를 배고 출산 날을 따지던 기억을 더듬어 날짜를 계산했다. 그런 그가 김 비서에게 물었다.
“혹시 얘, 생일이 언젠 줄 알아?”
김 비서가 예상했다는 얼굴로 덤덤히 대답했다.
“12월이요.”
쿵쿵 뛰던 가슴이 그예 내려앉고 말았다.
태석이 힘없이 손에서 사진을 떨어뜨렸다. 사진 속 수호는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 자신이 기억하는 태준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태석이 더는 서류를 넘겨보지 않자 김 비서가 뒷 내용을 입으로 나열해 주기 시작했다.
“윤수호 군은 현재 이사님 조카 장세빈 양과 같은 유치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던 태석이 눈을 들어 김 비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남동생분과는 같은 수영장에 다니고 있고요.”
“게다가 윤선혜 이 여자는 이번에 우리 회사에 들어왔다.”
느릿느릿 말한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우연의 일치치고 너무나 절묘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의심이 생긴다.
우연일까? 이게, 다 우연이라고?
문득 면접을 보던 때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게 그런 의미였나?
하긴 뭔가 이상하다 싶긴 했다. 아이를 키우려고 제법 짭짤하게 수익을 벌어들이던 프리랜서를 그만두고 입사를 하다니.
회사 생활을 하면서 몸이 편해지기야 했겠지만 그래도 돈이라는 존재를 그렇게 쉽게 외면할 수가 있나? 더구나 애까지 키우는 마당에.
의심이 가닥가닥 이어지자 그 끝이 없었다.
태석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안 좋은 방향으로만 치닫는 생각을 멈췄다.
지금 해야 할 건, 의심이 아니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그의 눈이 수호의 사진으로 향했다. 사진 속 수호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김 비서.”
“네, 이사님.”
태석이 눈을 들어 똑바로 김 비서를 쳐다보았다.
“이 여자 호출해.”
지금 당장.
태석의 지시에 김 비서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이사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