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23화 (23/109)
  • #23. 경애의 의심

    수호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엄마인 선혜를 기다리며 블록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경애가 통화를 끝내자 수호가 돌아보며 물었다.

    “할머니. 엄마 더 늦게 온대?”

    통화를 마친 뒤에도 핸드폰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경애가 수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 아냐. 엄마 지금 온대. 할머니가 데리러 가려고.”

    “진짜? 나도 갈래.”

    “그래. 블록 정리하고 같이 가면 되겠다.”

    “응.”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수호가 가지고 놀던 블록을 모아 장난감 상자에 넣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던 경애가 다시금 손에 든 핸드폰을 힐끔거렸다.

    “처신 잘하라니까.”

    쯧. 누군지 몰라도 고생깨나 하겠다 싶었다.

    *

    경애와 수호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정문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 선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었을 때쯤, 차 한 대가 정문으로 다가와 섰다.

    조수석 창문 너머 잠이 든 선혜의 모습을 보곤 자리에서 일어나던 경애는 운전석에서 내리는 태준을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

    그 남자였다. 유치원 앞에서 봤던.

    수호랑 닮은 그 남자.

    “어? 아저씨!”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수호의 반응이었다. 낯가림이 심한 편인데 반가운 얼굴로 태준을 보며 손을 흔드는 수호다.

    경애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수호와 태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태준이 그런 경애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경애가 얼결에 고개 숙여 인사를 받는 동안 수호가 태준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아저씨가 우리 엄마 데리고 온 거예요?”

    태준에게 다가가는 수호나, 그런 수호의 머리를 쓰다듬는 태준이나 하는 행동이 서슴없었다. 익숙한 친밀함이 그들 사이에 존재했다.

    “응.”

    “근데 엄마는요? 왜 안 내리지?”

    “엄마 주무셔.”

    “잔다고요?”

    태준이 조수석 문을 열어주자 수호가 선혜를 발견하고는 다가갔다.

    “엄마. 엄마, 자?”

    수호가 다리를 붙들고 흔들었지만, 완전히 늘어진 선혜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호가 얼굴을 찡그리다가 뒤를 돌아보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경애를 향해 말했다.

    “할머니. 엄마가 이상해.”

    “그냥 주무시고 계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경애 대신 태준이 달래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자 수호가 고개를 들어 태준을 보았다.

    “정말요?”

    “그럼.”

    그래도 잠든 선혜가 걱정되는지 수호는 선혜의 옆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수호가 선혜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기대고 아양을 떠는 동안 경애와 태준의 눈이 다시금 허공에서 부딪혔다.

    잠시의 묘한 침묵 뒤.

    “안녕하세요.”

    다시금 정중하게 인사를 해 오는 태준에게 경애가 물었다.

    “그때 그분 맞죠? 유치원 앞에서 봤던.”

    “네. 신태준이라고 합니다.”

    신태준. 태준의 이름을 속으로 한번 곱씹은 경애가 의아한 눈으로 선혜와 태준을 번갈아 보았다.

    순간 태준이 전화 너머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선혜랑 같은 회사 다녀요?”

    “네.”

    태준의 대답에 경애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이번에는 경애의 눈이 태준과 수호 사이를 오고 갔다.

    “근데 수호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수호랑은 수영장에서 만났어요. 어쩌다 보니 친해져서.”

    연속되는 우연의 일치에 경애가 눈을 느리게 끔벅였다.

    또다시 찾아온 침묵 사이로 수호가 ‘엄마 일어나 봐.’ 하고 조르는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아무리 수호라도 술에 취해 잠든 선혜를 깨우기에는 무리가 있는 모양인지, 수호가 아무리 흔들어도 선혜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태준이 잠시 고민하는 얼굴로 그 모습을 보다가 경애를 보았다.

    “어머니 혼자 선혜 씨 부축하시기엔 어려우실 것 같은데, 제가 선혜 씨 업어서 댁에 모셔다드려도 괜찮을까요?”

    태준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경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태준이 선혜에게 다가갔다. 수호의 어깨를 잡고 허리 숙여 눈을 맞춘 그가 수호에게 잠깐만, 이라고 말하는 모습이 경애의 망막에 맺혔다. 곧 태준이 선혜를 가볍게 등에 업었고 경애가 다가가 선혜의 짐을 챙겼다.

    태준의 옆에 바짝 붙은 수호가 태준에게 물었다.

    “아저씨, 안 무거워요?”

    태준이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전혀.”

    경애는 계속해서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

    태준은 열린 현관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경애의 안내를 받아 침실로 향한 그가 침대 위에 선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경애는 선혜를 대하는 태준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았다.

    아까 등에 업는 것도 그렇고, 편하게 고쳐 업는 것도 그렇고, 또 저렇게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주는 모양새가 섬세하기 짝이 없었다. 눈빛은 또 어떻고. 선혜를 따스하게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쉽게 알 수 있었다. 태준이 선혜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경애의 시선이 계속해서 수호와 태준을 오고 갔다.

    이리 보고, 또 저리 보아도, 닮았다.

    태준을 보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된 수호의 모습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아무리, 아무리 봐도.

    부자 관계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선혜는 수호한테 저 남자를 모른다고 답했다 했다.

    자기 자식한테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는데.

    했다 하더라도 굳이 자식한테 친아빠를 숨길 이유가 있나?

    아니면 내가 잘못 짚고 있는 건가.

    수호를 대하는 태준의 태도는 혼란을 가중시켰다.

    남보다 더한 친밀한 감이 느껴지긴 했으나 태준이 수호에게 보이는 태도는 아들에게 하는 거라 하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었다.

    대체 뭐가 뭔지. 혼란스럽기만 한 경애였다. 머리가 지끈거려 입 밖으로 한숨이 절로 새어나갔다.

    한편. 잠든 선혜의 품에 파고든 수호를 빤히 쳐다보던 태준은 경애의 한숨 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경애의 속마음을 까맣게 모르는 태준으로서는 남의 집 침실에 들어와 나가지 않고 버티는 자신을 아니꼽게 생각하고 눈치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아차 싶은 마음에 태준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침실을 나서는 태준의 뒷모습을 보던 경애가 배웅 삼아 그를 뒤 따라갔다.

    현관에서 신을 신고 있던 태준을 지켜보던 경애가 문득 물었다.

    “신태준 씨라고 했죠.”

    신을 다 신은 태준이 대답했다.

    “네.”

    경애는 그런 태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훤칠하니 잘생긴 얼굴에 고개를 한참 들어 보아야 하는 큰 키. 티셔츠에 면바지만 가볍게 걸쳤음에도 태가 나는 차림새.

    경애의 눈치를 보는 속내가 고스란히 비치는 연갈색 눈동자.

    그 눈을 마주하고 있던 경애가 무언가를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고생했는데 조심히 들어가요.”

    의아한 얼굴로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던 태준은 곧 안녕히 계시라며 허리를 숙여 보인 뒤 현관을 나섰다.

    태준이 나간 뒤로도 경애는 꼼짝없이 현관에 서 있었다. 잔뜩 심란한 얼굴로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던 경애가 성큼성큼 침실로 다가갔다.

    문을 벌컥 열고 침대 곁에 다가간 경애는 순간 멈칫했다.

    수호와 선혜가 나란히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서로의 손을 꼭 붙든 채로.

    그 평온한 모습을 보자 당장에라도 깨워서 자초지종을 묻고 싶은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경애는 깨우려고 뻗은 손으로 이불을 끌어다 두 사람 위로 덮어주었다.

    흘러내린 선혜의 머리칼을 부드러운 손길로 넘겨준 경애의 입 밖으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잠든 선혜의 얼굴을 바라보는 경애의 얼굴에는 어수선한 마음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

    한편. 오피스텔로 돌아온 태준은 곧장 샤워실로 들어갔다. 수영을 하고 나면 꼭 샤워하곤 했는데 선혜를 곧바로 데리러 가느라 하지 못했다. 뛰어가느라 땀 흘려 찝찝하기도 했고.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에 서 있던 태준의 손끝이 무심결에 제 입술에 닿았다. 선혜가 입을 맞춰오던 감각만큼은 물에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다시금 떠올리자 불이라도 붙은 듯이 화끈거렸다. 선혜가 수호에게 뽀뽀하는 걸 볼 때마다 부럽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경험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좋았다.

    좋았는데.

    의문은 여전했다.

    “닮았나.”

    태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그가 손을 뻗어 샤워기 물을 껐다. 손으로 머리칼을 젖힌 그가 부옇게 김이 서린 거울을 손으로 밀어 닦아냈다.

    물에 젖은 잘생긴 얼굴이 물방울 맺힌 거울에 비쳤다.

    태준은 새삼스레 자신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리고 수호의 얼굴을 떠올리며 대조시켜 보았다.

    연한 갈색 눈동자와 웃을 때면 왼쪽 뺨에 두드러지는 보조개.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설마 하는 마음에 태준은 수호의 나이를 생각했다. 그러다 뒤늦게 알았다. 수호의 나이조차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을.

    막막했지만 수호와 세빈이 친구라는 사실을 금방 떠올렸다.

    세빈이가 올해로 몇 살이지.

    조카가 셋이나 되다 보니 나이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생각에 잠긴 그의 머릿속에 세빈이 태어나던 날이 떠올랐다.

    추웠던 겨울. 미국에서 전해 들은 누나 태연의 출산 소식.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한국의 시차까지 고려하여 날짜를 확인했으니.

    스물두 살로 접어들던 1월 1일.

    한국시각으로 자정을 막 넘기던 시간이었다.

    “여섯 살?”

    그럼 아닌데.

    태준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뒤로도 한참을.

    미심쩍은 기분은 쉽사리 떨쳐지지 않았다.

    태준은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른 채 고개만 갸웃거렸다.

    ***

    다음날.

    선혜는 어마어마한 숙취를 안고 아침을 맞이했다. 깨어질 것 같은 머리를 붙들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다가 그만 침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온몸이 부서지는 통증이 찾아들었다. 아침부터 이 무슨 날벼락인지. 허리를 붙들고 으으, 신음을 내뱉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 뭐 하니?”

    문 앞에는 경애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선혜는 민망한 얼굴로 경애를 쳐다보다가 급격히 찾아오는 두통에 머리를 붙들고 신음했다.

    쯧. 경애가 짧게 혀를 찼다.

    “무슨 술을 떡이 되도록 마셔선.”

    “나 어제 어떻게 된 거야?”

    선혜가 겨우 고개를 들더니 물었다.

    경애는 선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한숨 쉬듯 말했다.

    “씻고 나와서 아침이나 먹어. 콩나물국 시원하게 끓여놨으니까. 수호는 내가 방금 등원시키고 왔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말을 마친 경애가 몸을 돌려 문에서 멀어지고 선혜도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확인한 선혜는 급히 욕실로 들어갔다. 경애가 수호를 데려다준 덕분에 시간을 벌긴 했지만 아슬아슬해서 서둘러야 했으므로.

    어젯밤 일이 기억나지 않아서 불안했지만 잠시뿐.

    얼른 회사나 가자. 선혜는 쏟아지는 샤워기 물줄기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

    .

    .

    아침밥을 생략하려 했지만 한 술이라도 뜨라는 경애의 성화에 못 이겨 선혜는 밥상 앞에 앉았다.

    막상 얼큰하게 끓인 콩나물국을 보자 입맛이 당기긴 했다. 선혜는 서둘러 밥을 크게 떠서 국에 말았다. 막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으려는 때였다.

    “선혜야.”

    경애가 부르는 소리에 선혜가 고개를 들었다.

    선혜의 눈을 들여다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경애가 물었다.

    “어제 너 데려다준 남자 누구니?”

    “남자?”

    선혜가 인상을 확 찌푸리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남자? 데려다줬다고? 그럴만한 인물은 하나밖에 없었다. 한기주 팀장.

    “한 팀장님이라고 우리 팀 팀장님.”

    덤덤하게 말했지만 망했다 싶었다. 신세도 그런 신세를 지다니.

    가다가 죄송하다고 연락이라도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때였다.

    “한 씨 아니던데.”

    경애의 말에 국으로 향하던 선혜의 손이 멈칫했다. 선혜가 고개를 들어 경애를 쳐다보았다.

    잔뜩 의아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선혜를 보다가 경애가 입을 열었다.

    “신태준이라고 하던데.”

    쨍그랑. 눈을 부릅뜬 선혜의 손에서 수저가 떨어졌다.

    미약하게 떨리는 선혜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한 채 경애가 물었다.

    “그 남자, 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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