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22화 (22/109)

#22. 의문

— 어딥니까, 대체.

희미하게 들려오는 태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선혜는 눈을 깜박였다. 전화를 받아든 모양새가 아니라 손에 든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는 모양새였다.

— 여보세요?

다시금 들려오는 태준의 목소리에 술에 취해 흐려졌던 정신이 대뜸 맑아졌다.

내가 왜 이 남자랑 통화하고 있지. 아무래도 손이 미끄러져 버튼을 잘못 누른 모양이었다.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댄 선혜가 살짝 느려진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해요. 전화를 잘못 받았어요.”

— 잘못 받았다고요?

어이없음이 가득한 음성이 넘어왔다.

“어…… 네.”

— 됐고. 어딘지나 말해요.

“아니 그걸 태준 씨가 왜.”

“……지현아.”

그때였다. 맞은편에 엎드려 있는 기주가 목소리를 틔워낸 것은. 선혜는 눈만 들어 기주를 쳐다보았다.

“지현아, 안지현, 지현아아!”

쾅! 갑자기 목소리를 확 키워 누군가를 부른 기주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한 번 내리치더니 짐승처럼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사람들의 아니꼬운 시선이 몰려들자 취한 와중에도 선혜가 주변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사과도, 창피함을 견디는 것도 모두 오롯이 선혜의 몫이었다.

포차에는 선혜와 기주 둘뿐이었으니까. 다른 팀원들은 집에 돌아간 지 오래였다.

사정은 이랬다.

아홉 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각. 1차가 겨우 끝났을 무렵이었건만, 술을 물처럼 들이키던 기주는 금방 취해서 널브러졌고, 팀원들은 그런 기주를 난감한 얼굴로 쳐다볼 뿐 챙기려 들지 않았다.

‘난 간다. 일이 있어서.’

희재가 시크하게 말하고 내빼는 것을 시작으로, 민영도 줄행랑을 치듯 근처에 대기 중이던 택시에 후다닥 올라타 멀어졌다.

멍하니 멀어지는 택시 뒤를 눈으로 좇는데 갑자기 턱 하니 품에 기주의 짐이 안겨졌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짐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자 배시시 웃는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선혜 씨, 이런 건 원래 막내 몫이라.’

그 말에 반박하기도 전, 지민은 민영과 마찬가지로 대기 중인 택시에 올라타고는 내빼버렸다.

그렇게 떠안게 되었지. 이 사람을.

택시를 태워서 집에 보내려고 했건만, 2차를 외치며 끌고 가는 그의 손에 붙들려 속절없이 이곳으로 오고 말았다.

그렇게 일 배, 부일 배 술을 들이켜다가 한기주는 저 꼴이 났다.

선혜가 엎드려 중얼중얼 연신 한 사람의 이름을 읊조리는 기주를 쳐다보고 있는 찰나.

— 방금 그거, 한 팀장님 목소리인 것 같은데.

다소 낮아진 목소리로 태준이 물었다.

— 설마, 한 팀장님이랑 둘이 있는 건 아니죠?

감도 좋지. 보지도 않고 목소리만 들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선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태준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 어디예요.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

— 말 안 하면 한 팀장님한테 전화합니다.

선혜는 곤란한 얼굴로 맞은편에 엎드려 뒤척이는 기주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혼자 한 팀장을 집에 보내기는 힘들 것 같고.

그렇다고 태준이 여길 오면 한 팀장이 자신과 태준 사이를 의심―.

“지현아…….”

……아니다. 저 상태로는 기억조차 못 할 것 같긴 하다.

선혜는 조금 안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기 강남 00포차예요.”

— 꼼짝도 하지 말고 거기 있어요. 금방 가니까.

태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선혜는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턱을 괴고 엎드려 있는 기주를 쳐다보았다.

지현이가 누구길래 저렇게 취해서 이름을 부르나.

설마, 그 사모님이라는 분 성함인가.

그게 맞다면 점심때 민영이 한 말이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지민이 감탄하며 했던 말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와. 우리 팀장님 순정남이셨구나. 몰랐네.’

순정남. 순정남이라.

그 말에 태준이 문득 생각이 났다.

“바보.”

뭐가 좋다고 그렇게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쫓아다니는지.

“바보 같아.”

왜 그토록 창창한 나이에 나 같은 애 엄마를.

그냥 더 젊고 예쁜 여자 만나서 연애도 하고 그러지 왜…….

“.......”

그런데 순간, 생각이 뚝 끊어졌다.

다른 여자와 연애하는 태준을 상상하자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탓이었다.

그 예쁜 눈동자로 다른 사람을 눈에 담고 쫓아다니고 귀찮게 구는 그를 상상하자 갑자기 술이 확 당겼다. 선혜는 비어 있는 자신의 잔에 술을 콸콸 따르고 원샷으로 잔을 비웠다.

한 번으로는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서 한 번 더. 그리고 또 한잔을 털어 넣었다. 그렇게 몇 잔을 홀로 자작했을까.

정신이 흐리멍덩해졌다 싶은 그 순간이었다.

탁. 옆에 있는 비닐 벽을 치는 작은 소리에 깜짝 놀라며 선혜가 돌아보았다.

비닐 벽 너머, 태준이 벽에 손끝을 얹은 채 서 있었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기주와 자신을 번갈아 쳐다본다.

눈을 느리게 끔벅이며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곧 벽에서 떨어진 그가 몸을 돌리더니만 포차의 비닐 문을 거칠게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테이블에 다가오더니 옆에 섰다.

회사에서와는 달리 편안한 차림새를 한 그에게서는 담배 냄새 대신 수영장에서 묻혀온 소독약 냄새가 났다.

시원하고 청량한 냄새. 그가 테이블에 한 손을 받치고 허리를 살짝 숙이자 그 냄새가 짙어졌다. 뛰어오기라도 한 것인지 이마에 닿은 머리칼이 땀에 살짝 젖어 있었다.

곧장 달려온 듯한 그 모습을 보는 선혜의 입가에 실없는 미소가 걸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실실거리는 선혜의 얼굴을 보고 있던 태준이 짧게 중얼거렸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흩어진 머리를 정돈해 주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태준은 잠시 선혜의 상태를 살폈다.

뭐 대단한 스킨십도 아니고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빠르게 스스로 합리화를 시킨 태준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잔머리를 쓸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의외로 선혜는 가만히 있었다. 턱을 괸 채 몽롱한 시선으로 태준을 올려다보며 눈을 느리게 깜빡일 뿐. 뿌리치거나 밀어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지현아. 안지현…….”

기주의 중얼거림을 들은 태준이 그를 돌아보며 혀를 짧게 차곤 중얼거렸다.

“왜 남의 형수님 이름을 부르고 난리야, 이 양반은.”

그러다 선혜를 돌아보자 말투가 다정하게 바뀌었다.

“일어설 수 있겠어요? 업어줄까요?”

선혜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테이블을 두 손으로 받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순간 휘청하여 태준이 선혜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하아. 길게 내뱉는 숨결 속에 알코올 향이 가득했다. 괜히 자극되는 느낌에 고개를 튼 태준이 선혜의 짐을 챙기고 선혜를 부축해서 걸어갔다.

선혜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취한 와중에도 홀로 남은 기주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한 팀장님은요?”

기주를 걱정하는 선혜의 모습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

선혜를 조수석에 태우고 벨트까지 매어 준 그가 달래듯 말했다.

“잠깐 여기 있어요. 어디 가지 말고.”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선혜가 고개를 한 번 끄덕거렸다.

*

그런 선혜를 다루는 태도와는 다르게 기주의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는 태준의 태도는 비딱하기 그지없었다. 건성으로 발끝을 들어 기주의 발을 툭툭 치는 얼굴에는 귀찮음이 가득했다.

“지현아…….”

기주는 계속해서 태석의 아내인 지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형인 태석에게 대충 듣기는 했지만, 나이 마흔까지 잊지 못할 정도로 깊은 마음이었나.

마음 같아서는 확 버리고 싶은데 이런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그럴 수가 없었다.

동정심이라기보다는 동질감에 가까운 마음.

한숨을 푹 내쉰 태준이 손을 뻗어 기주의 어깨를 붙들어 흔들었다.

“한 팀장님. 일어나시죠.”

그런데 꼼짝도 하지 않을 것 같던 그가 태준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고개를 들었다. 부스스한 몰골로 한참을 태준을 쳐다보던 기주가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신태석?”

‘뭐래.’

태준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

“일어나셨으면 얼른 집에 들어가세…….”

“야!”

갑자기 기주가 삿대질하더니 소리를 버럭 질렀다. 포차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이목이 쏠리는 그때.

“뭐? 안부를 물어? 네가? 나한테? 와―. 진짜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어?”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는데 기주가 계속해서 소리쳤다.

“다시는, 어? 다시는 우리 회사에 오지 좀 마! 너 왔다 가면 내가 진짜 피가 말라서……!”

형이 회사에? 들은 적이 없는데. 태준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기주가 갑자기 수그러든 태도로 지그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지현이는 잘 사냐?”

태준이 다소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다 말했다.

“네. 아주 잘.”

그리고 지갑을 꺼내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대리든 택시든 불러서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가 기주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쳤다.

“오늘 일은 기억하지 마시고요.”

경고하듯 말한 그가 몸을 돌려 포차를 벗어났다. 기주는 심통 난 얼굴로 태준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그가 건네준 노란 지폐를 힐끔 쳐다보았다.

“에이, 이까짓 돈……!”

그렇게 외치며 잡아서 내동댕이치려던 그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직원을 향해 꼬인 혀로 소리쳤다.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

태준이 차로 돌아왔을 때 선혜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세상 모르게 잠이 들어 있었다.

태준은 시트에 등을 기댄 채로 그런 선혜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집은 어딘지 알려주고 자던가.”

수호한테 연락해 볼까 하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잘 것 같아 마음을 접었다. 일단 깨워보자 싶어 어깨를 잡아 흔들며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무용지물. 반응이라곤 불편한 얼굴로 몸을 뒤척이는 것뿐이다.

난감함도 잠시. 수호를 혼자 두고 회식에 왔을 리는 없으니 애를 돌보는 사람이 누구든 있을 터. 그렇다면 분명 연락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좀 재워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마친 태준은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선혜를 보다가 다가갔다.

조수석 등받이를 단단히 붙들고 레버를 당기며 천천히 내려주었다. 자는데 추울까 싶어 에어컨 바람은 끄고 창문을 살짝 열어주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이는 앞머리를 슬쩍 넘겨주는 손길에는 아까처럼 망설임은 없었다.

“…….”

태준은 선혜를 가까이에서 내려다보았다.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살피던 그의 시선이 입술에 닿았다. 흘러나오는 숨결 사이로 알코올 향이 아스라하게 흩어졌다.

순간 6년 전 키스했던 때가 떠올랐다.

비에 흠뻑 젖는지도 모르고 깊이도 탐했었지. 입술을 비비고 숨결이 섞이던 야릇한 감각이 살아나자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선혜를 보는 태준의 눈빛이 깊어졌다.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들긴 했으나 실행하진 않았다. 그렇게 인내하며 그저 가까이에서 선혜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때였다.

선혜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는가 싶더니 반쯤 올라갔다. 선혜와 눈이 마주친 태준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뒤늦게 자신의 자세를 인지했다. 마치 덮치는 것 같은 모양새.

“저기, 편하게 눕혀주려고 하다 보니…….”

그런데 그때였다.

선혜가 손을 뻗었다. 뺨이라도 때리나 싶어 움찔거리는데 부드러운 손길이 태준의 뺨을 감쌌다.

예상치 못한 선혜의 행동에 태준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그 순간. 다른 손도 뻗어 태준의 양 뺨을 감싼 선혜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쪽.

젖은 머리칼에.

쪽.

이마에.

쪽, 쪽.

양 뺨에.

마지막으로는.

……쪽.

입술에, 선혜의 입술이 닿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태준은 실감하지 못하고 멍해졌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얼떨떨한 얼굴로 선혜를 쳐다보고 있는데.

그런 태준을 보며 선혜가 입술을 늘여 웃었다.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렇게 웃어.

그 얼굴이 태준을 미치게 했다.

결국, 참지 못한 태준이 뺨을 감싼 선혜의 손위에 자신의 한 손을 얹으며 고개를 기울여 다가갔다.

그런데 입술이 겹쳐지려는 때였다.

“언제 이렇게 컸지.”

잠꼬대처럼 운을 틔운 선혜가.

“……우리 수호.”

의미심장한 말로 태준을 우뚝 멈추게 한 것은.

뜨겁게 끓어오르던 피가 순간 차게 식는 느낌이었다.

태준이 잠시 멈칫거리는 사이 선혜는 눈을 감고 다시 스르륵 잠이 들었다. 태준에게 붙들리지 않은 다른 손이 시트 위로 내려앉았다.

천천히 붙든 다른 손을 내려놓는 태준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다시금 잠든 선혜를 내려다보았다.

곧 그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수호?”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그렇게 한참을 선혜를 내려다보고 있는 때였다.

지잉. 선혜의 가방 안에 있는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허리를 든 태준이 선혜의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발신자는 [엄마].

잠시 망설이던 태준이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 ……누구세요?

경계 가득한 경애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아, 네. 저는…….”

태준이 잠시 선혜를 돌아보다 입을 열었다.

“윤선혜 씨 직장 동료 되는 사람입니다. 선혜 씨가 많이 취해서 지금 잠들어 있거든요.”

― 네? 아니 얼마나 취했길래…….

“댁으로 모시고 가려고 하는데 혹시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경애는 잠시 말이 없었다. 경계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말해 주었다.

― 서초동 oo 아파트예요. 정문으로 내가 내려갈게요.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태준은 선혜의 가방에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다시 잠든 선혜를 보던 태준은 곧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하는 그의 얼굴이 다소 심각했다.

조금 전 선혜가 한 말이 계속해서 떠올랐기 때문이다.

‘언제 이렇게 컸지. 우리 수호.’

수호라니.

왜 나랑 걜 헷갈렸지?

피어오른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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