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21화 (21/109)

#21. 알 수 없는

점심시간.

선혜는 민영, 지민과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회사 근처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식당에 다 도착했을 때쯤, 선혜는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태준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저번에 먹었던 얼그레이 케이크 기프티콘이었다. 뜬금없이 이런 걸 왜 보내나 싶어 쳐다보고 있는데 메시지가 왔다.

[오늘따라 피곤해 보이던데 먹고 힘 좀 냅시다.]

잠깐 마주쳤을 뿐인데 알아채다니. 너무 티 냈나. 선혜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슬쩍 쓸다가 답장 없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냉면집이었다.

점심시간을 맞이하여 더위를 달래러 온 손님들로 가게는 북적북적했다. 자리가 있나 곤란해하던 참에 마침 사인용 테이블 하나가 비었다. 셋은 냉큼 그 자리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시작했다.

주문을 마치고 물 한 컵을 뜨던 지민이 문득 말문을 틔워냈다.

“우리 팀장님, 어제 이후로 좀 이상하지 않아요?”

굳이 정확히 시기를 짚자면 신태석 이사가 사준 커피를 먹다 뿜은 직후였다.

싱글싱글 웃으며 능글맞은 농담을 곧잘 하던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답지 않게 묵묵하게 일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간혹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숙이기도 여러 번. 선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기에 지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김 주임 모르나 보다? 우리 팀장님 얘기.”

민영이 놀리듯 한 말에 지민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눈을 빛냈다.

“뭔데요?”

민영도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속삭였다.

“신태석 이사님이랑 우리 한 팀장님 왕년에 여자 하나 두고 삼각관계였다잖아.”

“헐, 대박. 진짜요?”

지민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탄성을 뱉어냈다.

“근데 그 여자가 하필이면 지금 사모님 되시는 분이라 이거지.”

“와, 미치겠다. 한 팀장님 아직 미혼 아니에요?”

지민의 말대로 올해 마흔임에도 불구하고 기주는 아직 총각이었다.

“맞아. 솔직히 팀장님 외모 어디 가서 꿀리는 것도 아니잖아. 능력도 그렇고. 근데 연애도 안 하고 그러는 게 그 여자 못 잊어서 저렇게 독수공방하는 거 아니냐고 그런 말이 도는 모양이더라고. 게다가 한 팀장님 저렇게 답지 않게 굴 때는 신태석 이사님이 레어미디어 방문했을 때뿐이야. 저번에 2차 채용 면접 때도 하루 종일 저 상태였다니까? 듣자 하니 면접 끝나고 둘이 마주쳤다더라고.”

“와. 우리 팀장님 순정남이셨구나. 몰랐네.”

“많이 좋아했나 봐. 듣자 하니 그 사모님이랑 대학도 같이 나왔다고 하던데.”

“설마 그때부터 좋아한 거예요?”

“그럴지도?”

민영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지민이 흥미로운 얼굴로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찰나, 때마침 냉면이 나왔다. 허기를 달래느라 잠시 대화의 흐름이 끊어졌다.

선혜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주가 이상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저렇게 살을 붙여 만든 이야기에는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도 그런 소문들의 피해자였던 적이 간혹 있었기에 민영과 지민의 대화가 그다지 듣기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말없이 냉면만 먹는데 지민이 입을 열었다.

“근데 한 팀장님 저렇게 기분 안 좋다가 갑자기 회식 가자고 하지 않아요?”

“맞아.”

잠시 한숨을 내쉰 민영이 말했다.

“아마도 빠르면 오늘, 늦으면 이번 주 금요일에 말 나올 것 같은데.”

“설마 오늘일까.”

지민이 어색하게 웃으며 한 말에 민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혜는 오늘 날짜를 상기했다. 평일인 화요일인데 설마 회식을 가자고 할까 싶었다.

하지만 모두의 바람과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주가 말했다.

“우리 팀 오늘 오랜만에 회식이나 할까?”

그 말에 다들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여러 사람을, 아주 제대로 잡아 버리고 만 것이다.

*

식당을 여럿 운영하는 경애는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서울 영등포에서 작은 가게로 시작한 경애의 국밥집은 입소문이 나 성황을 이루었다. 그 기세를 몰아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2층으로 확장한 영등포 본점을 비롯하여 서울 시내에 두 개의 분점을 운영하게 되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조금 한산해진 가게를 둘러보던 경애는 핸드폰이 울려 꺼내 들었다. 딸 선혜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어, 선혜야.”

- 엄마, 내가 갑자기 오늘 회식이 잡혔거든. 미안한데 수호 좀 맡아줄 수 있어?

경애가 시원시원한 투로 말했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당연히 되지. 근데 갑자기 웬 회식이야?”

- 팀장님이 갑자기 가자고 하시네.

“이번엔 저번처럼 빼지 말고 오래 놀다 와. 회식도 사회생활의 연장선이라더라. 아무리 애 있는 거 알아도 자꾸 빼면 괜히 뒷말 나올 수도 있어.”

- 응. 오늘은 늦게까지 있을 것 같긴 해.

“그래. 수호는 걱정 말고. 이제 다 커서 혼자 씻더라. 누굴 닮아서 그렇게 야무진지.”

- ……나 닮아서 그렇지, 뭐.

선혜의 다소 뻔뻔한 말에 경애는 피식 웃었다. 부정은 하지 않았다. 수호가 하는 행동은 선혜와 판박이였으니까. 생긴 건 자기 아빠를 꼭 빼다 닮은 것 같긴 하지만…….

생각을 이어가던 와중, 유치원 앞에서 마주쳤던 수호와 닮은 젊은 남자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쳤다.

선혜는 수호에게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지만 수호와 닮아도 너무 닮았기에 미심쩍은 느낌은 쉽사리 떨쳐 지지 않았다.

한번 물어나 볼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 와서 이제 그만 끊어야겠다. 걱정 말고 놀아. 처신 잘하고.”

- 응. 고마워, 엄마.

“고맙긴. 끊는다.”

선혜와 전화를 마치고 경애는 고개를 들었다.

“어서오세요. 몇 분이세요?”

손님을 자리로 안내하는 경애의 얼굴에는 친절한 미소가 만연했다. 직접 주문을 받고 부엌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때였다.

중간에 우뚝 선 경애가 별안간 뒤를 휙 돌아보았다.

뭐지.

‘방금 누가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사장님. 왜 그러세요?”

옆에 다가온 직원 춘희가 물어왔다. 경애는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니. 누가 꼭 쳐다보는 것 같아서.”

“하이고. 우리 사장님 미인이라서 누가 훔쳐본 거 아니에요?”

“별소리를 다 한다.”

기분은 안 나쁜지 피식 웃으며 대꾸한 경애는 부엌으로 다가가 주방 직원에게 주문을 넣었다.

춘희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문가를 힐끔거렸다.

그러다 발견했다.

모퉁이에 서서 경애를 흘끔거리는 남루한 차림새의 남자를.

남자는 춘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을 휙 돌리더니 빠르게 멀어졌다.

춘희는 연장한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소심한 남정네일세.”

*

한편.

“오늘 회식해요?”

경애와 통화를 마친 선혜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태준이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담배 냄새가 은은하게 나는 걸 보아하니 옥상에서 한 대 피우고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웬 회식이에요?”

계단을 내려와 선혜 앞에 선 태준이 물었다.

“그냥 잡혔어요.”

짧게 대꾸한 선혜가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혹시라도 많이 취하게 되면 연락해요. 데리러 갈 테니까.”

선혜가 멈칫하며 태준을 돌아보았다. 태준은 비딱한 선혜의 눈빛을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참, 아까 준 케이크는 잘 먹었어요?”

태준이 보낸 기프티콘을 떠올리며 선혜가 말했다.

“돌려줄 테니까 태준 씨 먹어요.”

“왜요? 혹시 저번에 먹었을 때 입맛에 안 맞았어요?”

선혜는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자기도 모르게 다 먹어 버렸던 게 생각났기 때문에.

대답을 곧바로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태준이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와 다가왔다.

순간, 전에 비상구에서 그가 했던 장난이 떠올라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동시에 우뚝 멈추는 태준의 발걸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태준은 자신을 피하는 선혜의 모습에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본 선혜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때마침 해를 가리는 구름 탓에 비상구에 음영이 짙어졌다. 태준의 얼굴 위로도 음영이 짙게 깔렸다.

“선혜 씨는…….”

씁쓸함을 채 감추지 못한 얼굴로 태준이 물었다.

“내가 싫어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처연하게 물어오는 통에 말문이 막혔다.

‘엄마는 그 아저씨가 싫어?’

그의 얼굴 위로 비슷한 걸 물어 오던 수호의 얼굴이 겹쳐와 더욱이.

그때와 마찬가지로 선혜는 대답하지 못했다.

문득 열린 창문 틈새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코끝에 담배의 스모키한 향이 스쳐갔다.

지난번 회식 때 담배를 비스듬히 물고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담배 냄새 때문에 그래요.”

그 말에 눈을 깜박거리는 태준을 보며 선혜가 말했다.

“담배 냄새…… 싫어하거든요.”

자기가 듣기에도 퍽 변명 같은 말이었다. 뒤늦게 여지를 줬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 변해가는 태준의 얼굴이 그걸 방증했다.

괜히 붙들릴까 싶어 선혜는 도망치듯 몸을 돌려 비상구를 빠져나왔다.

문손잡이를 잡은 채 닫힌 문에 기대어 선 선혜의 입 밖으로 긴 숨이 흘러나왔다.

“하.”

나 뭐 한 거지. 바보같이.

뜨끈해진 이마에 손등을 가만히 대었다.

그러다 비상구 너머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몸을 흠칫 떼어내고 걸어갔다.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서 더욱 발걸음을 재게 놀리는 그때였다.

“선혜 씨.”

저를 부르는 태준의 목소리에 멈춰 섰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선혜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한쪽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태준이 비상구 문 앞에 서서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곧 그가 주머니에서 손을 빼냈다. 손에는 담뱃갑이 들려 있었다. 뭘 하나 싶어 지켜보는데 그가 사정없이 손안에 있는 갑을 우그러뜨렸다. 그리고 보란 듯이 비상구 맞은편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퉁-. 금속성 쓰레기통에 갑이 부딪혀 내는 작은 소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태준이 선혜를 돌아보았다. 희미했던 미소가 환한 웃음으로 바뀐 그때.

해를 가리던 구름이 걷혔는지 창문을 통해 햇살이 환하게 들이치며 태준의 얼굴을 비스듬히 비췄다.

투명하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 하얗게 빛나는 고른 치열.

그 모습을 보는 선혜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휙 돌려 또각또각 걸어갔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보이는 여자 화장실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세면대에 두 손을 받치고 몸을 숙인 채 다소 밭아진 숨을 천천히 몰아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마주 볼 수 있었다.

발갛게 상기된 볼. 여전히, 동요를 머금고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

선혜는 고개 숙여 자신의 모습을 외면했다.

물을 틀었다.

쏴아 쏟아지는 물속에서 괜히 손만 벅벅 씻었다.

손을 적시는 시원한 느낌이 온몸에 퍼진 열기를 식혀줄 때까지.

씻고, 또 씻었다.

.

.

.

퇴근하자마자 디자인팀은 기주의 손에 이끌려 회식 장소로 몰려갔다.

회사 근처에 있는 흔한 고깃집이었다. 내키지 않는 기색을 겨우 숨기며 식당에 당도한 팀원들은 기주가 한우를 사겠다는 말에 태도를 단숨에 바꾸며 환호했다.

“선혜 씨. 오늘도 일찍 들어가야 하나?”

기주가 술을 따라주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눈치는 제법 있는 선혜였기에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오늘은 괜찮을 것 같아요. 엄마가 애를 봐주기로 하셔서.”

“좋다, 좋아! 오늘은 끝까지 달려 보자고! 자, 우리 디자인팀을!”

기주가 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외치자 다 같이 소리쳤다.

“위하여!”

.

.

.

태준은 늦은 시간까지 여는 호텔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금연을 시작하자마자 금단 증상을 보이는 스스로를 달래기 위함이었다.

물에서 나와 선베드에 길게 누운 태준에게 여자들의 시선이 흘끔흘끔 향했다.

섹시한 모노키니를 입은 여자 몇몇이 말을 걸어오기도 했지만 태준은 무시로 일관했다. 선혜의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까칠하고 도도한 이미지였다.

태준은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밭아진 호흡을 고르다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선혜에게 메시지를 몇 개 보내 놨기에 혹시 답이 오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하지만.

[회식 어디로 갔어요?]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요.]

[아직도 마셔요?]

[얼마나 마셨어요?]

여러 번 보낸 메시지에는 단 한 번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읽은 표시만 있을 뿐.

잘생긴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읽었으면 답장이라도 해 주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태준은 마지막이다 하는 마음으로 선혜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어디예요?]

그런데. 지잉, 이번엔 답이 금방 왔다. 믿기지 않는 얼굴로 태준은 선혜가 보낸 답장을 확인했다.

[ahffk]

알 수 없는 알파벳의 조화에 잠시 멍해졌다.

“뭐야, 이게?”

어이없음에 혼잣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무슨 뜻인가 곰곰이 들여다보던 태준은 영어로 적힌 한글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뜻인 즉.

“몰라?”

태준이 해석한 뜻을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중얼거리다가 다시 메시지를 쳤다.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괜찮아요?]

답장이 또 금방 왔다.

[dmd]

이번에는 곧바로 해석했다.

응.

그가 심각한 얼굴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는데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dkscnlgoTdj]

안 취했어.

“이런 미친…….”

안 취하긴 뭐가 안 취해. 씹어뱉듯 중얼거린 태준이 곧장 전화를 걸며 탈의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선혜가 전화를 받기가 무섭게 태준이 물었다.

“어딥니까,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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