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20화 (20/109)

#20.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수호를 유치원에 데려다준 선혜는 곧장 회사로 향했다.

오늘따라 몸이 유난히 쳐지고 힘이 들어 커피 생각이 간절해졌다.

드라이브스루를 들리기엔 시간이 애매하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회사 건물 내에 있는 카페가 생각이 났다.

듣자 하니 직원들 출근 시간에 맞춰 오픈을 한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도 한잔 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선혜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1층 카페로 올라갔다.

카페는 오픈 준비가 한창이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일찍 온 탓에 선혜가 첫 손님이었다. 선혜는 지갑을 꺼내며 카운터로 서둘러 다가갔다. 기척을 느낀 직원 하나가 돌아보았고, 곧 선혜와 눈이 마주쳤다.

“……!”

“……!”

선혜는 놀라 순간 멈춰 서고 말았다. 카운터에 다가오던 고은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서로를 보는 두 사람 사이로 그다지 경쾌하지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커피 주문하시게요?”

매니저가 커피기계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한 말에 선혜가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끄덕인 선혜가 카운터로 다가갔다.

“고은 씨 뭐해, 주문 안 받고?”

고은이 나서지 않고 뒤에 서 있자 매니저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선혜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고은이 마지못해 카운터로 다가와 섰다.

“뭐로 주문하시겠어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친절을 가장한 말투. 그 속에 섞인 가시를 선혜가 모를 리 없었다.

그냥 돌아갈까 하던 선혜는 체념한 얼굴로 카운터에 다가가 섰다. 인제 와서 발걸음 돌리기도 시간이 애매했으니.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이요.”

카드를 내밀고 받는 그 순간의 침묵이 어찌나 불편하던지. 눈치 빠른 매니저가 의아한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지만 잠시뿐. 이내 원두를 갈고 커피를 만드느라 분주해졌다.

곧 선혜는 커피를 받아들고 몸을 돌렸다. 고은의 아니꼬운 시선이 멀어지는 선혜의 뒤를 줄곧 따르고 있었다.

“고은 씨. 저 여자 아는 사람이야?”

매니저가 다가와 물어왔다. 고은은 짓씹던 아랫입술을 놓아주고는 대답했다.

“그냥…… 아는 언니예요.”

*

커피는 썼다. 원래 쓴 법인데 혀끝에 쓴맛이 오랫동안 맴돌았다.

저번에 커피를 산답시고 나섰기 때문에 앞으로 커피 사 오는 담당이 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렇다면 고은을 자주 마주칠 게 뻔했다.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지만, 선혜와 고은의 사이는 몹시도 좋지 않았다.

석주가 고은의 어머니인 예진과 재혼한 때는 선혜가 열 살이 되었을 무렵. 집으로 출근하던 예쁘장한 가정부는 그렇게 선혜의 새어머니가 되었다.

그때 당시 살아계시던 할머니도 손이 야무진 데다 자신에게 살갑게 굴던 예진을 예뻐라 했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재혼이 성사되었다. 두 사람의 재혼으로 선혜와 고은은 의붓 자매로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나 호적상으로 묶인 자매는 늘 사람들 사이에서 비교 대상이 되었다.

그 비교에서 늘 우위가 되는 것은 선혜였다.

집안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은 왜 같은 자매인데 이리도 다르냐고 이야기하곤 했다.

외모부터 시작하여 성격, 미술에 대한 재능의 차이도 그러했다. 모든 면에서 고은은 선혜에게 밀리곤 했는데 그 탓인지 원래도 비딱하던 성격이 더욱 뒤틀렸다.

그 분노는 선혜에게 그대로 노출되곤 했었다. 밖에서는 헛소문을 퍼뜨려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시키고, 안으로는 엄마인 예진과 합세하여 고립시켰다.

말리기는 했으나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아버지인 석주와, 덩달아 선혜를 구박하기 바쁜 할머니의 태도에 고은의 기세는 기고만장해져만 갔다.

노골적인 비아냥과 괴롭힘. 처음부터 상대할 가치가 없어서 무시를 해오곤 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런 고은을 다른 데도 아니고 회사에서 마주치다니.

지독한 우연이다 싶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얘를 하필이면 여기서 마주칠 게 뭐람.

회사생활 하면서 가뜩이나 태준도 신경이 쓰이는 마당에 한 사람 몫이 더 얹어진 셈이었다.

회사, 이대로 다녀도 괜찮을까.

그런 걱정을 하는데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어? 안녕하세요.”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성균이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왔다.

선혜는 인사도 하지 않고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흘끗 시선을 튼 선혜가 고개를 숙이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아침부터 커피 사셨어요?”

성균이 싱글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네.”

“여기 카페 커피 맛있지 않아요? 매니저가 솜씨가 꽤 좋은 것 같더라고요.”

“그런가요.”

“네. 나름 체인점인데 다른 가게는 이런 맛이 안…….”

“에취!”

느닷없이 튀어나온 태준의 재채기 소리가 워낙 커서 성균의 말이 뚝 끊어졌다. 선혜와 성균이 그런 태준을 힐끔거리자 그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아, 제가 감기 기운이 있어서.”

아닌 것 같은데. 선혜는 대번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의심스럽게 그를 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참 거기 핸드드립도 맛있어요. 나중에 꼭…….”

“에취!”

또 재채기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 뒤로는 기침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성균의 목소리가 자꾸 뚝뚝 끊어졌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는 20층에 도착했다.

선혜는 어이없는 표정을 애써 감추고는 둘에게 인사를 건넨 뒤 먼저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성균이 아쉬운 얼굴로 선혜의 뒷모습을 줄곧 쳐다보다가 태준이 먼저 엘리베이터를 나가자 따라나섰다. 성균이 힐끔, 태준을 쳐다보더니 물었다.

“나 감기약 있는데 하나 줄까?”

“아아. 괜찮습니다.”

태준이 사무실 문을 열며 싱긋이 웃었다.

“감기인 줄 알았는데 알레르기였나 봐요.”

“……그래?”

“네.”

대답을 마친 태준은 사무실로 쏙 들어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는 성균을 무시한 채 컴퓨터를 켰다.

그러면서 선혜를 떠올렸다. 아침부터 커피를 잘 찾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녀의 회사생활을 눈여겨본 그가 제일 잘 알았다.

태준은 열린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곧장 보이던 선혜의 얼굴을 떠올렸다. 피곤해 보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 듯했다.

“무슨 일 있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성균이 파티션 너머로 태준을 쳐다보았다. 태준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고은은 계속 실수를 연발했다. 잔을 벌써 두 개나 깼고 주문을 헷갈리기도 했다.

“처음이라 그래?”

매니저가 애써 웃으면서 한 말에 고은은 고개를 깊이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냐. 뭐, 첫날이면 그럴 수도 있지.”

다행히 매니저는 물고 늘어지지 않았지만 아니꼬운 시선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리자고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했지만, 자꾸 선혜의 모습이 떠오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기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선혜가 6년 전 그렇게 파혼하고 집을 나간 뒤 집안은 빠르게 몰락하기 시작했다.

화가 난 재민은 이제 겨우 자리잡고 있던 석주의 병원 간판을 멋대로 내렸다.

계약 파기에 대한 위약금을 재민 측에서 물어주긴 했지만, 갑자기 직장이 없어진 데에 대해 항의를 하는 병원 직원들의 손에 쥐여 주느라 금방 동이 났다.

일자리를 알아보았으나 의료사고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는 바람에 석주를 받아주는 병원은 아무 데도 없었다. 거기에다 파혼에 대한 충격으로 앓아누워있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기까지.

좌절한 석주는 술에만 매진해서 살았고 예진은 그런 석주를 볼 때마다 답답해하며 화를 냈다.

부부싸움이 일상처럼 자리 잡은 지는 오래.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은 결국 경매로 넘어가 푼돈에 팔리고 말았고, 고은의 가족은 그곳에서 쫓겨나듯 나와서 20평도 채 되지 않는 임대 주택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석주와 예진은 이혼 절차를 밟았다. 의사 마누라로 호의호식할 거라고 큰소리치던 예진은 식당에 허드렛일을 하기 위해 나가기 시작했다.

고은은 학자금 대출을 감행하여 겨우 학교를 졸업했지만, 취업이 여의치가 않아 아르바이트만 전전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고은은 선혜를 원망하면서도, 자기의 삶은 선혜보다 나으리라 생각하며 자위하곤 했다.

돈 한 푼 없이 애까지 배고 나간 선혜가 잘살면 뭐 그리 잘살 거라고. 분명 울며불며 잘못했다고 기어들어 올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혜는 돌아오지 않았고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잘 못 지내고 있겠거니,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마주한 선혜는 그동안 상상했던 비루한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보다 훨씬 당당한 사회인이 되어 있었으며 그 빌어먹게 예쁜 외모도 여전했다.

무엇보다 이 회사 직원이라는 말이 피어오르는 열등감에 불을 질렀다.

선혜와 똑같이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고은은 레어미디어 1차 채용 때 서류에서부터 일찌감치 불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이 서른에 이런 대기업을 모기업으로 둔 계열사의 사원이라니.

퍽. 원두 가루를 버리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끓는 속을 다스리려고 심호흡을 하는 때였다. 누군가가 카운터로 다가오는 기척에 고은은 손을 앞치마에 쓱쓱 문질러 닦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주문 하시겠…….”

말을 함과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리던 고은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순간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와― 진짜 잘생겼다.’

카운터 앞에는 엄청난 미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보는 순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연한 빛을 띤 갈색 눈동자를 홀린 듯이 쳐다보고 있는 때였다.

“저기요?”

태준은 자기를 보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고은을 향해 목소리를 틔워냈다. 그러자 고은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 목에 걸린 사원증을 스캔하는 걸 잊지 않았다.

[기획부 주임 신태준]

신태준. 그 이름을 속으로 뇌까리며 고은이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주문하시겠어요?”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생긋이 웃은 고은의 노력이 무색하게, 그녀의 얼굴에는 시선조차 두지 않은 채로 태준은 주문을 시작했다.

커피가 나오는 동안 태준은 오픈형 냉장고 앞에 서서 케이크를 들여다보았다.

저번에 그 케이크는 잘 먹었을까. 이번에도 하나 사 주고 싶은데. 근데 사면 어떻게 전해주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새에 주문하신 커피가 나왔다는 고은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준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카운터로 다가갔고 커피를 챙겼다. 고은이 뜻 모를 미소를 생긋이 지어 보였으나 태준은 본체도 않고 몸을 돌려 멀어졌다.

카페나 식당의 여직원들이 관심을 보이는 일이 꽤 흔했기에 태준은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의 신경은 죄다 선혜에게 쏠려있었기에 다른 사람 신경 쓸 여력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어? 커피 홀더에 적힌 그거 뭐야, 신 주임?”

홀더에 적힌 무언가를 태준이 아닌 형주가 먼저 발견한 것은.

뭔가 싶어 홀더를 쳐다본 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010-XXXX-XXXX.]

홀더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를 봄과 동시에 카페 직원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형주가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

“이야. 누가 이렇게 고단수로 작업을 걸어와?”

“고단수라뇨. 과장님도 참.”

고단수와는 거리가 먼 수작질에 불과했다.

번호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태준은 자리에 앉더니 홀더를 잔에서 빼냈다. 그리고 미련 없이 홀더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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