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19화 (19/109)

#19. 달라진 일상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부터 선혜의 회사생활에는 약간 변화가 생겼다.

금요일 회식 때 선혜가 미혼모라 폭탄선언을 한 일은 얼마 안 가 회사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쫙 퍼져 있었다.

마케팅부와 기획부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 사람들도 모두 선혜가 미혼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더니. 씁쓸하면서도 남자직원들이 귀찮게 구는 일이 적어져 회사생활은 한결 편해졌다.

전과 다른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뒤를 따르긴 했지만 다들 사사로운 건 직접 물어오지 않아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젠 회사 업무도 제법 능숙하게 하는 선혜였다. 표지를 검토하고, 인물화로 구성된 표지에 어울리는 타이포 디자인을 제작해 넣고.

그리고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여 결과물을 도출하고. 하는 일이 전에 프리랜서로 했던 일과 비슷했고 무엇보다 업무량이 현저히 적었다.

밤샘 작업이 없어지고, 불규칙했던 생활 패턴도 규칙적으로 돌아오니 몸도 전보다는 가뿐해졌다. 건강이 나아지는 증거 중 하나로 생리불순이 고쳐졌다.

고질병이던 손목 통증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고. 집에 있어도 작업실에 틀어박혀 수호를 챙길 시간이 없던 전보다 수호를 챙기는 시간도 늘었다. 여러모로 전보다 나아진 일상이었다.

딱, 한 가지만 빼면.

바로 태준.

마주칠 때마다 은근히 아는 척을 하는 게 제법 곤란했다. 아예 모르는 척을 하라는 말에 싫다고 대꾸하더니만 언행일치가 확실했다. 평일뿐만 아니라 주말에도 수영장 앞에서 간간이 마주치곤 해서 더욱 그러했다.

태준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상의 일부분이었다.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또 가끔은 귀찮기도 하고 그랬다.

게다가 요즘은…….

선혜는 휴게실 정수기에서 물을 뜨다가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태준이 창가에 기대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요즘 들어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 게 잦아졌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도 뭐해서 선혜는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다.

휴게실에는 선혜와 태준을 비롯하여 기획부 직원 두어 명이 모인 무리가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감을 확인한 기획부 무리가 휴게실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태준이 창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어내고 선혜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정수기에 손을 올려놓고 기대어 서서 선혜를 보며 물었다.

“요즘 관리라도 받아요?”

뜬금없는 물음에 선혜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요새 왜 그렇게 예뻐집니까?”

칭찬인지 타박인지 모를 말이 귓가에 확 박혀 들었다.

듣는 사람이 다 민망할 정도로 진지한 얼굴에 선혜는 당황한 기색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머리, 진짜 풀면 안 돼요? 화장을 좀 옅게 하든가.”

“신태준 씨가 뭔데 이래라저래라 예요?”

툴툴대며 하는 말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선혜가 저도 모르게 쏘아붙였다.

태준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로 선혜를 보고 있었다.

생활 패턴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며 가장 먼저 변화된 건 피부였다. 올해 서른이라는 여자가 피부가 뭐 이리 좋은지.

머릿결도 찰랑거리고 눈동자도 전보다 더 총명해 보였다. 전체적으로 도는 생기가 미모에 한 몫을 더하고 있었다.

자기 눈에만 예쁘면 상관없는데 문제는 다른 사람 눈에도 예뻐 보인다는 사실이다.

선혜가 애 엄마라는 소문이 쫙 퍼지면서 남자직원들이 그녀와 거리를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예외인 사람들은 더욱 안달이 나 있었다. 이를테면 임성균 대리 같은 사람들이.

안 그래도 예쁜데 왜 더 예뻐지고 난리인지.

그나저나, 여자들이 갑자기 예뻐지면 이유는 단 하나라고 하던데.

설마.

한참 동안 선혜를 쳐다보던 태준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혹시…… 연애해요?”

기가 막혀서.

“이봐요.”

선혜의 얼굴에 떠오른 강력한 부정의 뜻을 읽은 태준의 얼굴에 금세 미소가 떠올랐다.

“아님 됐고.”

정수기에서 팔을 거둔 그가 이내 선혜의 옆을 지나가더니 휴게실을 나갔다. 선혜는 어이없는 얼굴로 닫힌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분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태준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

점심을 먹고 막 오후 업무가 시작된 시간대였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기지개를 켠 한기주가 혼잣말을 다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 커피가 먹고 싶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투덜이 김지민이 또 시작이라는 얼굴로 기주를 흘겨보고, 민영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희재는 관심도 없는 얼굴이었고.

이제 팀원들의 성향도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지민이 나서기 전에 선혜가 기주를 향해 물었다.

“커피 사 올까요? 팀장님?”

“어우. 그럼 완전 땡큐지.”

“다른 분들은요? 혹시 커피 필요하신 분 없으세요?”

선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묻자 희재는 고개를 저었고 지민과 민영은 차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라떼를 시켰다.

“팀장님은 아메리카노에 헤이즐 시럽 추가 맞으시죠?”

기주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선혜를 향해 검지를 척하니 내밀었다.

“그렇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선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주가 허공을 향해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를 받아든 선혜는 이내 사무실을 나섰다.

*

레어미디어 1층에는 브랜드 카페 매장이 하나 입점해 있었다. 카페는 회사원들의 아침을 깨워주고 식곤증을 달래주는 역할을 아주 톡톡히 하고 있었다.

한창 손님들이 몰렸던 점심시간 대가 지나가자 카페는 텅 비어 있었다. 직원들이 잠시 휴식 겸 커피기계를 청소하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선혜가 계산대로 다가가자 커피기계를 정리하던 직원 하나가 다가왔다.

“주문, 하시겠어요?”

선혜는 팀원들이 한 주문에 자신이 마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추가했다.

주문을 마치고 계산을 위해 카드를 막 내미는 그때였다.

묵직한 스킨 향이 예고도 없이 훅 찾아들었다.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 하나가 그녀의 옆에 다가와 서더니 커다란 손으로 카드를 한 장 내밀었다.

누가 대놓고 새치기를 하나 싶어 돌아본 선혜는 옆에 서 있는 인물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까 그 주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추가해서 이걸로 계산하죠.”

비서를 대동하여 서 있는 이.

태석이었다.

*

음료가 나오는 동안. 선혜와 태석은 근처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혹시 다른 직원들이 카페에 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점심시간이 끝나고 막 업무가 시작된 시간대라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던 선혜는 맞은편 앉아 비서가 떠온 물을 마시고 있는 태석을 무심결에 쳐다보았다.

태석은 눈동자 색이 태준보다 조금 어두울 뿐 전체적으로 태준과 많이 닮은 인상이었다. 다만 나이가 있다 보니 조금 중후한 느낌을 풍겼다. 태준의 십 년 뒤를 미리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자기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눈이 마주쳤다. 선혜는 서둘러 시선을 내렸다.

그런 선혜를 보고 있던 태석이 물잔을 내려놓고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회사 다닌 지 얼마나 됐죠? 한 달?”

“한 달 조금 안 됐습니다.”

“일은 할 만하고요?”

“네. 그럭저럭.”

“애 키우려고 들어왔다고 했는데. 프리랜서 할 때보다 확실히 낫던가요?”

“네.”

자잘한 대화가 오고 가는 동안 태석은 선혜를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선혜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을 파악하려는 눈빛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상대는 본사 대표이사다. 표정 관리와 행동거지에 조심을 기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때였다.

“회사에서 집적거리는 남자직원, 없습니까?”

순간 머릿속에 태준의 얼굴이 스쳤다. 그와 닮은 태석이 꽤 비슷한 투로 저렇게 물어오니 말문이 순간 막혀버리고 말았다.

“아뇨. 딱히.”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대답했지만, 태석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혹시라도 누가 곤란하게 만들면 얘기해요. 사내 분위기 흐리는 건 나도 원치 않거든.”

농담인지 진담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혹시 태준과 자기 일을 알고 있나? 하지만 그렇게 따지기에는 우연한 만남이었고 다소 모호한 감이 있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불안하여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단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말을 마치고 집요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음료는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초조한 얼굴로 무릎 위에 놓인 손끝을 만지작거리는데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하는 직원의 경쾌한 목소리가 구세주처럼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선혜는 빠른 손놀림으로 커피를 캐리어에 담았다. 그리고 비서가 갖다 준 커피를 여유로운 작태로 마시는 태석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커피 감사합니다. 이사님.”

“그래요. 아, 한 팀장한테 안부 전해주고.”

선혜는 한 번 더 고개 숙인 뒤 빠르게 멀어졌다.

*

태석은 카운터 난간에 기대어 서서 선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사에 집적거리는 남자직원, 없습니까?’

그렇게 질문했을 때 선혜의 표정을 떠올린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자존심도 없나.”

얼마나 귀찮게 굴었으면 그런 표정을 다 짓는지.

쯧. 혀를 짧게 찬 그가 이내 몸을 돌려 카페를 나섰다. 출구 쪽으로 향하는 그의 뒤로 따라붙은 비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동생분 뵙고 가시는 거 아니셨습니까?”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태석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턱을 가만히 쓸었다. 이윽고 손을 내려놓은 그가 비서를 향해 말했다.

“김 비서. 시간 날 때 저 여자에 대해 좀 알아봐봐.”

“예?”

그 지시에 김 비서는 잔뜩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태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여 말했다.

“급할 것 없으니까 천천히.”

직접 만나본 느낌이 나쁘진 않았지만, 알아봐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생이 푹 빠진 여자이니.

그나저나―.

“고생 좀 하겠어.”

경계도 많이 하는 것 같고, 게다가 아까 질문을 던진 순간 지어 보인 귀찮아 죽겠다는 그 표정이란.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 태석은 곧 레이미디어 건물을 나섰다.

*

“윤선혜 씨. 혹시 자기 카드로 커피 샀어?”

결제 문자가 오지 않은 탓에 기주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기주에게 커피를 건네던 선혜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럼?”

기주가 커피를 입에 기울이며 물었고 선혜는 대답했다.

“신태석 이사님께서…….”

“푸흡!”

순간 기주가 마시던 커피를 뿜어버리고 말았다. 사레가 들려 콜록거리는 그에게 선혜가 놀란 얼굴로 티슈를 건네주었다.

얼굴이 시뻘게져서 기침을 쏟아 내는 기주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민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사님이 자기한테 왜?”

곤란할 뻔한 질문이었는데 선혜는 태석이 했던 말을 상기하고는 대답했다.

“한 팀장님께 안부 전해 달라고…….”

“콜록!”

기주가 그 말에 더욱 거세게 기침을 쏟아 냈다. 기주의 속내를 모르는 민영과 지민은 왜 저러냐는 얼굴로 기주를 쳐다보았고, 희재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얼굴로 기주를 힐끔 쳐다보고 제 할 일만 했다.

“물 좀 갖다 드릴까요?”

선혜가 넌지시 물었지만, 기주가 빨리 가라는 뜻으로 손을 휘둘렀다. 선혜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기주를 보다가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기주의 잔기침 소리는 잊을 만할 때마다 사무실에 계속 울리고 있었다.

*

한편, 1층 카페.

“근데 그 사람 본사 이사님 아니에요?”

카페 직원들이 아까 본 장면을 두고 조잘조잘 떠들고 있었다.

“맞아. 신현철 회장님 아들, 신태석 이사.”

“어쩜. 올해 마흔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잘생겼지?”

“유전 어디 가겠니? 김시연 사모님 왕년에 미스코리아 출신에, 여동생은 연예인, 그리고 남동생도 그렇게 잘생겼는데 형이라고 다르겠어?”

“하긴.”

다들 재밌다는 얼굴로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직원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왜 갑자기 그 여직원 붙들고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갔을까요?”

사실 저마다 일을 하는 척하면서 태석과 선혜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직원들이었다.

엿들은 대화로 미루어 봤을 때, 태석이 선혜에게 유난히 신경 쓰는 티가 났다.

본사 대표이사가 계열사에 속한 신입 여직원의 회사생활을 신경 써 주다니.

게다가 마지막은 불순한 생각을 절로 일으키게 하는 대화 내용이었다.

집적거리는 남자 없냐느니, 있으면 말하라느니.

팔짱을 낀 카페 매니저가 “혹시…….” 하고 막 운을 틔우는 때였다.

“저기.”

대화에 너무 집중하느라 카운터에 누가 오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다들 벌떡 일어났다. 매니저가 카운터로 다가가며 앞에 서 있는 젊은 여자에게 물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아뇨. 저 면접 보러 왔는데요.”

“면접? 아, 혹시 어제 연락 줬던 아르바이트생이에요?”

아르바이트생이라는 말에 여자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쪽으로 오세요.”

매니저가 카페 테이블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여자가 자리에 앉았다.

매니저가 맞은편에 앉자 준비해 둔 이력서를 꺼내 내밀었다. 매니저는 심상한 눈으로 이력서를 훑어 내렸다.

아르바이트생치고는 나이가 제법 많았다.

스물여덟.

다소 음울해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힐끔거린 매니저가 아르바이트 경력을 눈여겨보았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전전한 이력이 눈에 띄었다.

카페에서 일한 경력이 지금까지 면접 보러 온 여느 아르바이트생보다 많았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쌓은 사회경험도 있을 테고, 연륜에서 비롯된 눈치나 센스도 기대할 수 있을 터. 가장 쓸만한 인재다 싶었다.

“혹시 내일부터 나올 수 있을까요?”

매니저의 말에 여자의 얼굴이 단번에 환해졌다.

“네. 가능해요.”

“그럼 내일부터 나와요. 아침 일곱 시 반까지 오면 돼요.”

여자는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매니저가 이력서에 적힌 이름을 흘끔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잘 부탁해요, 윤고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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