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18화 (18/109)
  • #18. 왜 하필이면

    가회동 본가에는 태준의 식구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현성 출판사의 회장인 신현철 회장 내외를 중심으로 태석 부부와 그의 두 아들인 유한과 다한, 그리고 태연과 세빈이 부엌의 커다란 테이블에 한데 모여 있었다.

    “장 서방은 또 출장이야?”

    현철이 태연에게 묻자 태연이 세빈에게 밥을 먹이며 대답했다.

    “네. 요새 아이돌 팀 하나가 잘 나가잖아요. 해외 투어 콘서트 따라다니느라 바쁜가 봐요.”

    태연의 남편 장하산은 태연이 있는 A 엔터테인먼트 기획사 대표였다.

    “그렇게 쫓아다녀 결혼해 놓고, 마누라를 맨날 혼자 둬.”

    시연이 입을 내밀고 툴툴거리자 그녀의 밥그릇 위에 반찬을 집어 올려주며 현철이 말했다.

    “바쁜 걸 어쩌겠어.”

    “하긴. 당신이 제일 잘 알겠지. 어지간히 바쁘셨어야죠.”

    왕년에 한참 바빠 아내를 혼자 둔 적이 많은 현철이었다.

    “나 참. 하여간 뒤끝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현철은 시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슬쩍 시연이 좋아하는 반찬을 수저 위에 올려주기도 했다. 작은 애교랄까.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태석이 농담을 던졌다.

    “하여간 두 분 금실 좋은 건 알아드려야 한다니까. 이번에 태준이 동생 생기는 건 아니죠?”

    “엄마 지금 갱년기인데. 누구 놀리니?”

    시연의 대꾸에 태석이 웃음을 터트리다가 옆에 앉은 지현이 슬며시 팔뚝을 꼬집자 그녀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시연의 눈치를 보는 현철이나, 지현의 눈치를 보는 태석이나. 하여간 신 씨 남자들 팔불출인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태연은 그렇게 생각하다 힐끔 시계를 보았다.

    “근데 태준이는 많이 늦는대?”

    태연이 태석에게 묻는 순간이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태준이 부엌으로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들어왔다. 스포츠 센터에서 막 온 터라 모인 사람 중에 가장 편안한 차림새였다.

    “외삼촌!”

    애교쟁이 세빈이 와다다 달려가서 안기자 태준이 가볍게 안아 들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세빈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말했다.

    “수영장 냄새나.”

    “하여간. 얘가 누나 닮아서 개 코라니까, 개 코.”

    태준이 씩 웃으며 세빈을 자리에 내려주었다. 유한과 다한 형제와는 가볍게 손 인사를 주고받았고, 오랜만에 보는 형수 지현과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지현이 태준에게 물었다.

    “도련님, 회사생활은 좀 할 만하세요?”

    “네.”

    그렇게 말하는 태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눈치 빠른 태석이 그 변화를 눈에 담으며 물었다.

    “회사에 재밌는 일이라도 생겼나 보다? 회사 얘기하면서 웃는 걸 보니.”

    “그런 거 없거든.”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태준은 조금 전 선혜와의 만남이 떠올라 싱글거리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회사에서 만나는 여자라도 생긴 게야?”

    현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묻는 말에 태준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려있었다. 거짓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표정 관리도 실패한 마당에 계속 부정하면 자신 몰래 뒷조사를 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어머니 시연과 누나 태연은.

    “아직 만나는 건 아니고, 제가 꼬시려고 무던히도 노력 중입니다.”

    모두 그 말에 눈을 빛냈다. 가장 관심을 보이는 건 누나인 태연과 엄마인 시연이었다.

    “괜히 본답시고 회사 찾아오고 하지 마세요. 그럼 화냅니다, 저.”

    정말 찾아오려고 했던 모양인지 시연이 시무룩한 얼굴로 태준의 눈치를 보며 반찬을 뒤적거렸다.

    “제 형 전철을 그대로 밟는구먼.”

    현철이 허허 웃으며 하는 말에 지현이 민망한 얼굴로 웃으며 태석을 보았다. 그런데 태석은 밥을 느리게 씹으며 태준을 훑어내리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태석의 반응에 지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시연이 슬쩍 태준을 보더니 물었다.

    “같은 부서 사람이야?”

    “나중에 만나게 되면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하도 철벽이라 내가 좀 애를 먹어서.”

    태준은 적절한 곳에서 화제를 끊었다.

    “여자를 하도 안 만나서 난 저놈 남자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아니에요, 아버지. 태준이 여자 좋아해요.”

    현철의 말에 태석이 대꾸하며 슬쩍 태준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로 무언의 눈짓이 오갔다. 6년 전 그때 일은 지금까지 두 사람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쁘냐?”

    현철이 툭 던지듯 한 질문에 태준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네. 엄청요.”

    현철이 그 말에 웃음을 크게 터뜨리고 시연과 태연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태준을 보았다.

    그리고 태석은.

    “…….”

    물을 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고 태준을 보고 있었다. 지현은 그런 태석을 보고 있었고.

    부부는 일심동체. 지현은 태석의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짚이는 바가 있다는 뜻이었다.

    *

    점심 식사를 마친 뒤에는 간단한 티 타임이 이어졌다.

    시연과 태연 그리고 지현은 베란다에 마련된 작은 티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고 세빈과 유한, 다한 형제는 넓은 마당에서 햇살을 받으며 뛰어놀고 있었다. 현철은 오랜만에 만난 손주들과 열심히 놀아주고 있었다.

    “저러다 또 허리 다치는 거 아닌지 몰라.”

    다한과 세빈을 차례로 업어주고 목말을 태워 주는 현철을 보며 시연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태연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우리 아버지 허리 튼튼한 건 엄마가 제일 잘 알지 않나?”

    다소 짓궂은 음담패설에 시연이 얼굴을 붉히며, ‘얘는’하고 손짓했다.

    시연과 현철은 육십이 훌쩍 넘은 지금도 남다른 금실을 자랑하는 부부였다. 큰아들인 태석과 열두 살 차이인 막내 태준이 태어났을 때 또 그 아래 동생이 생기는 게 아니냐며 주위 사람들이 농담 삼아 말하곤 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태준이 걔가 좋아한다는 여자는 대체 누구라니?”

    “난들 아나. 내가 같이 회사 다니는 것도 아닌데.”

    태연이 어깨를 으쓱하고 지현은 조용히 웃었다. 그러면서 태석과 태준이 올라간 이 층 계단을 힐끔 쳐다보았다.

    “지현이 너 친구 중에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 없어?”

    한 명 있긴 했지만, 지현은 입을 다물었다. 기주와는 결혼한 뒤로 자연히 연락이 끊어졌기에 이런 거로 연락하기도 뭐 했다. 더군다나 태석이 싫어할 테다.

    “네.”

    시연이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는 걸 보며 지현은 케이크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

    *

    한편, 태준은 태석이 업무 관련 이야기를 하자고 하여 서재에 있었다. 서재 소파에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아 둘만의 티 타임을 가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때였다.

    “네가 좋아한다는 여자 말이야.”

    찻잔을 내려놓으며 태석이 화제를 돌렸다. 태준이 눈만 들어 태석을 보았다.

    “앤틱이냐? 윤선혜 씨?”

    눈을 휘둥그렇게 뜬 태준의 반응을 본 태석이 알 만하다는 듯이 웃으며 등을 느긋하게 뒤로 기댔다.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시선을 위로 들어 올리고 있던 태석이 앞을 바라보았다.

    “너, 그 여자 애 엄마인 건 알고 있는 거야?”

    “어.”

    태준이 순순히 긍정하자 태석의 표정이 안 좋게 변했다.

    “애 엄마한테 대시를 한다고? 뭐, 결혼이라도 하게?”

    “왜. 그럼 안 돼?”

    장난이 섞이지 않은 태준의 눈동자에 태석의 표정이 굳었다.

    “다른 여자도 아니고 애 엄마? 어머니랑 아버지 아시면 난리 날 거 알고 하는 소리지, 너?”

    조금은 뼈아픈 말이었다. 태준은 입을 꾹 다물고 태석을 노려보았다. 태석은 고개를 기울인 채 다소 엄한 얼굴로 태준을 보다가 혀를 짧게 차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괜히 뽑았나.”

    회사를 제법 시끄럽게 할 거라고 생각은 했다만 하필이면 제 동생의 마음을 앗아가다니.

    쯧. 태석은 다시 한번 혀를 찼다. 인사이동이라도 시켜야 하나. 그냥 다른 파트 디자인 팀으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는 때였다.

    “형. 그 여자, 그 여자야.”

    “무슨 소리야?”

    뜬금없는 태준의 말에 태석이 물었다.

    “6년 전에 기억나지. 내가 찾아달라고 했던 사람.”

    태석의 눈이 점점 커졌다. 태준이 그 표정을 보더니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 여자가 윤선혜 씨야, 형.”

    실실 웃던 아까와는 다르게 태준이 정색하며 말했다.

    “이제 겨우 찾았는데.”

    태준이 찻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방해할 생각 마.”

    올곧은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

    집으로 가는 길. 태석이 모는 차 안은 제법 조용했다. 아까 현철이 거하게 놀아줬는지 유한과 다한 모두 차에 타자마자 곤히 잠들어 있었다. 지현이 그런 둘을 보고 뿌듯하게 웃다가 태석을 힐끔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왜 그래?”

    “뭐가?”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고 있던 태석이 앞을 바라본 채 대꾸했다.

    “아까부터 자기 표정 엄청 심각한 거 알아?”

    “그래?”

    “응. 도련님이랑 무슨 얘기를 했길래 그래?”

    “회사 잘 다니고 있는지 그런 얘기 했지, 뭐.”

    “도련님 좋다는 여자 이야기도 했겠네?”

    아까 시연과 태연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지현도 궁금해하던 참이다.

    태준과 매우 친하진 않지만 그래도 그의 성격을 모르진 않았다. 겉으로는 젠틀해 보여도 여자를 대할 때는 제법 까칠한 성미를.

    무엇보다 자신에게 들러붙는 여자들을 꽤 귀찮아하곤 했는데. 그런 태준이 좋아하는 여자라니. 게다가 아까 그 표정은 완전히 빠진 얼굴이었다.

    “누구래?”

    “…….”

    태석이 대답하지 않자 지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기도 아는 사람이야?”

    “……너는 내 표정만 봐도 다 알아?”

    “그럼. 안 지가 몇 년인데. 우리 전에 같이 일할 때 그렇게 싸우면서도 척하면 척이었던 거, 기억 안 나?”

    지현의 말에 태석이 옛 추억을 떠올리곤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누군데?”

    태석이 말해주지 않자 지현이 농담 삼아 말했다.

    “말 안 하면 기주 오빠한테 전화해서 물어본다.?”

    꽤 먹힐 법한 협박이었다. 입사 동기이자 지현과 꽤 친하게 지냈던 현 디자인팀 팀장 한기주는 한때 태석의 경계대상 1호였으니까.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태석은 곤란한 얼굴로 힐끔 지현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기주를 들먹임에도 그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지현의 얼굴이 제법 심각해졌다. 지현이 더는 캐묻지 못하고 입을 다무는데 태석이 별안간 쓰게 웃었다.

    왜 하필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애 딸린 미혼모를.

    선혜가 직원으로서 마음에 든 것과는 별개인 문제였다.

    열 살 넘는 나이 차 탓에 기저귀도 갈아주고 마치 아들처럼 업어 키운 태준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속상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6년 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의 인연이 범상치 않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태석은 핸들을 힘주어 고쳐잡았다.

    아무래도 만나봐야겠다.

    어떤 여잔지 알아봐야겠어. 운전하는 태석의 얼굴에 비장함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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