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강아지 같아
수호는 탈의실에서 사물함을 등진 채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꽤 필사적으로 둔부를 노출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왼쪽 엉덩이에 있는 커다란 반점을 친구들에게 숨기기 위함이었다. 보면 놀릴 게 뻔했으니까.
샤워를 할 때도 꼭 수영복을 입고 씻곤 했다. 놀림 받는 걸 미연에 방지하고자 몸에 익은 버릇이었다. 수호가 수영복 바지를 재빨리 추켜 올리고 그제야 사물함으로 몸을 돌려 수모와 수경을 챙기는 때였다.
샤워실 문이 열리더니만 태준이 안에서 나왔다.
“어? 아저씨.”
수호가 태준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다가갔다. 수호를 발견한 태준이 미안한 얼굴로 웃었다. 수호가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벌써 집에 가는 거예요?”
“응.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본가에서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수호가 시무룩해지자 태준이 수호의 머리칼을 살짝 헝클이며 말했다.
“문자 보내려다가 너희 엄마 보면 싫어하실까 봐 연락 미리 못했다. 미안.”
수호는 미안하다는 말에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엄마, 많이 화나셨어?”
태준이 조심스럽게 묻자 수호가 어제 본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차창 밖으로 아저씨를 바라보던 엄마의 얼굴. 그 위로 드리워진 표정은 화가 난 거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뇨. 그래 보이진 않았어요.”
“그래?”
그래도 다시 정식으로 사과는 해야겠지. 어찌 됐든 선혜의 의도를 알면서도 몰래 먹인 제 잘못이 컸으니까. 근데 언제 사과하지. 회사에서는 말도 못 걸게 하는데.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때였다. “윤수호, 가자!” 하고 수호를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덧 시간이 수영 강습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 다음에 오늘 못한 만큼 가르쳐 줄게.”
다소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던 수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태준이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수호의 머리칼을 놓아주고 수호의 옆을 지나갔다.
수호는 아쉬운 눈으로 태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무언가를 발견한 수호의 눈이 커다래졌다.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수건 위로 무언가가 보인 탓이다.
오백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더 큰, 검푸른 반점 하나.
태준이 버릇처럼 수건을 끌어 올려 금세 가려졌지만, 수호의 눈동자에는 똑똑히 맺혔다.
수호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왼쪽 엉덩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태준과 똑같은 모양새로 수영복 왼쪽 춤을 추켜올리며 중얼거렸다.
“아저씨도 저게 있네.”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져 태준이 돌아선 모퉁이를 오래도록 바라보는 수호였다.
*
한편 선혜는 수호를 수영장에 데려다주고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푸석한 얼굴이었다.
레어미디어 전속 작가가 의뢰한 타이포 제안서가 제법 까다로워 어제 밤새 매달려도 답이 도통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집에 있다가 잠이라도 들면 어제처럼 수호를 늦게 데리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혜는 집으로 가는 대신 카페를 택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오전 시간대임에도 카페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선혜는 콘센트가 장착된 창가의 기다란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태블릿 PC와 태블릿 전용 펜슬을 꺼냈다.
허공에 손을 가볍게 턴 선혜는 펜슬을 야무지게 잡고 작업을 시작했다. 빠른 손놀림이 태블릿 위로 휙휙 지나가고 선이 그려졌다 지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
한편. 수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태준의 입 밖으로 자꾸만 하품이 새어 나왔다.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만연했다.
전날 밤, 선혜의 화를 어떻게 풀어주나 고민하느라 밤을 새우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커피라도 한잔해야 하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태준은 다시금 하품이 새어 나오자 결심을 굳히고 카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의 눈에 사거리에 있는 대형 외국계 브랜드 카페가 들어왔다.
드라이브스루(Drive thru)를 이용할까 싶어 차선을 바꾸고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때였다.
무심결에 카페를 돌아본 태준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창가에 앉아 있는 선혜를 발견한 탓이다. 꽤 거리가 멀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신호를 응시하던 태준은 잠깐의 고민 끝에 핸들을 돌려 카페 입구로 들어섰다. 드라이브스루 라인이 아니라 주차장에 차를 주차 시킨 그는 긴장 어린 얼굴로 사이드 브레이크를 넣고는 숨을 몰아쉬다가 차에서 내렸다.
문을 열고 카페로 들어서자 “어서 오십시오―.”하는 경쾌한 직원의 목소리가 반겼다. 태준은 카운터로 가는 대신 옆으로 몸을 틀어 창가에 앉아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선혜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옆자리에 빈자리가 없어서 난감해 하는데, 때마침 선혜의 왼쪽 자리에 앉은 사람이 짐을 정리하는 게 보였다. 태준은 바짝 다가가 서 있다가 앉은 사람이 짐을 빼기가 무섭게 자신의 가방을 올려놓았다.
선혜는 하는 일에 집중하느라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바뀌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태준은 커피만 있는 선혜의 쟁반을 힐끔 보더니 카운터로 다가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랑요.”
태준이 카운터 옆 오픈형 냉장실에 진열된 케이크와 포장된 디저트를 난감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여직원에게 물었다.
“여기서 제일 잘 나가는 케이크 하나만 챙겨 주세요.”
다소 추상적인 주문에 곤란해 하던 여직원은 이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포장이신가요?”
직원이 물었고 태준은 대답했다.
“아뇨. 먹고 갈 겁니다.”
*
직원이 내어준 커피와 디저트가 담긴 쟁반을 들고 태준은 조심스럽게 선혜의 옆자리로 다가왔다.
소리 나지 않게 쟁반을 내려놓고 의자를 조심스레 바짝 책상으로 끌어다 앉았다. 선혜는 옆에 누가 앉는 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뭐에 이렇게 몰두하고 있나 싶어 쳐다본 태준은 태블릿 PC에 떠오른 타이포 이미지를 보고 눈을 깜박였다.
감탄을 머금고 입이 반쯤 벌어졌다. 디자인의 디귿도 모르는 태준이지만 선혜의 솜씨가 범상치 않다는 건 알아챌 수 있었다.
빠른 손놀림이 태블릿 PC 위를 쉼 없이 움직이며 이미지를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대충 휘갈기는 것 같은데 펜 끝에서 나오는 이미지는 곧바로 지워지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태준은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고 선혜를 쳐다보았다. 일에 집중하고 있는 그 얼굴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살짝 좁힌 미간, 앞니에 살짝살짝 깨물리는 입술. 고민하는 얼굴로 턱을 괴고 숨을 크게 몰아쉬는 모습까지 태준은 빼놓지 않고 눈에 담았다. 시선이 꽤 노골적일 법한데도 선혜는 눈치채지 못하고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쳐다봐도 모르네.’
태준은 소리 없이 웃으며 선혜와 똑같은 모양새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일에 집중하는 선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언제쯤 돌아봐 줄까. 기다리면 언젠가 돌아봐 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 안에서 녹은 얼음이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커피 향이 가득한 카페 안. 선혜를 바라보는 태준의 눈동자는 미소를 머금고 따듯하게 빛나고 있었다.
*
선혜가 태준의 존재를 눈치챈 건 그로부터 이십 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왼쪽에 놓인 커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마시려고 입가에 가져가는데 뭔가 이상하다 싶어 멈칫했다.
“……?”
분명 한 잔을 다 먹어가던 참이었는데 잔이 새로 채워져 있었다. 컵도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선혜가 의아함에 미간을 찌푸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옆에 태준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선혜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에게 태준이 말했다.
“여기 회사 사람들 없으니까 안심해요. 지금까지 한 명도 못 봤어요.”
그래도 어디선가 보는 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지는데 뒤늦게 그의 앞에 놓인 자신의 커피잔이 눈에 들어왔다. 선혜가 꺼림칙한 눈으로 손에 든 잔을 내려놓자 태준이 말했다.
“그거 마셔도 돼요. 손도 안 댄 거라서.”
다 마셨는데도 커피를 더 마실 것 같은 느낌에 슬그머니 잔을 바꿨었다.
약속 시각도 다 되어가고 있었고 아무래도 아는 척을 하기엔 글렀다 싶어 쪽지라도 남겨놓고 갈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니까 기뻤다. 물론 자기만 그렇고 선혜는 그렇지 않은 눈치였지만.
태준은 씁쓸한 속내를 감추고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선혜 쪽으로 밀었다.
“이것도 먹어요.”
“이걸 왜 줘요?”
케이크를 쳐다보던 선혜가 고개를 들고 그를 향해 물었다.
“어제 내가 너무 경솔하게 행동해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어제에 이어서 한 번 더 건네어지는 사과.
“그 말 하려고 기다린 거예요?”
반쯤 녹은 얼음을 보니 제법 오래 기다린 것 같아 물었다.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서 지나가다 보고 들렀는데 일에 너무 집중하고 있길래.”
태준은 말을 마치고 선혜의 표정을 살폈다.
무표정한 얼굴이 담담한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도통 가늠이 되지 않아 태준이 눈치를 보는데 선혜가 입을 열었다.
“수호한테 들었어요. 수호가 먹고 싶어 해서 준거라면서요.”
“아, 네. 뭐…… 그랬죠.”
선혜는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태준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됐어요.”
오히려.
“수호 챙겨 줘서 고마워요.”
수영장에 홀로 남아 외로이 자신을 기다릴 뻔한 수호의 옆을 지켜 준 사람이니 고맙다고 인사하는 게 맞았다. 그땐 경황이 없어 화만 냈기에 뒤늦게 건네는 인사였다.
선혜의 말에 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얼굴을 마주하기가 머쓱해 선혜는 하던 일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태준은 일하는 선혜의 모습을 보다가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하자 꺼내 들었다. 태석이 어디냐고 보낸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겠다 싶어 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준이 막 선혜에게 인사를 건네려는 때였다.
“잘 가요.”
여전히 태블릿을 보고 있는 채로 선혜가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정말 사소한 건데도, 그 사실에 태준의 입가가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갈게요. 내일 회사에서 봐요.”
인사를 마친 태준이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몸을 돌려 카페를 나섰다.
선혜는 태준이 멀어지는 기척에 태블릿에서 시선을 들었다. 그가 나간 문 쪽을 쳐다보고 있는데 앞에서 똑똑 유리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태준이 서 있었다. 근사하게 웃는 얼굴로 주먹을 들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하길.
‘파이팅.’
눈을 깜박이며 쳐다보고 있는 새에 벌써 저만치 몸을 돌려 멀어진다.
“뭐야.”
피식 웃다가 다시 태블릿 PC로 시선을 돌리는 때였다. 태준이 건넨 얼그레이 케이크가 눈에 들어온 것은.
태준이 미안한 마음을 담아 건넨 케이크.
단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하지만 성의를 봐서라도 먹어야겠다 싶어 포크를 손에 들었다.
케이크를 조금 떠서 입안에 넣었다. 얼그레이 향이 은은하게 입안 가득 퍼졌다. 제법 입맛에 맞아 케이크에 자꾸만 손이 갔다.
조금씩 떠먹을 때마다 어제와 오늘,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하던 태준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잘못했다고 다시 한번 정중하게 사과하던 모습도.
살짝 숙인 고개. 내리깐 눈꺼풀 사이로 그녀의 눈치를 보는 연갈색 눈동자. 초조함에 자기도 모르게 혀로 축이던 도톰한 입술. 그러다 괜찮다는 자신의 말에 환하게 웃자 왼쪽 뺨에 드러나던 보조개.
덩치 큰 남자를 두고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강아지 같아.”
모양새가 꼭 그랬다.
어느새 접시 위는 텅 비어 있었다.
선혜는 아쉬운 얼굴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파이팅’이라고 입 모양으로 응원하던 그의 모습이 잔상처럼 아른거려,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