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화가 나도 예뻐서
다음 날 아침.
수호는 선혜의 품 안에서 눈을 떴다. 손을 들어 눈을 비비적거리던 수호가 물끄러미 선혜의 얼굴을 보다가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통 때 같으면 작은 기척에도 깨곤 했던 선혜인데 미동도 하지 않는 걸 보니 꽤 곤히 잠든 것 같았다. 술을 마신 다음 날 선혜는 어김없이 오후 무렵까지 늦잠을 자곤 했다.
수호는 말없이 선혜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잠들기 전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엄마는 그 아저씨 싫어?’
그 질문에 엄마, 선혜가 짓던 표정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던 엄마는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아니야. 안 싫어해.’
‘그러면? 좋아?’
수호는 다소 기대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었다. 안 그래도 태준과 점점 가까워지면서 엄마인 선혜의 눈치가 보이던 참이었다.
태준과 수영장에서 만났다는 걸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숨기고 있느라 양심이 콕콕 찔렸더랬다.
여러모로 거짓말을 한 것처럼 마음이 불편하던 참이었는데. 만약 엄마가 좋다고 한다면 그 아저씨와 맘 편히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그 물음에 대한 엄마의 표정은 오묘했다.
‘그냥…….’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그 얼굴에는 망설임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허망함에 따지듯 물었었다.
‘뭐야. 어른인데 왜 자기 마음도 몰라?’
어른이면 알아야지. 남의 마음도 아니고 자신의 마음인데.
‘그러게. 엄마 바보 같다. 그치.’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웃던 엄마의 얼굴이 어쩐지 서글퍼 보여서, 수호는 더 캐묻지 못했다.
시간을 확인한 수호는 선혜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훌러덩훌러덩 벗어 던지는데 왼쪽 엉덩이 윗부분, 그러니까 팬티를 입으면 고무줄로 아슬아슬하게 가려지는 부분에 오백 원짜리 보다 조금 더 큰 몽고반점이 뚜렷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소성 몽고반점. 수호가 가진 유일한 콤플렉스였다. 수호는 언짢은 얼굴로 힐끔 엉덩이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샤워를 시작했다.
혼자 씻고 나오는데 경애가 안방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막 일어난 부스스한 몰골로 하품을 늘어지게 하던 경애가 수호를 보고 눈을 반짝 떴다.
“우리 수호, 혼자 씻었어?”
“응, 할머니.”
경애가 기특하다는 얼굴로 수호를 바라보다 물었다.
“엄마는 자고?”
“응. 할머니, 나 수영 가야 하는데.”
“그래. 할머니가 데려다줄게. 수영이 몇 시더라?”
“열한 시.”
“그래. 세수만 하고 금방 나올게. 기다려?”
수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준비를 하며 경애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태준에게 연락을 넣었다.
[아저씨 오늘 수영장 오죠?]
답장은 금방 날아왔다.
[응. 이따 보자.]
수호가 싱긋이 웃었다. 왼쪽 뺨에 보조개가 오목하게 들어갔다.
*
선혜는 옆을 더듬거리다가 허전한 느낌에 눈을 떴다. 수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협탁을 더듬거려 핸드폰을 가져가는데 전원이 꺼져있었다. 어젯밤 태준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전원을 끈 게 생각이 났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선혜는 핸드폰을 켰고 전원이 켜지자마자 보이는 시간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12시 20분.
수호의 수영수업이 끝나고도 한참인 시간이었다.
“……!”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이불을 휙 걷은 선혜가 튕기듯이 침대에서 내려와 수호에게 막 전화를 걸려는 찰나, 핸드폰이 진동했다. 경애에게서 온 전화였다.
“어, 엄마.”
- 얘 좀 봐. 너 지금 일어났니? 수호 수영수업 벌써 끝났겠다!
다소 격앙된 경애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선혜가 미치겠다는 얼굴로 머리를 헝클였다.
“엄마, 나 빨리 가 봐야 해, 끊어!”
- 어휴. 지지배.
쯧쯧 혀를 차는 경애의 목소리를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차단한 선혜는 부랴부랴 수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호야 미안. 엄마 지금 금방 가!”
적어도 삼십 분은 지각이었다. 초조함에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집을 나서는 선혜였다.
*
한편. 태준과 수호는 나란히 편의점에 서 있었다.
“천천히 와도 되는데.”
수호가 핸드폰을 보며 중얼거리자, 먹을거리를 고르던 태준이 피식 웃었다.
“늦잠 주무셨나 보네.”
“그런가 봐요.”
“난 다 골랐는데. 너도 다 골랐어?”
품에 컵라면과 생수를 안고 있는 태준이 수호를 향해 물었다. 수호의 품에는 카스테라와 우유 하나가 들려 있었다. 수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태준이 수호를 데리고 계산대로 향했다.
선혜를 기다리는 수호와 함께 있다가 서로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거하게 나는 바람에 스포츠 센터에 입점한 편의점에 발을 들였다. 같이 점심을 먹기에는 시간이 애매했고, 주린 배라도 간단히 채울 생각이었다.
계산하기 위해 계산대로 다가가자 편의점 주인으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흐뭇한 얼굴로 태준과 수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들 데리고 주말에 수영장도 오고. 참 좋은 아빠시네요.”
편의점 주인이 계산하며 던진 그 말에 수호는 단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태준은 머쓱하게 수호의 눈치를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얘 제 아들 아니에요.”
“네? 그럼 조카인가?”
“아뇨. 그냥…….”
태준은 수호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수호를 힐끔 쳐다보고는 주인에게 말했다.
“절친이에요, 절친.”
점원과 수호에게 동시에 의아함을 남겨놓은 태준은 계산한 것들을 가지고 창가에 마련된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수호가 그의 뒤를 쫓아와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절친이 뭐예요?”
수호의 빵 포장지와 우유 팩을 뜯어주며 그가 대답했다.
“절친한 친구.”
“친구요? 아저씨랑 나랑 친구예요?”
“아빠라고 할 순 없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태준은 수호를 보았다. 제 것보다 맑은 수호의 연갈색 눈동자가 깜박이는 걸 새삼 묘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수호가 눈을 피하며 빵을 한입 크게 물었다.
오물오물. 대답 없이 빵을 먹고 있는 수호를 보던 태준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수호가 태준이 들고 있는 컵라면을 흘끔 보더니 물었다.
“그거 맛있어요. 아저씨?”
“당연하지. 컵라면 중에선 이게 제일인데. 안 먹어 봤어?”
수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저 컵라면 먹어본 적 없어요.”
태준의 눈이 놀라움을 머금고 커졌다.
“안 먹어 봤다고?”
“네. 엄마가 못 먹게 해서. 라면도 안 먹어 봤어요.”
세상에. 라면도 못 먹어 봤다니. 이 맛있는걸.
선혜의 의도를 알면서도 어쩐지 수호가 안타까웠다.
수호는 빵을 먹으면서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컵라면을 힐끔거렸다. 아이치곤 무심한 편이었지만 속내가 훤히 보였다.
먹어보고 싶다는 그 마음이 간절하게 눈동자 속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한 입 달라고 하면 맘 편히 거절이라도 하겠건만. 저러고 있으니 더욱 짠했다.
결국, 흔들리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계산대로 다가가 젓가락 하나를 점원에게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마침 컵라면이 다 익었을 시간이었다. 뚜껑을 열자 모락모락 김이 새어 나옴과 동시에 짭짜름하고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태준은 능숙하게 컵라면 뚜껑을 벗겨내고 두 번 접어 깔때기로 만든 뒤 그 안에 한 젓가락을 넣어 수호에게 젓가락과 함께 건넸다.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고 있던 수호가 고개를 들어 태준을 보았다.
“엄마 안 계시니까 한 입만 먹어 봐.”
망설임도 잠시.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수호가 냉큼 젓가락과 라면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호로록 한입 머금었다.
마치 듣도 보도 못한 산해진미를 먹은 것처럼 눈이 커다래지더니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그러자 수호의 왼쪽 뺨에 보조개가 깊이 팼다. 태준이 자기도 모르게 그 보조개에 시선을 두며 제 왼뺨을 손으로 문지르는 때에 수호가 말했다.
“진짜 맛있어요, 아저씨.”
“……그래?”
보조개에 시선을 빼앗긴 그가 조금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수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면발을 순식간에 흡입했다. 그러더니 척하니 빈 깔때기를 내밀어 보였다.
“저 좀만 더 주세요.”
태준은 피식 웃으며 다시 라면을 덜어 수호에게 건네주었다. 열심히 먹는 수호를 보며 미소 짓고는 태준 자신 또한 젓가락을 들었다. 한 젓가락 크게 집은 그가 막 입안에 넣으려는 찰나였다.
똑똑.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와 태준은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
입을 벌린 채로 꼼짝없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
유리창 너머에는 선혜가 서 있었다.
팔짱을 단단하게 끼고 누가 봐도 화난 얼굴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수호도 라면을 먹으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태준을 따라 창가를 돌아본 수호도 태준과 똑같은 모양새로 얼었다.
선혜의 눈이 느리게 두 사람을 오고 갔다.
그동안 둘은 동시에 젓가락과 라면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망했다.’
입술을 질끈 깨문 부자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
그로부터 잠시 후. 편의점 앞.
“수호 너는 차에 들어가 있어.”
선혜가 수호에게 낮게 말했다. 수호는 근처에 주차된 차를 보고 태준을 걱정스레 힐끔 쳐다보고는 이내 기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준은 터덜터덜 멀어져 차에 올라타는 수호의 모습을 고개를 숙인 채 눈만 들어 쳐다보고 있었다. 선혜 쪽으로 조심조심 시선을 틀다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찌나 무섭게 쳐다보는지. 웃어넘길 수준이 아니라는 게 감으로 느껴졌다.
화가 났다. 그것도 아주 많이.
어떡하지. 미치겠네.
그가 난감한 얼굴로 내리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때였다.
“이봐요, 신태준 씨.”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선혜가 태준을 불렀다. 태준은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바라고 부른 게 아니라는 건 눈치로도 충분히 알만한 사실이었다. 그는 슬리퍼를 신은 선혜의 발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선혜는 그런 태준을 올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컵라면이 몸에 얼마나 나쁜 줄 알아요?”
알다마다. 기름 많고, 짜고, 용기에서 나온다는 환경호르몬까지.
그래서 선혜가 수호에게 먹이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먹였다.
혼나도 쌌다.
“왜 남의 애한테 그런걸…….”
더 쏘아붙이려던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남의 애. 거기서 말문이 막힌 탓이다.
선혜는 죄진 강아지처럼 풀 죽어 있는 태준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런데 바라본 방향이 하필이면 편의점 유리창 쪽이다. 유리창에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파자마 차림새에 슬리퍼. 그리고 씻지도 못한 얼굴에 부스스하게 뜬 머리.
이런 추한 꼴로 이 남자를 마주하고 화까지 내게 되다니.
최악이다, 정말.
“미안해요. 선혜 씨.”
태준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 선혜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덩치는 자기보다 훨씬 큰 남자가 기죽어 눈치를 보는 모습이라니. 미안한 마음을 담아 투명하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자니 점점 마음이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화…… 많이 났어요?”
선혜가 소리 없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신 우리 애한테 그런 거 먹이지 마요.”
다소 누그러진 말투로 일갈한 선혜는 이내 몸을 돌려 차로 성큼성큼 다가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벨트를 매다가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수호와 눈이 마주쳤다. 카스테라를 야금야금 먹다가 선혜가 쳐다보자 슬그머니 내린다.
“엄마. 화…… 많이 났어?”
피는 못 속인다더니. 풀이 죽어 저렇게 묻는 모양새가 태준과 똑같았다. 선혜는 그 모습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화낼 줄 알았던 엄마가 돌연 웃자 수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혜가 수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컵라면은 맛있었어?”
수호가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더니 주섬주섬 손에 들린 카스테라와 우유를 내보였다.
“아저씨가 원래 이거 먹으라고 사준 건데 내가 너무너무 먹고 싶어 하니까 덜어준 거야.”
선혜는 순간 유리창 너머로 보았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태준이 다정하게 수호를 챙기는 모습도. 수호를 바라보던 태준의 따듯한 눈동자도.
다급히 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 멈춰 서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더랬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서, 한참을.
물론 태준이 컵라면을 수호에게 먹이는 걸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도 컵라면은 안 돼. 알았지. 그게 몸에 얼마나 안 좋은데.”
“응. 엄마.”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선혜는 고개를 들어 차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태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여전히 잔뜩 미안한 얼굴로.
선혜는 그런 태준과 눈을 맞추다가 이내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
한편 태준은 선혜의 차가 멀어지는 걸 보며 머리를 세게 헝클였다.
“아오. 진짜…….”
주말에 보자고는 했지만 이런 만남을 기대한 건 결코 아니었는데.
점수를 따기는커녕 잃다니.
화난 선혜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화난 모습도 예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싫어서, 태준은 제 머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