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회식
기획부는 퇴근하자마자 호프집 아일랜드로 몰려갔다.
디자인 팀도 이곳에서 회식한다는 이야기는 벌써 기획부 직원들 사이에 쫙 깔려 있었다.
“야. 남자친구 없다고 하는 것 같던데.”
“그래? 남자들이 가만 놔두나?”
“안 놔두지. 근데 엄청 철벽이래. 그 편집부에서 무협 담당하는 윤 주임 있지? 커피 사준다고 들이밀다가 개쪽 당했다잖아. 예의상 받아주지도 않고 그냥 가더래.”
“와. 어렵다 어려워. 하긴. 엄청 도도하게 생기긴 했던데.”
“도도하게 생겼다 뿐이냐? 아주 그냥, 여러모로 작살나지, 작살 나.”
선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키득거리는 기획부 남자직원들의 얼굴을, 태준은 물을 마시는 척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 넣고 있었다.
하지만 제일 거슬리는 건 자신의 옆에 앉아 기대하는 얼굴로 실실거리는 성균이었다. 기획부에서 제법 반반하다고 평가되는 외모인 그였다. 사내에 그를 흠모하는 여직원들도 몇 있다고 들었었는데.
태준이 보기에도 제법 귀엽게 생긴 얼굴이었다. 나이는 서른하나라던데 쓸데없이 어리게 생겼다.
그냥 한번 찍어보려는 남자들도 거슬렸지만, 임성균 대리는 그 마음이 제법 진지한 듯해서 더 거슬렸다.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목을 빼고 문 쪽을 힐끔거린다. 저 허여멀건 한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태준은 찬물을 목으로 넘겼다.
“근데 그렇게 잘 나가는 일러스트레이터였는데 왜 갑자기 신입사원으로 들어왔을까요?”
“우리 회사에서 스카웃한 거 아니었어?”
“뭔 소리예요. 스카웃이라니. 우리 회사 그런 거 안 해도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스카웃 아니래요. 입사 시험 치르고 면접에서 대표님이랑 이사님 마음에 제대로 들었다고 하더라고.”
“근데 나이는 몇이래? 스물…… 한 여섯쯤 되어 보이던데.”
“서른이래요. 서른.”
“어? 나랑 동갑이다.”
그 말을 시작으로, 서른인 남자직원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번쩍번쩍 들며 자기도 서른이라고 소리쳤다. 어떤 직원은 빠른년생인데 오늘은 한 살 어린 거로 해 달라며 사람들의 웃음을 샀다.
어떻게 해서든 선혜와 공통분모를 찾기 위해 다들 혈안이었다.
태준에게는 그런 모습들이 같잖았고, 무엇 보다 거슬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취한 척하고 다 엎어버려?
하지만 그런 짓을 저질렀다가는 바로 아버지 신 회장 앞에 불려갈 것이다. 태석의 잔소리와 태연의 놀림을 한참 동안 받아야 할 테고.
더구나 선혜가 싫어할 테다.
참자, 참아. 태준은 부글거리는 속을 물로 달래려 했지만 부족했다.
술이 몹시도 고파왔다. 때마침 술병이 줄줄이 테이블에 깔렸다.
디자인 팀이 도착한 건 모두의 잔에 소맥이 부어지고 건배한 뒤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해 쏠렸다. 친한 동기 사이인 민영과 형주가 손 인사를 주고받고 친화력 하니만큼은 사내에서 으뜸인 기주가 기획부 테이블로 서슴없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기획부도 오늘 여기서 회식 있으셨어요?”
“원랜 없었는데 갑자기 잡혔어.”
한윤재 부장이 임성균 대리를 노려보며 대꾸했다. 성균은 선혜를 보고 눈을 빛내느라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한윤재 부장이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짧게 찼다.
“그럼 다들 즐겁게 회식들 하시고요. 저희도 잘 놀다 가겠습니다.”
기주가 건넨 인사에 살짝 선이 그어져 있었다. 사실상 기획부와 마케팅부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아서 합석은 사절이었다.
예전에 기획부와 회식 장소가 우연히 겹쳐 합석한 적 있는데, 업무 관련 이야기를 하다가 테이블이 엎어질 정도로 크게 다툰 안 좋은 기억이 있었다.
부서 사이에 위와 아래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기획부는 자신의 기획을 토대로 업무를 보는 마케팅부를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마케팅부는 그러한 태도에 불만이 많았다. 그러니 당연히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합석을 하면 선혜가 불편해할 게 뻔했다. 기획부 직원들이 노리는 바가 기주 눈에는 빤히 보였다. 설렁설렁 장난스럽게 대하는 듯해도, 부하직원에 대해 정이 각별한 인물이 바로 기주였다.
아쉬워하는 기획부 직원들의 시선들을 뒤로한 채 기주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다들 자리에 앉았다. 선혜는 기획부 직원들의 아쉬움을 모른 채 그들을 등지고 앉았다.
태준의 시선이 묶은 머리 사이로 보이는 흰 목덜미에 닿았다. 평소에는 풀고 다니면서 회사에는 꼭 묶고 다니는 선혜였다.
회사 규정에 머리를 풀라는 규정을 새로 넣고 싶었다. 머리를 묶자 계란형 얼굴과 예쁜 이목구비가 드러나 더 예뻐 보였다. 기획부 직원들뿐 아니라 호프집을 찾은 다른 남자들의 시선도 한몸에 받는 선혜였다.
하여간. 쓸데없이 예뻐선.
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혀를 짧게 찼다.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술을 마시면서도 태준의 시선은 줄곧 선혜를 향해 있었다. 지민이 뭐라고 속살거리면서 이쪽을 힐끔거렸지만 선혜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저 여자는 왜 이렇게 나한테 등만 보이나.
괜히 야속해서 술이 목구멍으로 술술 들어갔다.
“자! 건배하기에 앞서, 신입사원 소개가 있겠습니다.”
기주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와 기획부 직원들의 고개가 저절로 그쪽을 향했다. 시끄럽게 떠들던 모두가 입을 다물고 그쪽을 집중해서 쳐다보았다.
선혜가 일어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잠시 조용해진 호프집. 확성기라도 튼 것처럼 선혜의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디자인팀에 새로 입사한 윤선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남자친구 있나요!”
성균이 손나팔을 만들어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잠시 성균에게 향했다. 당황한 선혜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태준은 느리게 잔을 기울이며 선혜를 응시하고 있었다. 반면 선혜는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 미친놈이.”
김형주 과장이 성균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제법 아픈지 성균이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고 그 모습을 본 기획부 직원들과 호프집 사람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성균은 부끄러운지 맞은 곳을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지만, 그러면서도 선혜를 흘끔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금 모두의 시선이 선혜에게 향했다. 모두 성균이 한 질문에 대한 그녀의 답변이 궁금한 듯했다.
“아뇨.”
다시금 또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남자친구는 없는데…….”
그녀의 입꼬리가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왜 저렇게 예쁘게 웃나 싶어 잔을 쥔 태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때였다.
“아들은 하나 있어요.”
선혜의 말에 호프집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 놀란 기주가 떨어뜨린 새우 칩이 내는 바스락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태준은 당당히 웃는 얼굴로 서 있는 선혜의 비스듬한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위로 올라갔다.
다시금, 선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애 엄마예요.”
결국, 태준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미치겠네. 왜 저렇게 예쁜 짓만 골라서 하지.
이 많은 남자를 상대로 단단한 철벽을 두른 그녀가 예뻐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기획부 직원들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태준을 쳐다보았지만, 태준은 웃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당당한 그 모습이 미치도록 예뻤다.
태준은 턱을 괸 채 선혜의 뒷모습을 따듯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
기획부 테이블은 조금 숙연해져 있었다. 선혜의 폭탄선언에 다들 얼이 빠져 있었다.
“아니, 애 엄마라고?”
누군가 서두를 꺼내자 다들 그 주제에 달려들어 떠들어댔다.
“근데 저번에 물어보니까 결혼 안했다고 했었는데?”
“결혼을 안했는데 애가 있다고? 미혼모야 그럼?”
“와. 유부녀도 아니고 미혼모.”
“아 씨. 남자친구 없다고 좋아했는데 글렀네, 글렀어.”
사람들의 선입견은 빠르게도 형성되었다. 선혜에 대해 말하는 그들의 태도는 아까와 확연히 달랐다. 선혜를 못마땅한 눈으로 돌아보는 이들도 몇 있었다.
왜 저런 눈빛들을 하는지 태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좋다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저런 반응들이라니.
웅성대는 사람들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때였다.
“아니, 근데 저걸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지?”
이해할수 없다는 듯 비아냥거리는 그 말에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끊어졌다.
술잔을 들어올리던 태준은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왜요. 당당하지 말란 법 있습니까?”
순간 다들 움찔하며 태준을 돌아보았다. 전에 본 적 없는 그의 서늘한 눈빛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미혼모가 뭐 어때서요. 왜 당당하면 안 되는데요.”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태준의 싸늘한 태도에 말을 꺼낸 직원이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지금껏 실컷 떠들어댄 사람 중에 태준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태준은 어이없다는 듯이 실소했다. 그와 동시에 옆에 있던 성균이 화난 얼굴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눈치를 보던 김형주 과장이 침묵을 깼다.
“거참. 그래요. 다들 그만들 좀 해. 나도 듣기 거북하던 참이었어. 둘이서 애 키우기도 힘든 세상, 혼자 애 키우는 거 대단하다고는 못할망정…….”
쯧. 김형주 과장의 혓소리가 직원들 가슴 속에 단도처럼 파고들었다. 다들 뒤늦게 든 수치심에 숙연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말을 마친 김형주 과장이 힐끔 태준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성균의 뒤로 손을 뻗더니 태준을 툭 건드렸다.
태준이 삐딱하게 김형주 과장을 쳐다보았다. 김형주 과장이 조용히 밖으로 나가라고 눈짓했다. 태준은 숨을 크게 한 번 몰아쉬다가 선혜의 자리가 비어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그는 문 쪽을 돌아보다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나섰다.
*
호프집을 나선 태준은 선혜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 사이에 어딜 간 건지 선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태준은 난감한 얼굴로 머리 뒤를 벅벅 문질렀다.
니스에서 와인 반병에 취해버린 그녀가 생각이 났다. 술이 생각보다 약한 거로 아는데. 아까 보니 꽤 많이 받아 마시는 것 같았다.
문득 멀지 않은 곳에서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불량한 남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저런 놈들한테 붙들린 건 아닌가 싶어 막 다급히 걸음을 옮기는 때였다.
“우리 수호,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거 알지?”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태준은 제자리에 우뚝 섰다.
고개를 돌리니 골목 벽에 기대어 서서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통화 중인 선혜의 모습이 보였다.
어두운 골목길 희미한 달빛 아래 드리워진 미소가 아름답게 빛났다.
자신과 마주할 때는 늘 표정을 굳히고 시선을 피하기 바쁜 여자였는데.
아들한테는 저렇게 한없이 다정한 엄마라니.
수호가 한없이 부러워지는 찰나였다.
“보고 싶네.”
그리움 섞인 혼잣말.
처음에는 수호를 향한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매일 보는 수호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다면 혹시…… 아이 아빠를 향한 것일까.
아이 아빠는 누굴까.
애써 묻어두었던 궁금증이 솟아오름에 속이 쓰렸다.
저절로 담배가 고파왔다. 태준은 골목 입구 옆 벽에 몸을 기대어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불을 붙였다.
흐린 달빛 사이로 허망하게 사라지는 연기를 보며 ‘후’ 숨을 내뱉었을 때였다.
자박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옆에서 멈췄다.
저를 보고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가 인상 쓴 얼굴로 손을 내젓는 선혜를 보고 태준은 새거나 다름없는 담배를 미련 없이 지져 꺼버렸다.
웃는 얼굴도 보기 힘든 마당에 더 찡그리게 할 순 없었다.
인상 쓴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언제쯤이면 그때처럼 웃으면서 자신을 봐줄까.
생각 끝이 자조로 물들어 입이 썼지만 태준은 웃었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어요?”
찡그린 얼굴이라 하더라도 마주 보니 좋았으니까.
*
선혜를 택시 태워 보낸 뒤 태준은 자리에 한참을 서서 멀어지는 택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멀리 교차 선에서 신호를 받아 좌회전한 택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태준은 몸을 돌렸다.
아까 티격태격했던 게 생각나서 괜히 웃음이 샜다.
오랜만에 단둘이 보는 거였는데 너무 짓궂게 굴었나. 머쓱하게 목덜미를 손으로 문지르며 호프집으로 다가가는 때였다.
허겁지겁 호프집 문을 열고 뛰쳐나오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임성균 대리였다. 선혜를 향해 남자친구가 있냐고 당당하게 물은, 우리 반반한 선배님.
태준은 호프집 앞에 주자 앉아 웩, 웩 구토를 하는 성균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태준은 모르는 척 지나가려다 호프집 입구에서 방향을 틀었다. 그러고는 성균의 옆에 다가가 섰다. 인영이 드리워지자 성균이 힘없이 고개를 들어 태준을 보았다.
태준이 허리를 살짝 숙이고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선배. 괜찮아요? 등 좀 두들겨 줄까요?”
성균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태준이 씩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퍽!
“악!”
“아, 이런. 죄송합니다. 취했나. 힘 조절이 안 됐네. 다시 살살 두들길게요.”
겨우 힘을 뺀 태준이 다시금 손을 휘둘렀다.
쭈그려 앉아 있는 성균의 입에서 구토 소리보다 억, 억 하는 신음이 더 많이 나왔다. 태준은 성균 몰래 웃으며 계속 등을 두들겨, 아니 패 주었다.
“우리 선배님 많이도 나오시네. 얼른 다 게워내요. 그래야 더 마시지.”
퍽퍽 소리는 한참 동안 호프집 앞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