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14화 (14/109)

#14. 그의 공략법

레어미디어는 기획부, 디자인팀이 속한 마케팅부, 그리고 편집부로 나누어져 운영되고 있었다.

선혜가 속한 부서는 마케팅부의 디자인 팀이었다. 표지 제안서를 검토해 디자이너에게 넘기는 것과 타이포 디자인 작업이 주 업무였다.

업무 중 잠시 갖는 휴식 시간.

손희재 실장이 대뜸 물었다.

“그나저나, 기획부 신 주임이랑은 여행 가서 언제 만난 거야?”

손희재 실장이 묻자 임민영 대리와 김지민 주임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저걸 왜 말해요?’라는 말이 선혜에게 들리는 듯했다. 두 사람이 선혜의 눈치를 보았지만, 선혜는 모르는 척 손희재 실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오래됐어요. 육 년 전쯤.”

“근데, 신 주임님은 왜 자유여행 아니고 패키지여행을 갔대요?”

“난들 아나. 뭐 그런 거 아니겠어? 재벌이 서민의 문화를 느껴 보고 싶은 그런 거. 옛날 왕들이 서민 복장하고 잠행하러 궁 밖을 나가는 것처럼.”

기주의 말에 민영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신 회장님이 좀 특이하시나? 자기 아들들 낙하산 하나 없이 신입사원으로 회사 들이는 거 보면 말 다 했지. 며느리들도 조건 같은 거 안 따지고 들이잖아요.”

듣자 하니 태준은 여느 신입사원과 똑같이 입사 시험을 치르고 들어왔다고 한다. 현성 출판사의 후계자인 신태석 이사가 입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그때 태석은 태준과는 달리 회장의 아들임을 숨기고 들어온 터라, 나중에 그가 신 회장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회사에 제법 큰 파문이 일었다고 한다.

태석을 갈구기 좋아했던 기획부 부장이 사실을 알고는 세상 잃은 얼굴로 그 자리에 무릎 꿇은 일화는 꽤 유명해서 지금까지도 직원들 사이에서 회자 되고는 했다.

더구나 같은 부서에서 티격태격하던 여직원과 결혼한 일화는 모르면 타사 스파이라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유명했다.

그 때문에 태준을 흠모하는 여성들은 희망을 안고 기회를 노리곤 했다. 태준이 내미는 유리구두에 신분 제한이 없다면 다들 발을 욱여넣고 싶어 안달이었다. 물론 선혜는 유리구두를 외면하는 쪽에 속했지만.

태준에 관한 이야기는 외면하고 모르는 척하려고 해도 자꾸만 들려왔다. 얼굴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데 잊을 만하면 마주쳤다.

점심을 먹고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 지나가는 복도, 그리고 지하 주차장 등등.

다행히 그는 선혜의 말을 새겨들었는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알은 척을 하지 않았고 일반 사원을 대하듯 묵례만 주고받았다. 물론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남몰래 웃곤 했지만.

덕분에 선혜와 태준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잠시 시끄러워질 뻔한 사내는 금세 조용해졌다. 지금처럼 손희재 실장같이 뒤늦게 언급하지 않는 이상은 조용했다.

“그나저나 우리 회식은 어디서 해요?”

민영이 기주에게 물었다. 커피를 홀짝이며 눈을 위로 굴리던 기주가 지민에게 물었다.

“김 주임. 요새 주위에 잘 나가는 호프집 어디 없나?”

그런데 그때였다.

마케팅부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에 모두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문 안으로 태준이 들어서고 있었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노 타이에 셔츠 소매 깃을 두어 번 접어 올린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의 손에는 서류가 들려 있었다. 마케팅부 부장인 김범진 부장에게 전해 줄 서류인 모양이었다.

김범진 부장이 있는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디자인 팀이 있는 곳을 지나가야 했다. 선혜는 태준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컴퓨터 화면만 쳐다보았다.

“신 주임, 김 부장님한테 서류 드리러 온 거야?”

기주가 태준을 향해 편하게 말을 걸었다.

“네.”

“또 무슨 지시가 내려왔나 모르겠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기주가 혼잣말로 중얼대자 태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저한테 그런 불평 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기주가 뒤늦게 아차 하는 얼굴로 태준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았다.

“하하하. 신 주임, 농담도 참.”

기주가 입을 벌리고 웃으며 태준의 어깨를 팔꿈치로 쳤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태석을 생각하며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을 터였다.

태석이 신 회장의 아들로 밝혀지던 날, 현재 태석의 아내인 지현을 두고 삼각관계였던 기주는 남몰래 뒤에서 달달 떨었었다.

이전에 지현과 관련하여 오해를 하는 바람에 태석의 멱살을 쥐고 흔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꼼짝없이 해고당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웬걸. 계열사인 레어미디어가 오픈되자마자 이곳으로 인사발령이 되었다.

안도함도 잠시, 기주는 태석이 레어미디어에 나타났다 하면 줄행랑을 치곤 했다.

그 이야기를 형에게 들어 알고 있는 태준은 기주를 보며 짓궂게 웃다가 파티션 너머에서 홀로 일하고 있는 선혜를 흘끔 바라보았다.

저를 쳐다도 안 보는 선혜의 야속한 뒷모습에 웃음기를 지운 그가 곧 김범진 부장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서류를 건넸다.

태준이 지나가자 기주가 찝찝한 기분을 떨치려는지 애써 웃으며 팀원들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무슨 얘기하고 있었지?”

뒤늦게 화장을 고치고 태준의 뒷모습을 아쉬운 얼굴로 바라보던 지민이 입을 열었다.

“회식 장소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아, 맞다. 김 주임. 아는 데 없어?”

은근히 지민에게 회식 자리 예약을 하라는 압박이 담겨 있었다. 그걸 알아챈 지민이 파티션 너머로 샐쭉한 표정을 숨기고는 대답했다.

“얼마 전에 근처에 오픈한 호프집이 괜찮더라고요. 큰 테이블도 많고.”

“가게 이름이 뭔데?”

가게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지 지민이 고개를 기울이는 때였다.

“아일랜드요.”

대답을 한 사람은 김범진 부장과 말을 마치고 지나가던 태준이었다.

“어, 신 주임도 거기 가 봤어?”

“네. 안주도 맛있고 사장님이 좋으셔서 서비스가 좋아요.”

“아, 그래? 오케이. 그럼 아일랜드 낙찰!”

기주가 총을 쏘는 모양새로 지민을 가리켰다. 지금 당장 전화하라는 소리다. 곧장 알아들은 지민이 대답했다.

“이따 문 열면 전화할게요. 아직 문 안 열어서.”

“그래, 그래. 햐. 얼마만의 회식이냐. 참, 선혜 씨는 술 잘하나?”

모니터를 보고 있던 선혜가 멈칫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기주 옆에 아직도 서 있는 태준에게 스치듯 시선이 닿았다. 곧 기주를 바라본 선혜가 사회적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못 마시진 않아요.”

“오. 그럼 오늘 우리 선혜 씨 주정 좀 확인해 볼까?”

기주가 눈을 가늘게 뜨며 던진 장난 섞은 말에 선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주정이라는 말 때문에 6년 전 니스에서 태준과 있었던 일이 떠올라버렸기 때문이었다.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태준을 힐끔 쳐다보았고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깊어진 갈색 눈동자를 보자 술에 취해 그의 옷자락을 잡고 발돋움을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선혜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잔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겼다.

태준은 그런 선혜의 모습을 보다 귀엽다는 듯 작게 미소짓더니 기주를 향해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회식 잘하시고요.”

“어, 신 주임. 잘 가고. 응? 내 맘 알지?”

태준의 뒤를 바짝 따라온 기주가 그에게 어깨동무했다. 입술을 늘여 씩 웃고는 태준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면서도 남들 모르게 인상을 쓰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모양새가 절대 형인 태석이나 회장인 현철에게 말하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알죠, 그럼.”

태준은 짧은 말로 안심시키고 마케팅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선혜는 떨떠름한 얼굴로 멀어지는 태준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고개를 돌렸다.

*

한편. 태준은 기획부 사무실로 들어가 기획부 부장인 한윤재 부장에게 마케팅부 부장에게 서류를 전달했음을 알렸다. 한윤재 부장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태준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보던 업무를 마저 보기 시작했다.

회식. 아일랜드.

업무를 보던 그가 타이핑 하던 손을 멈추고 턱 언저리를 느리게 쓸었다.

선혜의 주정은 딱 한 번 봤지만 뭔지 알 수 있었다. 그 도도한 여자가 실실거리며 웃고 욕구 불만을 호소하듯 매달려왔던 기억이 선명했으니까.

설마 다른 놈들한테도 그럴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순식간에 불쾌해졌다. 업무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의 손끝이 툭, 툭 테이블을 두드렸다.

데리러 가야 하나.

하지만 그런 행동을 했다간 회사 사람들 이목을 신경 쓰는 선혜가 달가워하지 않을게 불보 듯 뻔했다.

데리러 갈 만한 구실 같은 게 어디 없을까. 태준이 그렇게 고민을 하던 때였다.

기획부 문이 벌컥 열리더니 성균이 실실거리며 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보며 다들 무슨 일이냐고 한 번씩 물었다. 성균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마케팅부 디자인 팀, 오늘 회식이랍니다. 장소는 얼마 전 새로 생긴 호프집 아일랜드!”

성균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뭐 때문에 그러는지는 뻔했다.

선혜를 처음 본 날 첫눈에 반했네 어쨌네 멍하니 중얼거리던 그였다. 몰래 회사 뒤로 끌고 들어가 한 대 치고 싶었던 걸 참느라 혼이 났었는데. 지나갈 때 다리라도 걸까. 그런 고민을 진지하게 하는 때였다.

“과장님. 저희 회식한 지도 꽤 됐지 않았습니까. 과장님이 부장님께 말씀 한번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성균이 간절한 얼굴로 호소하는 걸 태준은 같잖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야 뭔 소리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번 주 회식 숙취가 아직도 안 빠졌다고 징징거렸잖아, 너.”

형주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성균에게 손가락질했다. 예전 같았으면 형주의 말에 금방 굴복했을 성균이었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그럼 제가 한번 부장님께 말씀드릴까요? 아니면 다수결 투표로?”

“야, 네 마음대로 해. 네 마음대로.”

형주가 포기한 얼굴로 손을 휘젓는 때였다. 태준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제가 한번 말씀드려 볼게요.”

성균의 눈이 별이라도 품은 듯이 부담스럽게 반짝거렸다.

“진짜요? 진짭니까 신 주임님?”

“네. 아까 서류 전해 달라 하실 때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 수락하실 것 같아요.”

기분이 좋지 않아도 태준의 말이라면 ‘어이쿠, 그러십시오’ 할 한윤재 부장이었다.

한윤재 부장의 책상으로 다가가는 태준의 뒤로 성균이 응원의 의미로 주먹을 쥐어 보였다.

태준이 그런 성균을 보고 피식 웃더니 한윤재 부장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업무를 보고 있던 한윤재 부장이 고개를 들었다.

“어, 신 주임. 무슨 일이야.”

태준이 말했다.

“임 대리님이 오늘 꼭 회식이 하고 싶으시답니다.”

“뭐?”

어처구니없는 말에 한윤재 부장이 안경을 벗으며 삐딱하게 태준을 올려다보다가 내리뜬 그의 눈빛에 흠칫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가 모니터 너머로 슬그머니 성균을 노려보았다.

“장소도 생각해 놓으셨더라고요. 아일랜드.”

태준이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오늘 디자인팀 회식이 거기서 있다고.”

“허, 참. 저 자식이 일은 안 하고 연애할 궁리만 하고 있어? 임 대리가 자네한테 시켰나? 가서 말 전하라고?”

“뭐, 그런 건 아니지만…….”

태준은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난감한 척 검지를 들어 관자놀이를 긁적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윤재 부장 입장에서는 난처했다. 아무리 주임이라고 해도 신 회장님의 막내아들인 태준의 언질이었다. 물론 뒤에서 다른 놈이 수를 쓰긴 했지만, 그래도 태준의 말을 모른 척할 배짱은 그에게 없었다.

“큼. 알겠네. 가 봐.”

한윤재 부장의 눈동자에서 수락의 뜻을 읽은 태준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등을 돌렸다.

곧 한윤재 부장이 오늘 회식이 있음을 알렸고 성균에게 예약할 것을 지시했다. 성균은 신이 나서 예약을 하려다가 아직 가게가 열지 않았다는 사실에 시무룩해졌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한윤재 부장에게 질타를 받았다.

“자네는 회식 장소 예약도 제대로 못 하나? 그래 갖고 되겠어?”

별것도 아닌 거로 트집 잡는 한윤재 부장의 목소리를 들은 태준은 소리 없이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이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어찌 됐든 구실을 만들어 준 성균에게 고마워해야겠지.

“임 대리님. 예약은 제가 할 테니까 그냥 두세요.”

그는 선심 쓰듯 성균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예약을 마친 그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수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너희 엄마 오늘 늦는다. 회식 있어서.]

제법 빠르게 답장이 왔다.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날 선 수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태준이 피식 웃더니 손가락을 두드렸다.

[우리, 같은 회사 다니거든.]

곧이어 오는 짧은 답장.

[헐.]

어쭈. 말본새 보소. 태준이 피식거리며 화면을 두드렸다.

[부탁하면 아저씨가 책임지고 네 엄마 지켜줄게. 여기 아저씨들이 많거든.]

고민하는지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았다. 귀엽긴.

핸드폰을 내려놓은 태준이 업무를 보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핸드폰이 지잉 진동했다. 태준은 여유로운 태도로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울 엄마 잘 부탁해요, 아저씨.]

어쩌면, 선혜보다 수호를 공략하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태준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