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태준 아저씨
주말.
생각보다 수영강습이 일찍 끝났기에 수호의 친구들은 신이 나서 소리쳤다.
“야. 우리 놀이터에 놀러 가자!”
“좋다! 저기 새로 지은 아파트 놀이터가 그렇게 재밌대!”
“진짜? 가자, 가자. 윤수호, 너도 갈 거지?”
멀리 있는 수영 레인에 눈을 두고 있던 수호는 고개를 슬쩍 숙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맥 빠진 아이들이 샐쭉거렸다.
“아, 왜! 같이 가지!”
“다음에.”
짧게 대꾸한 수호를 새침한 눈으로 노려보던 아이들은 곧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만 인사를 하고 멀어졌다.
친구들이 수영장 문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는 걸 확인한 수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수영장에 있는 안전요원과 수중 에어로빅 수업을 진행하는 강사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 수호의 눈에 잠시 안전요원이 자리를 비우는 것이 보였다. 때마침 강사도 이쪽으로 등을 돌린 상태.
기회는 이때였다. 수호는 재빨리 잰걸음으로 수영 레인 한 곳에 다가갔다. 깊은 물이라 아이들의 입수를 금지한다는 팻말이 달린 곳이었다.
수호는 그 팻말을 힐끔 보고 수경을 쓰고 물속에 몸을 밀어 넣었다.
물 표면에서 조금 간격을 두고 잠수한 채 수호가 발을 놀렸다. 그런 수호의 머릿속에 접영을 하던 태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실 그때 아이들 중 가장 선망의 눈으로 태준을 보았던 건 수호였다.
수경을 벗고 드러난 얼굴을 확인하고 모르는 척 고개를 숙였지만 작은 심장은 두근거리며 뛰고 있었다.
태준은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폼 나게 수영을 했다. 너무나 멋있고 부러워서 자기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린이용 풀장은 접영을 하기에는 너무 얕았고 어린애들은 안전요원 때문에 레인이 깔린 풀장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그렇게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지금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수호는 태준이 했던 자세를 떠올리며 두 팔을 벌렸다. 이렇게 나비처럼 벌려서 물살을 헤치고 나왔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었는데.
그런데 태준이 할 때는 그렇게 쉬워 보였던 자세가 직접 해 보니 제법 어려웠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꾸만 제자리에서 허우적거렸다.
곧 숨이 딸려 수호는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다가 순간 화장실에서 돌아온 안전요원을 보고 재빨리 물 안으로 들어갔다.
들이켠 숨이 충분하지 않아 초조함에 숨이 막혔다. 지금이라도 물 밖에 나갈까 싶었지만, 고개를 빼는 즉시 어른 풀장에서 쫓겨날 게 분명했다.
기왕 들어온 거 자세를 한 번쯤은 제대로 잡고 싶었다.
물속에서 지나가는 안전요원의 모습을 올려다보던 수호는 그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다시금 접영을 시도했다.
몇 번 시도하다가 드디어 자세가 잡혔다.
‘이렇게 가슴을 누르면 되는구나.’
깨달음을 얻은 수호의 눈이 수경 안에서 반짝거렸다. 한번 하니까 다음은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수호는 숨을 참은 채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그런데 한계치까지 숨을 참은 탓인지 온몸의 근육이 긴장하며 점차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
어느 순간 갑자기 온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수경 속 수호의 눈이 부릅떠졌다. 쥐가 난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팔을 허우적거렸지만 역부족. 공포에 잠식된 몸은 긴장이 풀리긴커녕 더욱 뻣뻣해졌다. 굳은 몸은 떠오르지 못했고 다리를 추로 삼아 점점 아래로 추락했다.
벌어진 수호의 입 밖으로 거품이 부루룩 새어 나갔다. 숨이 턱 막히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엄마…….’
눈앞에 엄마 선혜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그때였다.
촤아아. 레인을 가로질러 헤엄쳐 오는 한 남자가 수호의 눈에 들어왔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수영하는 게 아니라 꼭 날아오는 것 같았다.
수호의 입 밖으로 다시금 거품이 부루룩 새어 나가고 눈이 힘없이 감기려는 그때.
헤엄쳐 온 남자가 수호의 몸을 한쪽 팔로 휘감고 단숨에 물 위로 떠 올랐다.
갑작스러운 공기의 침입에 놀란 폐가 콜록콜록 기침을 쏟아냈다.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몸이 번쩍 들렸다.
수호의 몸이 턱에 턱 하니 얹혔다. 수호는 수경을 벗고 헉헉 숨을 몰아쉬다가 고개를 들었다.
수호를 구해준 남자의 턱이 굳어 있었다.
누구지. 어쩐지 얼굴선이 낯익다 싶은 찰나.
젖은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린 남자가 수경을 거칠게 벗었다.
익숙한 얼굴.
“야.”
태준이었다.
*
삑, 삑!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멀리서 안전요원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 애 데리고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수호를 노려보던 태준이 삐딱한 눈으로 안전요원을 쳐다보았다. 안전요원이 바락바락 소리쳤다.
“아니, 이 깊은 물에 애를 데리고 오면 어떡합니까!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후. 길게 숨을 내쉰 태준이 짧게 혀를 찼다.
수호의 앞에서 조금 물러난 그가 옆에 있는 턱을 붙들고 가볍게 몸을 풀장 밖으로 빼내더니 바로 섰다. 안전요원은 우뚝 선 그의 키를 보고 잠시 주춤했다.
태준이 기죽어 앉아 있는 수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가자.”
수호는 빼꼼히 고개를 들어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탈의실 쪽으로 멀어졌다.
*
태준은 커다란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고는 탈의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수호에게 작은 수건을 던져 주었다.
얼결에 수건을 받아 든 수호가 수모를 벗고 느리게 머리카락을 닦아 냈다.
순간 태준이 수호를 휙 돌아보았다. 수호는 움찔했고, 태준은 그런 수호에게 뭐라고 하려다가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평상에 앉아 툭툭 옆자리를 두드렸다.
주춤거리던 수호가 이내 얌전히 다가와 태준의 옆에 앉았다. 태준이 허리 숙여 무릎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수호에게 낮게 말했다.
“너, 누가 겁도 없이 어른 풀장에 들어와.”
“……죄송해요.”
“진짜 다시는 그러지 마. 어? 그러다 큰일 난다고. 오늘은 내가 빨리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다른 레인에서 수영을 하다가 우연히 어린아이가 허우적거리는 걸 본 태준이었다.
가슴이 철렁하여 곧장 헤엄쳐 왔는데 구한 아이가 이 아이다.
선혜의 아들. 정말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다가도 조금 더 늦게 발견됐을 때를 가정하니 섬뜩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호되게 야단치고 싶었지만, 선혜의 아들이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겁먹은 아이를 더 몰아붙이고 싶지도 않았고.
“너 큰일 나면 네 엄마가 얼마나 가슴 아파하겠냐. 엄마 생각해서라도 그런 무모한 짓 다시는 하지 마. 알았지.”
수호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 태준의 손이 절로 수호의 머리로 향하다가 수호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했다. 머쓱한 얼굴로 손을 내린 태준이 자신의 목덜미를 주물렀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저씨.”
수호의 인사에 태준이 조금 놀란 얼굴로 수호를 돌아보았다.
건방지기만 한 꼬맹인 줄 알았는데 예의도 차릴 줄 알고. 하긴, 선혜가 이런 기본적인 것을 안 가르쳤을 리가 없다.
선혜의 아들에게 받은 인사인데 꼭 선혜에게 인사를 받은 것처럼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수호가 눈을 내리깔더니 작은 목소리로 우물거리듯 말했다.
“이제 저한테 말 시켜도 돼요.”
수호의 말뜻을 알아들은 태준의 입 밖으로 풋 하는 웃음소리가 터져나갔다. 수호가 그 웃음소리에 삐딱하게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짓는 표정이 어쩜 선혜랑 이렇게 똑같은지 모르겠다.
“뭐야. 구해준 보답이냐?”
수호가 느리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태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흠. 목숨 구해준 값치곤 약한데. 게다가 이미 너한테 말 실컷 걸었는데 무슨 의미가 있어. 안 그래?”
수호가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보더니 난감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엄마 번호는 안 돼요.”
“누가 네 엄마 번호 달래?”
선혜의 번호는 이미 태준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었다. 게다가 몰랐다 하더라도 수호를 통해 이런 식으로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엄마 말고, 네 번호 줘 봐.”
예상치 못한 요구에 수호의 눈이 커다래졌다.
“제 번호는 왜요?”
“그냥.”
태준이 편안한 투로 그렇게 말했지만, 수호는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수호가 선뜻 말하지 않자 태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을 들이밀더니 속삭였다.
“안 알려주면 오늘 있었던 일 네 엄마한테 이른다.”
수호가 그 말에 얼굴을 굳혔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수호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표정 또한 선혜랑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괜히 보고 싶네. 태준의 눈이 그리움을 머금고 잔잔하게 젖어 드는 때였다.
“……공일공.”
숫자를 나지막이 읊조린 수호가, 다음 순간 빠르게 다다다 제 번호를 말했다.
태준은 눈을 깜박였고 수호는 평상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됐죠?”
그러더니 쌩하니 샤워실로 들어가 버렸다.
허어. 머리 쓰는 것 보소.
하지만 수호의 술수는 먹히지 않았다. 태준은 여유로운 태도로 흥얼거리듯이 단숨에 외운 수호의 번호를 읊조렸다.
수호랑 같이 씻으러 샤워실에 들어가려다가 그는 몸을 돌렸다.
같이 씻는 건 아직 무리겠지. 아직 낯가림이 풀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곧 친해질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 거니까.
태준은 전용 사물함이 있는 칸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꺼내 수호의 번호를 저장했다.
그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 한 자락이 길게 걸렸다.
*
샤워를 마치고 난 수호는 짐을 챙겼다. 핸드폰을 챙겨 들었는데 메시지가 여럿 와 있었다.
놀이터가 진짜 재밌다며 다음에 같이 오자는 친구의 문자를 보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가 하나 있었다.
[앞으로는 혼자 하려고 하지 말고 궁금한 거 있으면 아저씨한테 물어봐. 가르쳐줄 테니까. -태준 아저씨-]
가르쳐준다고. 그 말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태준이 접영을 하던 모습과 자신을 구해주러 쏜살같이 헤엄쳐 오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수호는 태준이 보낸 메시지를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메시지 끝에 적힌 그의 이름을 눈여겨보았다.
태준.
수호는 메시지 끝에 적힌 그의 이름을 속으로 읊조리고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태준 아저씨]
그의 번호를 저장한 뒤 ‘네.’라고 짧은 답장을 보내는 수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미소 짓는 왼쪽 뺨에 보조개가 깊게 팼다.
*
그리고 다음 날. 수영강습이 끝난 뒤.
“아저씨.”
태준에게 먼저 다가간 수호가 말을 걸었다. 풀장 턱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상태로 태준이 지그시 올려다보자 수호가 말했다.
“저 수영 좀 가르쳐 주세요.”
태준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드리워졌다.